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대장 일가의 몰락
훈련대장 일가의 몰락
  • 등록일 2020.02.04 18:45
  • 게재일 202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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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구선복(具善復) 옥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효창원, 조선 22대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원이다. 문효세자는 정조와 의빈성씨의 아들로 1784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86년 5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효세자가 죽자 구선복 등은 상계군 담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역모를 꾸미다 처형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효창원, 조선 22대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원이다. 문효세자는 정조와 의빈성씨의 아들로 1784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86년 5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효세자가 죽자 구선복 등은 상계군 담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역모를 꾸미다 처형되었다.

능성구씨는 무인(武人)의 명가였다. ‘능성구씨사료집’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총 562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가운데 진사 144명, 문과 55명, 무과 363명으로 무과 출신이 65%를 차지한다. 따라서 능성구씨는 영조대(英祖代)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 권력의 핵심에서 가문의 세를 떨쳤다. 하지만 정조의 즉위 후 10년 만인 1786년 12월 9일, 구선복이 역모죄로 몰려 조카인 구명겸과 함께 죽음을 당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 문효세자가 죽자 상계군(常溪君) 담(湛)을 세자로 추대하려 하였다는 ‘구선복 옥사’가 이 집안을 몰락의 길로 걷게 했다

이 옥사의 연좌인으로 1787년(정조 11년) 1월 15일, 구명겸(具明謙)의 첩 아기련(阿只連)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구명겸은 구선복의 조카이기도 하였지만, 마흔 살에 황해도병마절도사라는 중책을 맡은 이래 좌포도대장,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두루 거치며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권력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이는 구선복의 힘이 받쳐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론에 속한 구선복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 때 그 뒤주의 감시책임을 맡은 포도대장이었다.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사도세자의 뒤주를 마련한 장본인이라고 한다. 그는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를 조롱하기까지 했으며, 당시 세손이던 정조가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세손은 이 모습을 보고 장차 자신이 왕이 되면 반드시 구선복을 징치(懲治)하리라 다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1792년(정조 16) 윤 4월 27일자 ‘정조실록’의 기록은 정조가 그동안 얼마나 구선복을 증오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조는 “역적 구선복으로 말하자면 홍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 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헐후(歇後·뒤 끝에 붙은 말을 줄여 버림)한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에 오를 때 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들이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 라고 했다. 이는 정조가 그동안 극도의 인내로 복수의 칼을 품고 있었음을 고백한 것이었다.

 

경상남도 통영시 도산면 관덕리 산 97번지에 있는 몰자비(沒字碑). 이 비석은 1781년부터 1783년까지 통제사(統制使)로 있었던 구명겸(具明謙)이 떠나고 난 다음 1783년 음력 3월에 선정을 베푼 그의 은덕을 영원토록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백성들이 세운 불망비(不忘碑)였다. 그러나 구명겸이 구선복과 같이 1786년(정조10) 역모에 가담한 죄로 처형된 이후에는 누군가가 글자를 지워버렸다. 옛날 죽은 통제사가 귀신으로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일명 ‘귀신비’ 또는 ‘구신비’로 불리고 있다.
경상남도 통영시 도산면 관덕리 산 97번지에 있는 몰자비(沒字碑). 이 비석은 1781년부터 1783년까지 통제사(統制使)로 있었던 구명겸(具明謙)이 떠나고 난 다음 1783년 음력 3월에 선정을 베푼 그의 은덕을 영원토록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백성들이 세운 불망비(不忘碑)였다. 그러나 구명겸이 구선복과 같이 1786년(정조10) 역모에 가담한 죄로 처형된 이후에는 누군가가 글자를 지워버렸다. 옛날 죽은 통제사가 귀신으로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일명 ‘귀신비’ 또는 ‘구신비’로 불리고 있다.

그랬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하자말자 노론 벽파의 영수 홍인한과 정후겸을 처단했지만, 막상 구선복은 징치하지 못했다. 그것은 구씨 일가가 무시무시한 병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선복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구선복은 1757년(영조 33) 총융사로서 최초의 군영대장에 오른 이후 1765(영조 41)년에 마침내 훈련대장에 올랐다. 그는 종형이었던 구선행(具善行)과 번갈아가며 병권을 잡아 무반 벌열로서의 위세를 보여주었다. 정조 즉위 이후에는 홍국영과 교대로 훈련대장과 금위대장을 역임하였으며, 홍국영의 실각 이후에도 1786년(정조 10)까지 훈련대장의 직위를 유지했다. 정조가 즉위한 후 10년이 되었지만 그 10년 동안 중간 중간 홍국영이 맡은 3년의 기간을 뺀 7년간은 구선복이 훈련대장을 맡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무장들이 그를 ‘무종(武宗)’이라 받들 정도로 그는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구선복의 배경도 막강했다. 윗대부터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 출신이기도 했지만, 특히 정조 즉위 초 영의정을 역임한 소론의 거두 김상철(金尙喆)과는 사돈지간이었다. 김상철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화완옹주(和緩翁主·영조와 영빈 이씨의 딸)와도 인척간이었다. 화완옹주의 시아버지인 정우량(鄭羽良)의 사위가 바로 김상철이었던 것이다. 그는 소론임에도 노론벽파인 정후겸·김귀주·홍인한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인물이었다. 구선복도 이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갔기에 정조는 즉위하고도 10여년간은 강력한 그의 힘을 꺾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구선복은 훈련도감에서 궁중으로 파견한 하리(下吏)들을 통해 조정 대소사를 일일이 보고를 받았을 뿐 아니라,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오라버니인 좌의정 홍낙성을 빈연(賓筵·손님을 위해 베푸는 잔치)에서 업신여길 정도로 위세를 떨었다. 그래서 정조는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선복 일당을 제거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드디어 정조에게 기회가 왔다. 도승지 홍국영이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정조 초반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를 정조의 후궁(원빈)으로 들이기도 하면서 엄청난 권세를 부렸다. 그런데 원빈이 후사 없이 일찍 죽어버리자 홍국영은 정조의 조카인 상계군(常溪君)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장차 왕이 될 세자로 삼으려고 했다. 홍국영은 이 일로 정조의 미움을 사 축출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정조와 의빈성씨(宜嬪成氏) 사이에 문효세자가 태어났다. 당시 의빈은 후궁이 아닌 궁녀였기 때문에 정조는 문효세자를 원자로 정하기를 주저했으나, 소론의 요구로 결국 생후 3개월 만에 원자로 삼았다. 1784년 7월, 정조는 태어난 지 만 22개월짜리 원자를 세자로 책봉했다. 이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의 세자 책봉에 해당한다. 하지만 왕세자로 책봉됐던 문효세자가 다섯 살 되던 해인 1786년 6월 6일 홍역으로 죽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의빈성씨도 같은 해 9월, 출산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영화 ‘사도’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의 연출 모습.
영화 ‘사도’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의 연출 모습.

