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홍복영·문양해(文洋海)역모사건에 연좌된 계우(溪佑)

불일폭포. 쌍계사 깊은 골짜기에 있는 이 폭포 아래에는 청학(靑鶴)이 노닐었던 연못으로 알려진 학연(鶴淵)이 있다. 정감록과 같은 비기(記)가 나돌고, 숙종 대 이후 성행하기 시작하는 미륵 세상을 갈망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변혁 세력에게 지리산은 더 없는 의지처가 되었다.

1787년(정조 11년)년 5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50대 후반의 여인이 장기로 유배를 와 관비가 되었다. 그 여인의 이름은 계우(溪佑)라 했다. 바로 정감록(鄭鑑錄) 역모사건의 연루자로 몰려 효시(梟示)를 당한 유한경(劉漢敬)의 친어머니였다.

‘정감록’은 조선시대 이래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온 예언서이다. 그 종류도 수십 가지에 이르지만 정작 저자의 이름과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책은 여러 비기(祕記)를 모은 것으로, 참위설(讖緯說) ·풍수지리설 ·도교사상 등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즉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를 예언하여 이씨의 한양 도읍 몇 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 도읍 몇 백 년이 이어지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 도읍 몇 백 년,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 도읍 몇 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개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는 책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이 두 사람의 문답 외에 도선(道詵) ·무학(無學) ·토정(土亭) ·격암(格庵) 등의 예언집도 있다. 이 책은 그야말로 국왕의 심기를 극도로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읽어서도 소지해서도 안 되는 금서였다. 그러나 그런 금압((禁壓))에도 불구하고 필사본의 형태로 전국 각지에 널리 퍼지면서 조선 말기에 각종 반란과 동학 등 신흥종교의 등장을 야기하기도 했다.

정조 9년(1785) 3월, 경상도 하동 지리산일대에서 정감록을 사상적 틀로 새 왕조를 꿈꾸는 역모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문양해 역모사건’ 또는 ‘홍복영의 옥사사건’이라고 한다. 그 배경에는 정조를 최측근에서 보필하다 실각한 홍국영(洪國榮)의 세력들이 있었다.

홍국영 일파들이 정조에게 반감을 가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1777년 정조는 자신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숙위소를 설치하고 홍국영을 대장으로 임명하였으나, 그의 권세가 너무 커지자 1779년 그를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고 숙위소도 혁파해버렸다. 그러자 그 잔여세력들의 역모 시도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이번에는 홍국영의 사촌동생인 홍복영(洪福榮) 일파가 또다시 새 정치판을 원하며 역모를 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홍복영은 측근인 이율(李瑮), 양형(梁衡) 등과 의논해서 문양해 등 이른바 산속에서 술법(術法)을 행하면서 민심을 모으고 있던 도인(道人) 세력들을 끌어 들이고, 이들을 이용해 유언비어로 민심을 동요시켜 새 왕조를 건립하려 했던 것이다.

그 본부는 하동 지리산이었다. 지리산은 삼국 시대부터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라의 국가제사인 ‘중사(中祀)’를 지내던 곳이었다. 고려 시대 이인로(李仁老)는 <파한집>에서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으니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고 엎드려 수 리(里)를 가면 곧 넓은 곳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옥토라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청학이 그곳에 서식하는 까닭에 청학동이라 부른다. 아마도 옛날 세상에서 숨은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무너진 담장이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라고 하였으나 청학동을 끝내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 이후 사람들은 도참설의 이상향인 청학동이 하동 지리산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정감록과 같은 비기가 나돌고, 숙종 대 이후 성행하기 시작하는 미륵세상의 갈망에서 본다면, 이런 지리산 청학동은 더 없는 사회변혁 세력의 의지처가 되기에 좋았다.

정작 그 청학동의 위치에 대해서는 어떤 이는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 있는 현재의 청학동이 그곳이라고 했고, 김일손은 쌍계사 북동쪽 계곡에 있는 불일폭포 부근이라고 했다. 유운룡은 그게 아니고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에 있는 세석평전이 그곳이라고 했는가 하면, 하동 악양면 등촌리에 있는 청학이골이 바로 청학동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김종직은 피아골이 바로 그곳이라고 했던 것을 보면 지리산 곳곳이 청학동인 셈이다.

