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문열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영양군 광산문학연구소를 찾아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소설가 이문열.

“작가가 바라보는 문중의 모습은 향수(nostalgia)의 프리즘을 통해 이상화되고 낭만화된다. 본래 향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향해 발생하는 감정으로서, 상실된 것에 대한 아이러니한 그리움이다. 이러한 그리움 속에서 사라진 과거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다름 아닌 이상화되고 낭만화 된 상념인 것이다. “아, 사라진 것들은 아름다웠느니….”야말로 문중으로 대표되는 고향을 대하는 작가의 기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문열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는 1980년에 민음사에서 처음 출판되고, 1986년에 나남출판사에서 개정판이 나온 연작장편소설이다. 문단에 갓 등단한 현우가 귀향하여 겪거나 들은 사나흘 동안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현우는 옛 모습을 잃어가는 고향 암포(岩圃)에서 어림대, 청려당, 옛주막, 벽계학교, 장터, 지서, 고옥, 폐원 등을 방문하고, 그 곳의 주인이었던 입향조(入鄕祖), 교리어른, 정산선생, 종손, 장자(長者) 등을 회상하거나 만난다.

암포는 김승옥의 ‘무진기행’(1964)에 등장하는 무진(霧津)이나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1973)에 등장하는 삼포(森浦)처럼 실제 지명이 아니다. 그러나 암포는 이문열의 고향인 경북 영양군(英陽郡) 석보면(石保面)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작품의 주인공인 현우가 등단한 지 얼마 안 된 작가라는 설정은 자연스럽게 그 무렵에 등단한 이문열을 떠올리게 하고, 암포에 대한 묘사 역시 작가가 여러 지면을 통해 설명한 고향의 모습과 통하기 때문이다.

이문열은 경북 영양군에 대대로 살아온 재령 이씨로서, 이 문중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갈암 이현일을 들 수 있다. 류철균에 따르면, 갈암은 기해예송 당시 노론인 우암 송시열과 대결한 영남 남인의 대표였고, 인현왕후의 폐비와 장희빈 소생의 세자 책봉을 둘러싼 기사환국 당시에는 남인 전체의 영수였다고 한다.(류철균, ‘이문열 문학의 정통성과 현실주의’, 이문열, 살림, 1993) 갈암 이외에도 조부 운악 이함, 아버지 석계 이시명, 형 존재 이휘일이 불천위(不遷位-덕망이 높고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인물을 영원히 사당에 모시도록 국가에서 허가한 신위)로 모셔지고 있다.(장윤수, ‘영덕 갈암 이현일 종가’, 예문서원, 2013) 작가의 산문 ‘이우는 세월의 바람소리를 들으며’(이문열 문학앨범, 웅진출판, 1994)에 따르면, 석계 이시명은 장흥효의 딸과 결혼하여 여섯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이문열이 고향으로 삼는 영양군 석보면은 갈암 현일의 동생인 항제 숭일이 자리 잡은 땅이다. 이문열은 항제 숭일의 후손이다.

이문열이 경북 영양군 석보면에 비교적 장기간 머문 기간은 크게 세 번이다. 첫 번째는 6.25가 발발하고 아버지가 월북하자 살 길을 찾아 1951년 귀향하여 1953년 안동으로 이사할 때까지 머물렀던 시기이고, 두 번째는 밀양중학교를 중퇴한 1961년 귀향하여 1964년 안동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의 시기다. 1948년생인 이문열에게 첫 번째 시기는 그다지 강렬한 인상을 준 것 같지는 않다. 고향과의 본격적인 친화는 두 번째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이문열은 “그때 처음으로 문중이란 것을 알았고, 자연과의 친화를 경험했으며, 노동과 생산을 이해하게 되었다.”(이우는 세월의 바람소리를 들으며)라고 고백한 바 있다. 고향에 머문 세 번째 시기는 스무살 때 내려와서 1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을 때이다. 이 때 이문열은 고향을 세심한 관찰의 눈길로 보게 되었으며, 이 무렵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소설의 소재 대부분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고향에서 배운 윤리와 삶의 감각은, “나의 뿌리는 고향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집단의식에 자리 잡고 있었고, 의식도 강한 전통 지향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 삶이 외견상 뿌리 없이 보이고 때로는 극단의 일탈을 보일 때도 나는 그것들을 언제나 한시적이고 예외적인 상황으로만 받아들여 왔다.”(이우는 세월의 바람소리를 들으며)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듯이 이문열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작품이야말로 이문열이 고향에 대해 가진 애정과 영향력을 증거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작가는 이 소설을 발표한 지 6년만에 개작본을 발행할 정도로 깊은 애정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은 이문열이 유년을 포함한 생의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곳이다. 이문열     문학의 상당 부분이 여기서 발원했다.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은 이문열이 유년을 포함한 생의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곳이다. 이문열 문학의 상당 부분이 여기서 발원했다.

