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가는 사람들과 정지용 시인

고향을 찾아가는 할머니-어머니-딸. 정겨운 3대를 인도 버스터미널에서 만났다.
고향을 찾아가는 할머니-어머니-딸. 정겨운 3대를 인도 버스터미널에서 만났다.

인간에게 ‘고향’이란 어떤 의미일까?

자신이 첫울음을 터뜨린 잊을 수 없는 땅, 단순히 말과 글만으로는 명확하게 정의될 수 없는 이상향, 끝끝내 돌아가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은 곳….

나이를 먹을수록 그렇다. 입술을 오므려 “고향”이라고 조용히 발음해 볼 때면 쓸쓸하게 웃는 엄마의 얼굴, 밥 짓는 냄새 풍겨오던 어두운 부엌, 벌거숭이 어린 친구들과 달려가던 흙길이 동시에 떠오른다. 그림자 같은 궁핍보다는 빛나는 햇살의 기억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한국 사람이나 외국인이나 유사한 듯하다. 다음 주면 바로 그 고향을 찾아가는 행렬이 도로마다 장사진을 이룰 것이다. 우리나라도, 중국도, 베트남도. 유럽과 미국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부모 사는 고향을 방문할 때처럼.

기자가 아직 젊었던 30대 중반. 이와 유사한 풍경을 저 멀리 ‘타지마할’과 ‘바라나시’의 땅 인도에서도 본 적이 있다. 아래는 그때의 에피소드다.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환한 웃음 담긴 얼굴로 고향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인도 사람들.
환한 웃음 담긴 얼굴로 고향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인도 사람들.

▲‘고향’ 찾는 인도인들 때문에 구할 수 없었던 버스표

석양의 아름다움이 심장을 뒤흔드는 인도 서부의 해변 여행을 마치고 이슬람과 힌두 유적이 곳곳에 산재한 흥미로운 내륙 도시 함피로 가기로 결정한 날.

느지막이 인도식 카레라이스와 삶은 달걀로 아침을 먹고 함피로 떠나는 버스를 타러 터미널을 향했다.

그런데 이건 뭔가? 버스표가 없단다. 아니, 함피행 버스가 아예 없다는 것이다.

무슨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나. 여행자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생겨도 절대 놀라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떠도는 나라가 인도라지만. 듣고 보니 갑자기 버스가 사라진 사연은 이랬다.

요 며칠 사이 함피 인근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이 대거 그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 갑자기 그 노선의 버스만을 증차하기가 사정상 어려워 하루나 이틀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승차가 힘들다는 것.

터미널 직원이 미안한 표정으로 이런 궁여지책을 알려줬다. “사설 여행사 버스표는 있을 테니, 더 늦지 않게 근처 여행사로 가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조언에 따라 근처 여행사 사무실을 서너 군데나 돌아다녔다.

하지만, 거기서도 “지금은 당신이 왕이라 해도 함피로 떠나는 버스표를 구하기 힘들 것”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익숙지 않은 사태에 난감하고 화가 났다. ‘왜 하필 내가 버스 티켓이 필요할 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라는 혼잣말로 분을 삭이며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고 차가운 맥주를 몇 잔이고 거푸 들이켰다.

그때였다. 할머니-어머니-딸로 보이는 인도 여자들이 눈에 들어온 것은.

함피가 고향이라는 그들은 2년 만에 이제나저제나 눈이 빠지도록 피붙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할머니는 여동생을, 어머니는 오빠를, 딸은 또래의 사촌들과 만날 생각에 마음이 들떠 2~3시간 후에나 도착할 버스를 일찌감치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선량해 보이는 조모와 모녀, 그 다정한 3대만이 아니었다. 많은 인도인들이 몇 시간의 지겨운 기다림에도 자신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로 간다는 설렘에 세상 누구보다 환하게 웃는 낯으로 터미널 주위를 서성거리는 모습이 그제서야 제대로 보였다.

다른 어딘가에서도 본 듯한 낯설고도, 낯익은 풍경에 이상하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 상황에서 정지용(1902~1950)의 목가적인 시 ‘향수’가 떠오른 것은 왜였을까?

 

낡은 버스를 타고 10시간을 넘게 달리더라도 ‘고향 가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사진제공 송선호
낡은 버스를 타고 10시간을 넘게 달리더라도 ‘고향 가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사진제공 송선호

▲모든 사람이 슬픔이 아닌 기쁨을 안고 귀향하길

정지용은 타고난 시적 감수성에 일찌감치 공부한 인문학적 근대 지식까지가 더해져 일제강점기 ‘조선의 시왕(詩王)’으로 불렸던 천재 문사(文士)였다. 20세기 초반 한국에선 드물게 모던함으로 무장한 세련된 시인.

당대의 문학평론가들은 “이미지의 새로움은 물론이고, 절제된 시어(詩語)의 사용으로 조선 문단의 또 다른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는 최상급의 찬사를 정 시인에 바치곤 했다. 감히 누구도 그런 평가에 “아니다”라고 나서며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정지용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일자무식의 농부나 날품팔이 일꾼과 다르지 않았다.

시의 제목처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아련한 ‘향수(鄕愁·고향을 기리며 시름함)’를 행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커다란 얼룩소 곁에서 뛰놀던 철없던 유년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고.

언제나 그리운 아버지가 힘겨운 농사일에 가끔은 깜박깜박 졸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고.

동네의 어떤 여자아이보다 머리칼 색깔이 새까맣고 고왔던 어린 누이가 맨발로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고.

곤궁한 살림을 이어가던 가난한 지붕 밑이지만, 어떤 부잣집보다 화목했던 식구들이 살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고.

이처럼 자신이 태어난 곳을 ‘낙원’으로 생각하며 아프게 그리워했던 정지용은 한국전쟁 와중에 동료 문인 김기림·박영희 등과 함께 형무소에 수감됐고, 이후 납북돼 다시는 고향인 충청북도 옥천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시인은 비극적 한국 현대사에 고향을 뺏겼다.

한 주 후면 많은 이들이 고향을 찾는 설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 사람들만이 아닌 중국인, 베트남인, 인도인도 제 생명의 뿌리가 잉태된 땅을 찾아 연어를 흉내내 거꾸로 헤엄쳐 오를 터.

이 ‘고향 회귀(回歸)’가 눈물겨움이 아닌 웃음과 반가움만으로 가득하기를 미리 빌어본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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