 

지리산 청학동 도인촌 입구. ‘선구령부천하승지’, 즉 ‘하늘아래 신선들이 사는 천하의 명승지’라는 돌비석이 신비롭게 다가온다.
지리산 청학동 도인촌 입구. ‘선구령부천하승지’, 즉 ‘하늘아래 신선들이 사는 천하의 명승지’라는 돌비석이 신비롭게 다가온다.

홍복영의 사주를 받은 지사(地師·풍수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를 잡아 주는 사람) 양형(梁衡)은 지리산 일대의 도사들을 다스릴만한 인물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 적임자가 친척 조카인 문양해였다. 문양해는 충청도 공주 출신으로 평민이었다.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그는 상당한 도를 닦아 도인(道人)으로 통했다. 1783년 양형은 홍복영으로부터 자금을 받아와 하동의 지리산 쌍계사 골짜기 깊은 곳에 백여 칸의 집부터 지었다. 그 집의 당호를 ‘하천산당(荷川山堂)’이라고 붙이고 이곳에 문양해를 불러와 머무르게 했다.

문양해는 이곳을 근거지로 하고 각지를 전전하며 동조자를 모았다. 그의 아버지 문광겸도 이곳으로 와서 지하본부를 총괄했고, 3촌 문광덕도 주거지를 하동으로 옮겨 약포(藥鋪)를 경영했다. 이들은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에서 활동하는 주형채·오도하 등과 연계를 맺으면서 한양과 지방 각지에서도 동참할 자를 모았다.

이에 동참한 사람들은 승려 부류인 유한경·이태수·김명복 및 거사(居士) 출신인 조거사(趙居士) 등이었다. 이들은 ‘지리산 선원(仙苑)의 이인(異人)들’로부터 들은 내용이라며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 ‘지리산 이인들’은 지리산의 선원(仙苑)인 하천산당에 은거하면서 선술(仙術)과 술법으로 정감록을 해석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지리산 선원의 이인(異人·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은 향악(香嶽)으로 불린 김호(金灝), 징담(澄潭)으로 불린 고경명(高輕明), 노선생(老先生)으로 불린 이현성(李玄晟), 일양자(一陽子)로 불린 모문룡(茅文龍) 등이었다. 문양해는 이 이인들이 ‘정감록’ 같은 예언서에 적힌 내용을 해석해서 주면 이를 중간매개자를 통해 전국에 유포하는 역할을 했다.