이렇게 작가가 애정을 쏟는 고향은 ‘후기’의 “내게 있어서 고향의 개념은 바로 문중(門中)”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로 문중(門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문중과 非(비)문중’, 공간적으로는 ‘문중이 사는 언덕’과 ‘타성받이들이 사는 장터’라는 이분법이 여러 편의 단편을 가로지른다. 이 중에서 작가가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것은 전자이며, ‘다시는 가지 못하는 고향’이란 다름 아닌 문중과 문중의 풍습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1980년대에 창작된 소설에서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만큼 동항(同行), 족인(族人), 숙항(叔行), 질항(姪行), 질서(姪壻), 입향조(入鄕組), 문회(門會)와 같은 유교적 전통의 단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에필로그’에서 분명히 밝힌 것처럼 “진정으로 사랑했던 고향에로의 통로는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 이 세상의 지도로는 돌아갈 수 없다”. 문중은 사라져버린 것이기에, 작가가 바라보는 문중의 모습은 향수(nostalgia)의 프리즘을 통해 이상화되고 낭만화된다. 본래 향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향해 발생하는 감정으로서, 상실된 것에 대한 아이러니한 그리움이다. 이러한 그리움 속에서 사라진 과거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다름 아닌 이상화되고 낭만화 된 상념인 것이다. “아, 사라진 것들은 아름다웠느니….”야말로 문중으로 대표되는 고향을 대하는 작가의 기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의 첫 번째 작품인 ‘롤랑의 노래’에서 문중의 상징과도 같은 어림대(御臨臺)라는 바위를 일제로부터 지켜낸 교리 어른은 “우리들 옛 정신의 권화, 은성(殷盛)했던 시절의 흰 수염 드리운 수호부(守護符)”로 미화된다. ‘正山 先生(정산 선생)’의 정산은 공맹 사상과 조선에 대한 충성의 마음으로 현대를 살다 간 기인이다. 그러나 현우는 정산 선생이 고향의 한 기인(奇人)이 아니라 진정한 스승이었음을 희미하게나마 깨달으며, 마지막에는 “아아 스승이여, 내 스승이여”라는 찬양의 말까지 남긴다. ‘종손’에서는 비록 고향을 떠났지만, “크고 환하다고 밖에 형용할 길이 없는 어떤 인간정신의 아름다움”을 지닌 종손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문열은 흔히 말하듯이 양반지향적 상고주의에 맹목적으로 붙들려 있는 작가는 아니다. 작가 역시도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에서 소위 문중으로 대표되는 양반사회의 문제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奇想曲(기상곡)’과 ‘상처’에서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長者(장자)의 꿈’에서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奇想曲’은 과거 문중의 영광을 뒷받침하기 위해 희생당한 천민이 유령이 되어 나누는 한스러운 노래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이들은 사라진 문중의 어른들이 화려한 의미로 빛나는 것과 달리 아무런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실제로는 죽었으나 상징적으로는 죽지 못한 유령이 되어 떠돈다. ‘상처’는 핏줄에 바탕한 양반의식이 낳은 비극을 보여준다. 문중은 “설령 불천위(不遷位)를 열 개나 모시고 있는 집안의 후예라도 일단 떠돌아 들어온 타성은 천민이나 다름없이 여길” 정도로 타성(他姓)에 대해 배타적이다. 따라서 문중의 딸들과 타성의 아들들 사이에서 염문이 돌면, 문중에서는 결코 그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 결과는 딸의 죽음으로 마감되기도 하였다. ‘상처’는 바로 그 “옛 고향의 치유될 수 없는 상처중의 하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長者의 꿈’의 윤호는 잃어버린 ‘옛 고향을 되찾겠다는 신념’으로 치밀한 준비 끝에 귀향하여 온갖 노력을 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데,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기계가 값싼 노예노동을 대신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윤호의 그 치열했던 노력은 “우리 문화의 정화(精華)”인 양반문화는 ‘노예노동’의 뒷받침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양군 광산문학연구소를 찾아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소설가 이문열.
영양군 광산문학연구소를 찾아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소설가 이문열.

이문열은 1986년의 개정판에서 ‘암포 신문인협회’를 비롯해 모두 여섯 편의 작품을 새롭게 수록하였다. 새롭게 덧보태진 여섯 편의 작품을 통하여 ‘과거의 고향’과 ‘현재의 고향’이 라는 이분법은 더욱 강렬해진다. ‘암포 신문인협회’와 ‘분호난장기(糞胡亂場記)’는 문중의 가치가 사라진 현재의 고향이 얼마나 비루하고 타락한 것인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문중으로 대표되는 가치와 풍습이 사라진 정도에 비례하여 과거의 것은 더욱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에서 평생 갓을 만들다 쓸쓸하게 죽은 도평노인은 시대착오적 무능력자나 기인이 아니라 고고한 지사의 모습마저 풍기게 되는 것이다.

핵가족을 넘어 1인 가족이 보편적인 삶의 형태가 되어 가는 오늘날 이문열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에 나타난 문중에 대한 지향은 긍정보다는 부정의 대상으로 여기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은 문중보다도 더 큰 공동체에 대한 지향이 뒷받침되었을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의 삶이 ‘과객’에 나오는 것처럼, 부모 자식으로만 이루어진 “지극히 사적(私的)이고 폐쇄적인 삶의 방식”에 머무는 것이라면, 문중에 대한 그 열렬한 그리움을 부정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중에 대한 그 열렬한 지향. 그것은 그 안에 담긴 부정적인 속성까지 포함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 ‘사라진 고향’임에 분명하다.  /문학평론가 이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