◇ 우리 시대의 성자 권정생 <상>

경북 안동 권정생어린이문학관에 전시된 ‘강아지똥’ 원고.
경북 안동 권정생어린이문학관에 전시된 ‘강아지똥’ 원고.

권정생은 우리 시대 위인이다. 그가 위인인 이유는 귀신도 부린다는 돈이 많아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이 있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학벌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가 위인인 이유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는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한 채, 평생 교회 문칸방이나 좁은 흙집에 살며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하고 아프고 소외된 이들, 나아가 민들레와 흙덩이를 위해 묵묵히 교회종을 치거나 원고지를 채웠을 뿐이다. 그는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가고, 비천한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다른 모습이라는 성경 속의 세계를 이 지상에 실현하기 위해 살다가 간 사람, 어쩌면 ‘우리 시대 성자’인지도 모른다.

 

…‘강아지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강아지똥’이라는 근원적인 진실을 보여준다. 별처럼 아름다운 민들레꽃이 개똥과 비와 따뜻한 햇볕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지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세상 만물은 약하고 보잘 것 없는 ‘강아지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권정생은 ‘강아지똥’, ‘무명저고리와 엄마’, ‘깜둥바가지 아줌마’, ‘하느님의 눈물’, ‘몽실언니’, ‘점득이네’와 같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동화나 소년소설을 100편이 훨씬 넘게 남긴 아동문학계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모든 작품이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에서 쓰여졌다는 점이다. 1937년에 태어나 해방 직후까지 지냈던 일본에서의 유년 시절과 부산에서 일하던 10대의 몇 년을 제외하고는 2007년 별세할 때까지 안동을 떠나지 않았다. 1968년부터 안동 일직교회 사찰집사(주요 업무는 교회 문단속과 시설 관리, 그리고 종지기)로 교회 문간방에 살았고, 1983년부터는 마을 청년들이 빌뱅이 언덕 아래에 지어준 5평 크기의 흙집에서 살며 글쓰기에만 전념하였다.

동화 ‘강아지똥’은 1969년 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수상작이며 권정생의 등단작이다. 이 작품에는 권정생이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펼쳐갈 사랑과 생명의 사상이 씨앗처럼 쏙쏙 박혀 있다. 주인공인 강아지똥은 돌이네 흰둥이가 누고 간 똥으로 “똥 중에서도 제일 더러운 개똥”이다. 그래도 강아지똥은 착하게 살고 싶고 세상에 좋은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결국 봄이 와서 싹이 돋아난 민들레를 만나고, 자신이 거름이 되어 민들레의 몸 속으로 들어가면 별처럼 고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강아지똥은 너무나 기뻐 민들레 싹을 힘껏 껴안아 버리고, 사흘 동안 내린 비에 자디잘게 부서져 민들레 뿌리로 흘러들어가 결국 민들레꽃을 피운다.

이 아름다운 동화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주인공이 다름 아닌 강아지똥이라는 점이다. 권정생 이전의 동화에서 주인공은 대개 왕자나 공주 혹은 왕자나 공주가 되려는 천사같은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권정생은 동화에서 “대부분 벙어리, 바보, 거지, 장애인, 외로운 노인, 똥, 지렁이, 구렁이 등 정상인들로터 멸시받거나 그로 인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계삼, ‘진리에 가장 가까운 정신’, 권정생의 삶과 문학, 원종찬 엮음, 창비, 2008)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는 왕자와 공주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중하다는 작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너도 꼭 무엇엔가 귀하게 쓰일 거야”라는 흙덩이의 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강아지똥이 결국 민들레꽃을 피워내는 귀한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는, 이 땅의 모든 가난하고 병든 약자들에게 힘을 주지만 아마도 이 이야기에서 가장 큰 힘을 얻은 독자는 권정생 자신이었을 것이다. 권정생이야말로 이 땅의 많고 많은 ‘강아지똥’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권정생은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부모님을 잃고, 형제들과도 자연스럽게 떨여져 살게 되었다. ‘강아지똥’을 쓸 때까지 젊은 권정생은 악몽처럼 떨쳐낼 수 없는 가난과 병고로 몸부림쳐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1956년 당시 불치의 병으로 인식되던 결핵에 걸린 후, 평생 그 병을 짊어지고 살았다.