중인 출신의 양형은 ‘정감록’ 지하조직의 서울지부 책임자였다. 그는 서울의 조직원들에게 향악 선생과 노선생의 말을 전했다. 그 말들은 문양해로부터 전해들은 장차 나라가 어지럽게 된다는 예언들이었다. 더하여 홍복영은 구체적으로 ‘장차 나라가 셋으로 쪼개질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른바 ‘동국삼분지설(東國三分之說)’이다. 조선이 삼국으로 분열될 징조는 산천(山川)과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에 나타나 있었단다. 나라를 셋으로 나눠 가질 영웅들은 강원도 통천의 유(劉)씨, 전라도 영암의 김(金)씨 그리고 정(鄭)씨라 했다. 이중 정씨는 남해의 어느 섬에 숨어 있는데, 때가 되면 전국을 통일하여 나라를 세울 거라고 했다. 정씨가 출현할 시기는 정조 9년(을사년) 3월이 거병시기로 예정돼 있다고 했다. 이는 역성혁명, 즉 이씨 왕조의 멸망과 새로운 정씨왕조의 출현을 예고한 것이었다. 문양해는 도당을 불러 모아서 그 날짜를 정하고, 거사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이 사건은 거사계획 단계에서 발각되어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문양해 등은 1785년 2월 29일 전 현감 김이용(金履容)의 고변으로 말미암아 혁명적인 이상국가 건설에 실패하였다. 하늘의 뜻과 산천의 기운으로 무능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들의 바람은 결국 사람에 의해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창덕궁 숙장문. 숙장문 앞은 국문(鞫問)하던 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다. 1785년 3월, 정조는 이곳에서 문양해 역모사건에 대한 친국(親鞫)을 행했다. 중심인물인 문양해는 신인(神人)을 만나 그 신인이 말 한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퍼뜨렸다고 스스로 진술했는데, 그 중에는 ‘곧 나라가 세 개로 쪼개진다’. ‘해도 진인 정씨가 그 나라들을 통일하고 제후가 된다’는 유언비어들도 포함돼 있었다. 숙장문 앞에서 한 달 내내 열린 국문은 관련자들이 사형되거나 유배당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창덕궁 숙장문. 숙장문 앞은 국문(鞫問)하던 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다. 1785년 3월, 정조는 이곳에서 문양해 역모사건에 대한 친국(親鞫)을 행했다. 중심인물인 문양해는 신인(神人)을 만나 그 신인이 말 한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퍼뜨렸다고 스스로 진술했는데, 그 중에는 ‘곧 나라가 세 개로 쪼개진다’. ‘해도 진인 정씨가 그 나라들을 통일하고 제후가 된다’는 유언비어들도 포함돼 있었다. 숙장문 앞에서 한 달 내내 열린 국문은 관련자들이 사형되거나 유배당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으로 1785년(정조9) 3월 29일 주모자 문양해는 참형에 처해졌다. 응좌인(應坐人)들도 덩달아 처벌되었는데, 어미 아기(阿只)는 황해도 풍천부(豐川府) 초도(椒島)에 계집종이 되었고, 아우 문금득(文錦得)은 함경도 부령부(富寧府)에 종이 되었다. 누이 문복혜(文福惠)는 평안도 운산군(雲山郡)의 계집종이 되었고, 누이 문숙혜(文淑惠)는 양덕현(陽德縣)의 계집종이 되었다. 문인방(文仁邦)·이율(李瑮)은 효시되었다. 문광겸(文光謙)은 지레 겁을 먹고 자살하였고, 주형로(朱炯魯)와 오도하(吳道夏)는 사형을 감하여 귀양 보냈다. 양형(梁衡)은 형을 집행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하동에 있던 홍복영도 사형에 처해졌다.

사건의 여파는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1786년 2월 11일(정조 10) 유한경·이태수·김명복 및 조거사(趙居士)가 삼수(三水) 인차동(仁遮洞) 이문목(李文穆)의 집에 모여 흉서를 작성하여 퍼뜨리다가 이태수와 유한경이 잡혔다. 국문결과 이들은 문양해 사건의 공범이란 사실이 밝혀져 모두 역모죄로 처형되었다. 연좌된 사람은 그 이듬해인 1787년(정조 11) 5월 3일에야 처벌이 이루어졌다. 유한경의 아버지 유계청(劉溪淸)은 연좌되어 교형에 처해졌고, 그의 어머니 계우(溪佑)는 경상도 장기현으로 와서 노비가 되었던 것이다.

유한경은 평안도 안주목에서 태어났고, 이태수는 전라도 순천부 고돌산(古突山)에서 태어났다. 이들이 역모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그들의 고향 고을에도 연대책임을 물어 안주목(安州牧)을 강등하여 안북현(安北縣)으로 삼고, 순천부(順天府)를 강등하여 순천현(順天縣)으로 삼았다.

‘정감록’은 비록 허무맹랑한 도참설·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당시 오랜 왕정과 당파싸움에 시달리며 조정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실제로 광해군·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운동에는 거의 빠짐없이 정감록의 예언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연산군 이래의 국정의 문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도탄에 허덕이던 백성들에게 ‘이씨가 망한 다음에는 정씨가 있고, 그 다음에는 조씨·범씨가 일어나 한 민족을 구원한다’는 게 그나마 한 가닥 희망이었던 것이다.

정조 9년에 일어났던 이 홍복영·문양해 역모사건은 정감록을 이용하여 체제 변혁을 시도했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