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수<br>수필가
강길수
수필가

마스크를 쓰고 철길 숲 산보에 나섰다. 봄을 타는지 몸이 나른해서다. 늘 가던 코스 따라 초등학교를 가로지르려 열린 문을 들어섰다. 교사(校舍) 앞 화단에 선 매실나무는 열매가 토실토실 도토리만큼이나 컸다. 옆의 능금나무에는 하얀 꽃잎이 자태를 뽐내며 일부 꽃은 지고 있다. 어느새 봄이 매우 짙어졌다.

저만치 떨어진 주차장에 승용차 한 대만 외롭다. 사람이라곤 그 앞으로 쓰레기 정리하는 분 한 명뿐이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는 휴일이면 제법 많은 이들이 운동장을 걷거나, 녹지의 쉴 곳에서 삼삼오오 이야기꽃이 피어나곤 했었다. 이 교정(校庭)은 주민들의 운동과 휴식, 소통의 공간이었다. 한데, 지금은 텅 비었다.

웬일인지 입구 반대편 출구의 문이 잠겨 있다. 전엔 문이 없던 곳인데 최근 설치되었다. 화급하다면 넘어갈 수 있을 높이의 자바라 차단문이다. 하지만, 평상시는 사람이 해선 안 될 행동이다. 철길 숲에 가려면 할 수 없이 돌아가야 한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오늘은 그냥 학교 구내를 몇 바퀴 돌기로 하였다. 오랜만에 한적한 봄 교정을 이것저것 바라보며, 그들과 마음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도 쏠쏠하다.

교사 한 바퀴를 돌고 운동장 쪽으로 향했다. 왼쪽 나무 곁 잔디밭을 굴렁쇠 형으로 동그랗게 파 엎어 잔디 뿌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뒤집어 놓았다. 뒤집힌 잔디 뿌리와 흙이 이랑, 파인 자국은 고랑이 되었다. 클로버의 증식을 막기 위한 조처임을 금방 알아챘다. 클로버는 졸지에 커나갈 자기 땅을 차단당하고 말았다. 이 숨 막히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로버는 짙은 녹색 봄옷을 바람에 팔랑이며 나비로 춤추고 있다. 둘러보니 잔디밭 다른 쪽에도 그렇게 차단한 곳이 여러 군데다.

저 클로버들은 결국 죽고 말 것이다. 언젠가는 작업자가 뽑아내거나, 제초제의 공습을 받을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어떤 곳은 클로버를 뜯거나 캐낸 흔적도 보인다. 자연의 뜻과 사람의 뜻이 상충하는 현장이다. 자연은 잔디와 클로버가 어우러져 한 땅에 사는데, 사람의 눈과 마음은 그 아울림을 용납할 수 없나보다. 잔디와 클로버가 어우러져 사는 모습도 달리 보면 아름다울 수 있을텐데 말이다.

문득 우리나라와 지구촌의 지금 모습도 바로 저렇다는 마음이 들었다. 코로나19의 전염을 막으려 나라 간 사람의 왕래를 차단하고, 국민에게 사회적 격리의 삶을 강제하고 있다. 그 확진자들은 병원이나 시설에서 격리치료를 받거나, 자택격리를 당하며 산다. 미 감염자도 외출 시 꼭 마스크를 쓰고, 사람 모인 곳 안가기, 사회적 거리 두기, 손 씻기 등의 실천을 요구받고 있다. 귀여운 우리 두 손자도 꼼짝없이 자기 엄마들과 집에 갇혀서 이 봄을 지낸다.

벚꽃이 피었을 때, 세 살짜리 손자 녀석과 그 아빠와 인근 주택단지에 조성된 벚꽃 길을 처음 드라이브 스루를 한 적이 있다. 차창 밖으로, 예전과 같지만 다른 봄이 와락 달려들었다. 이어, 드라이브 스루로 테이크아웃 커피를 사는 장면도 처음 겪었다. 주일예배를 자차 안에서 드리는 교회도 있다. 코로나19 감염검사도 워킹 스루 방법으로 한단다. 분명 자연은 같은데. 사람이 다른 봄이다.

잔디밭에 만들어진 클로버 차단 이랑과 고랑이, 꼭 우리 사회와 지구촌에 만들어진 전염 차단 망(網)으로 보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인가. 코로나19란 괴상한 전염병 확산이 정말 박쥐에서 비롯된 자연현상일까. 만에 하나, 사람이 만든 것이 개입되어 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포스트 코로나19 시대를 우리가 어찌 살아내야 할지 깊은 걱정이 앞선다.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본다. 시시각각 짙어지는 신록에 생명의 오라(aura)가 뿜어 나오고 있다. 첨단과학 시대를 사는 인류가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코로나19 격리의 올봄을, 그 불행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의료진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방역 당국의 부단한 노력 덕분에, 좋은 봄날 신록의 교정을 걷는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있다. 그분들이 마냥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