의빈성씨의 죽음을 두고 조정에서는 홍국영이 상계군 담의 일파와 짜고 그녀를 독살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상계군을 공석이 된 세자자리에 앉히려는 역모가 있다는 것이다. 상계군은 은언군(恩彦君) 인(<4104>)의 아들이었다. 은언군은 영조의 손자이자 장조(사도세자)의 서장자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는 이 의혹을 공식화하는 언문전교까지 내렸다. 그녀는 반드시 역적을 찾아내어 처단해야 한다며 정조를 압박했다. 실제 정순왕후의 하교는 은언군을 노린 것이었다. 정조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생인 은언군을 역적으로 몰아 제거할 작정이었다. 그래야만 혹 정조가 후손을 낳지 못할 때 자신들이 마음대로 왕의 자리를 정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일은 정순왕후의 의도와는 영 딴판으로 전개되었다. 정조는 이 사태를 구선복일가를 제거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의심의 핵심에 있던 상계군 담이 갑자기 죽어버렸다. 이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진 상계군의 외할아버지 송낙휴(宋樂休)는 김상철과 구이겸(具以謙)이 역모에 연관되어 있다는 고변을 했다. 즉 상계군이 죽기 전에 자신에게 고백을 한 게 있었는데 그 내용은 구선복, 구명겸 등이 짜고 상계군을 세자로 앉히려는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김상철은 구선복의 사돈이었고, 구이겸은 구선복의 양아들이었다.

급기야 역모죄를 수사하기 위한 추국청(推鞫廳)이 설치되고 중심인물인 구선복이 잡혀왔다. 구선복은 처음에는 자신을 몰아내려는 음모라며 결백을 주장하다가 장언회(張彦恢)와 대질하자 결국에는 승복을 했다. 1년 전에 있었던 홍복영과 문양해의 역모사건에 자신과 구명겸 등이 관여하여 정조를 죽이고 상계군 담을 국왕으로 추대하는 반정(反正)을 추진하다 그만 두었다고 실토를 한 것이다.

1786년(정조10) 12월 9일, 정조는 구선복을 최고의 형벌인 능지처사에 처했다. 구명겸에 대해서는 남문(南門) 밖에 삼군(三軍)을 크게 모아 놓고 조리를 돌린 뒤에 목을 베어 매달아 효수(梟首)하였다. 구이겸은 그 다음해인 1787년 1월 9일 의금부도사를 과천현에 보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다.

연좌인들에 대한 처벌도 있었다. 1787년 1월 15일, 구명겸의 가족과 처첩들은 전부 노비가 되었다. 처(妻) 정임(丁任)은 전라도 흥양현 발도, 첩(妾) 아기련(阿只連)은 경상도 장기현, 첩 아기(阿只)는 함경도 부령부, 첩 희안(喜安)은 길주목, 며느리 유임(有任)은 전라도 해남현, 서모(庶母) 함봉(咸鳳)은 함경도 이성현, 서모(庶母) 매선(梅善)은 경상도 하동부, 서녀(庶女) 순임(順任)은 전라도 흥덕현, 서녀(庶女) 희임(喜任)은 보성군, 손녀 소숙(小淑)은 평안도 희천군, 손녀 정숙(貞淑)은 영원군의 노비가 되었다. 그해 갓 태어난 손자는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의 노비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정조는 국왕을 음해하여 반정의 기운이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음을 신하들에게 토로하면서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병오년에 이르러서야 국법에 의해 처단되었는데 시신을 저자에 버리는 형벌이 어찌 이 역적에게 법을 충분히 적용했다고 하겠는가. 사실은 살점을 씹어 먹고 가죽을 벗겨 깔고 자도 시원치 않았었다.” 고 했다. 또 재위 16년 5월에 다시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역적 구선복의 일은, 그의 극도로 흉악함을 어찌 하루라도 용서할 수 있겠는가마는 그 스스로 천주(天誅:하늘의 주벌)를 범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죽였던 것이다”고 했다. 부친을 죽음으로 몬 인물이지만 사사로운 감정으로 처벌하지 않고 스스로 법망에 걸린 후 처벌했다는 뜻이다.

결국 정순왕후가 정조의 동생 은언군을 죽이기 위해 시작된 언문전교 사건은 노론의 노련한 장수 구선복 일가를 몰락시키는 것으로 끝이 났다. 노론이 밀고 있던 정순황후측은 군부 한 축이 무너지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대반전으로 병권을 완전히 장악한 정조는 오군영의 대표인 훈련도감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친위 군영인 장용영(壯勇營) 창설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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