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설이라고 해도 어렸을 때 같지는 않아서 나이가 들수록 즐거움보다는 의무감이 앞선다.

가만 있자, 내 나이가 얼마나 되었더라? 하고 생각하니 실로 어마어마하다. 수십년전 대학원에 들어가 무서운 선생님 연세가 얼마나 되셨나? 했을때 바로 그 분이 지금 내 나이셨다.

그러니 내 아버지, 어머니는 지금 얼마나 연세가 드셨을까. 아버지 서른두살, 어머니 스물일곱살에 결혼해서 이듬해에 내가 세상에 나왔다. 나오기는 부모님 덕분에 나왔는데, 그후로 부모님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나이 들어서도 내 좋은 것만 찾아다녔지 부모님 생각에 밤을 지샌 적은 없다.

여름 지나서 어머니가 허리가 아프다고 하셨다. 키에 비해서 체중이 좀 되시기 때문에 허리에 부담이 되시는 것이려니 했다. 또 허리 아픈 데는 내가 왠만한 선수쯤은 우습게 보는 처지인지라 아프시면 얼마나 아프시랴 했다.

그 사이에 학교 일이 무척이나 힘들고 바빴다. 민족에 관한 국문학 쪽의 논의를 둘러싸고 어떤 절박한 생각이 떠올라 그 일에 쫒기기도 했다. 유월부터 나도 얼마나 몸이 힘든 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고 지낸 것도 같다.

십이월이 되자 겨우 정신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어머니의 허리 상태는 앉지도 서지도 못 할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이 아플 때 구해줄 수 있는 의사 만큼 귀하고 고마운 존재는 없다. 결국 어머니는 동생 병원에 계시다는 명의로부터 수술을 받으시게 되었다. 어머니가 의사며 수술을 그렇게 무서워 하시는 줄 이제서야 알았다. 기왕 하기로 한 것 마음 놓으시라고 몇번이나 안심시켜 드렸지만 다가올 큰 일이 내내 걱정이신 모양이었다.

그동안 내가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잘해야겠다고 대전, 서울을 매일같이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수술 날이 닥쳤다.

아침 일곱시 반에 어머니는 수술실로 들어가셨다. 아홉시 반까지 수술 준비를 하셨다. 열시 반이 되어서야 나는 아버지와 막내 동생이 기다리는 수술실에 도착 할 수 있었다. 기차 안에서 잠이 든 나는 대전을 지나 동대구 역까지 갔다 되돌아 온 것이었다.

열한시반, 열두시반, 한시반, 그리고 두시가 되어서야 어머니의 수술은 끝이났다. 전광판에 어머니의 이름 옆에 회복실이라고 써 있었다. 드디어 수술실 밖으로 참을 수 없는 통증을 호소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났다.

허리 수술 만큼 아픈게 없다는데.

나는 참 못나고도 나쁜 놈이었다.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구제불능, 천하의 불상놈 밖에는 안 될 것이었다. 사람의 사랑 가운데 어머니 사랑만큼 지극한 것이 없다. 나는 그 사랑을 받은 자식인 것이었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