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더러 억장으로 취하는 때가 있다. 나이 먹고 몸이 부실한 것도 원인이겠으나, 강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술에 장사 없다는 말을 실감하곤 한다. 주독으로 고단해진 육신을 추스르다 보면 성찰의 시간이 찾아온다. 구토와 오심으로 괴로워한 적도 있으나, 요새는 그런 일이 없다. 그것도 음주 행각으로 얻어낸 작은 지혜이거나 깨달음이려니 생각한다.

나른해진 몸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지난 일을 회억하거나 흐뭇한 추억에 잠기는 날도 있다. 아마 그것이 음주 다음 날의 유쾌한 선물일 것이다. 온종일 빈둥거리면서 몸과 마음을 분망한 일상과 격절(隔絶)하는 한가한 하루! 술을 싫어하거나 홀짝거리는 정도의 애주가는 빈둥거림의 미학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마다 세상과 대면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자크 러클레르크의 ‘게으름의 찬양’(1936)을 선물받았다. 버트란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1935)을 인상 깊게 읽었기로, 같은 부류의 서책이려니 짐작했다. 러셀은 모든 지구 거주자가 하루 4시간 노동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견해를 주장한다. 문제는 누군가는 전혀 노동하지 않으면서 부를 축적하고, 어떤 이들은 장시간 노동으로 혹사당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온종일, 매달, 매년, 종신토록 놀고먹는 자들이 있다. 그것도 적잖은 자들이 그런 놀라운 행운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 아무리 일해도 하루 세끼 배불리 먹지 못하는 인간도 아주 많다.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조국과 부모 때문에 이런 편차가 생겨난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는 말은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흙수저와 금수저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것이 운명이나 되는 것처럼.

러클레르크 신부가 게으름을 찬양하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속도’에 있다. 너무 신속하게 변해가는 세상과 거기 편승해서 ‘더 빨리’를 외쳐대는 20세기 초반 유럽의 풍경을 그려낸다. 2차 대전으로 느림이 찾아왔다는 그의 생각은 무척 새로운 것이었다. 수많은 인명살상을 가져온 전쟁의 참화가 아니라, 속도경쟁에서 빠져나오도록 인도한 전쟁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하는 혜안과 통찰! 하지만 2차 대전 직후 인간은 우주로 날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달에 도달한다. 옥토끼가 절구질한다는 항아의 달에 사람이 꿈처럼 발자취를 남긴 것이 벌써 50년 전 일 아닌가?! 결국 그것은 지구 자전속도를 능가하는 속도에서 비롯된 일 아닌가! 오늘날 우리는 300킬로미터의 시속으로 전국을 오가고, 시속 1000킬로미터 내외로 지구를 왔다 갔다 한다. 그야말로 속도에 빠져서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현대인의 특징처럼 각인된 시대다.

느림은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해준다고 러클레르크는 말한다. “우리의 삶이 제대로 인간적이려면 거기에는 느림이 있어야 합니다.” 아주 큰 울림을 주는 구절이다. 올해에는 나도 어느 정도 빠름에서 놓여났으면 좋겠다. 그것이 궁금한 빈들거리는 하오가 느릿하게 지나간다. 여러분의 하루는 어떤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