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칼의 노래’는 전쟁에서의 승리의 기록이 아니라 삶으로부터 배신당한 자의 패배의 기록이다.

제목을 보았을 때는 ‘이순신’의 화려한 영웅담이 펼쳐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박진감 넘치는 전쟁 장면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기대에 미치는 내용은 아무 것도 없었다. 뚜렷한 줄거리도 없었고, 뚜렷한 사건도 없었다.

다만, “오늘도 적은 오지 않았다.”라는 말이 주문처럼 되풀이 되었고, 적은 좀체 오지 않았다. ‘나’의 지리멸렬한 기다림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이 책 속으로 마법처럼 빠져들었다. 소설 속에 두텁게 베인 허무와 비관이 어떤 식으로 끝을 맺을지 궁금했다. ‘나’가 분명 죽을 것임을 알았음에도 그 끝이 궁금했다.

“포탄과 화살이 우박으로 나르는 싸움의 뒷전에서 조선 수군은 머리를 잘랐고 일본 수군은 적의 코를 베었다. 잘려진 머리와 코는 소금에 절여져 상부에 바쳐졌다. 그것이 전과의 증거물이었다. 잘라낸 머리와 코에서 적과 아군을 식별할 수는 없었다. 머리를 얻기 위해 코를 얻기 위해 아군과 적군은 싸운다. 피난민들은 다만 얼굴 가운데 코가 있기 때문에 죽었다.”

‘나’가 인식하고 있는 전쟁, ‘나’가 생각하는 전투는 ‘부지런히 잡초를 뽑는 농사일’ 과 같다. 전쟁은 잔악하며 참담하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싸울 뿐이며, 서로를 죽일 뿐이다. ‘나’에게 전쟁은 끼니와도 같다.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삶은 다만 허무할 뿐이다. 비 오는 날 면사첩의 면사(免死) 두 글자를 바라보는 ‘나’의 심정은 어땠을까?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죽이지 않겠다는 것’임을 생각하며, 비 오는 밤을 뒤척이는 ‘나’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를 죽이고 임금에게 갈 적은 동시에 나를 살려주고 있기도 하다. 이 모순, ‘나’가 뒤로 물러나도 앞으로 나아가도 죽음은 똬리를 틀고 기다리고 있다. 결국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죽음을 인정하고 그 죽음을 준비할 수밖에 없는가?

“마침내 적의 전체로 맞아야 하는 날은 정확하고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수영으로 돌아온 날 밤에 나는 모처럼 깊이 잠들었다. 섬 앞 바다가 막힌데 없어서 죽기에 편한 자리였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는 ‘죽음을 향하여 있음’을 이야기한다. 현존재가 죽음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이 죽음의 알 수 없음, 죽음의 서로 다름은 “고유한 존재 가능성”임을 역설한다.

소설 속의 ‘나’는 ‘죽음과 관계 맺은 고유한 존재의 가능성’보다는 죽음에 더 역점을 두고 있다. 끊임없이 적의 전체를 기다리며 죽을 장소를 찾고 있다. 장인처럼 죽음을 다듬으며, 그 죽음을 탐닉한다.

소설을 읽으며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저 죽음을 떨쳐버리고 조금 더 치열해지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소설 속엔 끝끝내 죽음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죽음을 인정하고 수긍하는 나약한 ‘나’ 외에 더 무엇은 없었다.

김훈의 거개의 소설들은 삶의 끝자락으로 몰린 자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은 왕명 속에 깃든 것들이 헛것임을 알면서도 그 헛것을 놓지 않는다. 삶은 수많은 헛것으로 이뤄졌더라도 그 헛것을 놓지 않는 일이라고, 그 헛것이 끝끝내 헛것으로 스러져 버리더라도 그 헛것을 끝끝내 지켜내는 그 부질없음이 삶이라는 것을 말하였다. 김훈은 그 지독한 허무를, 그토록 담담하게 그려냈던 것이다.

김훈의 소설에 등장하는 허무한 이순신이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삶과 죽음은 타원형과 같다. 그 타원형은 양극을 가지고 있으며, 그 극과 극의 양상은 다르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하지만, 그 극에서 조금이라도 비껴서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삶의 극에 서 있는 자는 죽음으로, 죽음의 극에 서 있는 자는 삶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나는 지금 삶의 극을 약간 비껴나 있는 것 같다.

몇 해 살지 않은 삶,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왔는지 알 수 없다. 어느 날, 그 잘못들이 내 머리 속을 헤매는 것이다. 며칠 째 고열로 혼자 앓다가 애써 밥을 먹을 때, 벌겋게 부은 편도를 스치는 밥 알갱이들의 질감과도 같이, 삶 킬 수도 없고, 눈물이라도 나면 좋을 테지만,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칼의 노래’의 ‘나’가 삶을 당당히 헤쳐 나가길 원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