이 시기 권정생이 그토록 동화작가가 되고자 했던 것은 “뭐 하나 가진 것 없는 자신이 이 생애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자취는 글밖에 없다고 생각”(이충렬,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 산처럼, 2018, 31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등단하기 불과 3년 전에 권정생은 콩팥과 방광을 떼어 내고 의사로부터 길어야 2년 정도를 더 살 거라는 말을 들은 상태였다. “항상 나는 죽는다는 그거, 그게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에 ‘강아지똥’ 이거 하나라도 써놓고 죽어야지”(권정생·원종찬 대담, ‘저것도 거름이 돼가지고 꽃을 피우는데’, 창비어린이, 2005년 겨울호)라는 마음으로 작품을 썼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목숨 걸고 쓴다’는 말을 하지만, ‘강아지똥’이야말로 조금의 과장도 없이 작가가 ‘목숨 걸고 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권정생의 동화 ‘강아지똥’
권정생의 동화 ‘강아지똥’

한 작가의 초기작일수록 한 인간을 작가로 내몬 내면적 고민의 흔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강아지똥’은 권정생이 험난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빈곤과 병환으로 인해 겪을 수밖에 없던 인간적 고통과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던 고투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다. 아마도 권정생은 이 무렵 자신을 강아지똥과 같은 존재로 여겼을지도 모르며, 이를 극복하는 길은 작품 속의 강아지똥이 자신을 자디잘게 부셔서 민들레꽃을 피워냈듯이, 자신의 병약한 몸에 남은 생명의 진액을 뽑아서 동화를 쓰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나아가 ‘강아지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강아지똥’이라는 근원적인 진실을 보여준다. 별처럼 아름다운 민들레꽃이 개똥과 비와 따뜻한 햇볕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지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세상 만물은 약하고 보잘 것 없는 ‘강아지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첫 번째 동화집 ‘강아지똥’(세종출판사, 1974)의 ‘작가의 말’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작가의 말’은 “거지가 글을 썼습니다. 전쟁마당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얻어먹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어찌나 배고프고 목말라 지쳐버린 끝에 참다 못해 터뜨린 울음소리가 글이 되었으니 글다운 글이 못됩니다.”로 시작된다. 거지라는 표현에는 권정생이 이 작품을 쓸 때까지 겪었을 그 처절했던 고통이 잘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거지가 글을 썼습니다”라는 문장을 작가의 어려웠던 삶에 대한 고백으로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바로 이어 작가는 “하기야, 세상 사람치고 거지 아닌 사람이 어디 있답니까? 있다면 ‘나 여기 있소’하고 한번 나서 보실까요? 아마 그런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듯합니다. 좀 편하게 앉아서 얻어먹는 상등거지는 있을지라도 역시 거지는 거지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세상 만물이 모두 깊이 연결되어 서로간의 도움과 배려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무엇도 자기만 잘났다고 뽐낼 수는 없는 일이다. 절대성 앞에서 모두는 ‘강아지똥’이자 ‘거지’알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때, 새로운 세계는 개시되는 것이다.

‘강아지똥’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참으로 놀랍다. 그것은 죽음을 통한 존재의 완전한 전환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해서 더 위대하게 태어난다는 것은, 이 작품이 쓰여지던 시대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매우 놀라운 발상이다. 이 시기는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도 오직 발전과 성장에 모든 것을 걸던 때이기 때문이다. 경쟁은 필연이며, 낙오는 용서받을 수 없었다. 이런 시대에 권정생은 자신을 송두리째 던져버림으로써 꽃을 피우는 강아지똥을 그려낸 것이다.

자신을 죽임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꽃피운다는 이 희생과 헌신의 자세는 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적 세계관의 본질에 해당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보여준 사랑의 정신이며, 작품에서도 별만큼 고운 민들레꽃을 피운 것은 바로 “강아지똥의 눈물겨운 사랑”이었다고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동시에 가장 보잘것없고 무시 받는 존재가 좋은 일을 행하여 성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상상력은 우리 민족의 원형적 상상력에도 맞닿아 있다. 서사무가 ‘바리공주’의 바리공주가 바로 그 성스러운 주인공이다. 일곱 번째 딸인 바리공주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태어남과 동시에 버림받는다. 그러나 아버지가 병이 들었을 때, 바리공주는 행복하게 자란 여섯 명의 언니 대신 온갖 고생을 하며 약을 구해와 아버지를 살려낸다. 그 결과 바리공주는 최고의 높은 정신적 경지에 오른다. ‘강아지똥’이 창작된 지 반세기가 넘은 지금도 꾸준하게 읽히는 이유는, 담고 있는 사상이 인류 보편의 아름다운 정신에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이 땅에는 ‘삶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강아지똥이 조용히 살다 갔음에 분명하다. 그들이 소리 없이 피운 민들레꽃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전히 희생과 사랑이라는 낱말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 권정생은…

1937년 일본 도쿄 빈민가에서 출생. 1946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가난 탓에 식구들과 헤어져 살았고, 유년시절부터 고구마 장수, 가게 점원 등으로 일했다. 결핵을 앓는 등 몸도 약했다. 1967년 안동에 정착해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했다. ‘기독교교육’, 조선일보 등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검소하고 성실한 삶으로 시종했기에 많은 독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문학평론가 이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