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 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프랑스어로 톨레랑스는 타인의 사상이나 행동에 대한 ‘관용’을 뜻한다. 여기에서 관용은 단순히 개인의 아량(덕)뿐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과 관련되며 종교, 정치, 국가라는 연관에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 관용은 사회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며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하나의 ‘예(禮)’인 것이다. 여기서 도대체 예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논어’에 기록된 인상 깊은 대목은 학이(學而)편의 공자가 제자인 자공과 나눈 대화이다. 자공의 생각은 대개 사람들이 가난하고 심지가 굳지 못하면 부자나 권력 앞에서 아부하고, 부자이거나 권력을 쥔 사람은 교만해지기 쉬운데, 아부하지 않고 교만을 부리지 않는다면 강직하고 겸손한 가치관을 가져 예를 갖춘 인격체이다. 라고 생각하며 물었는데, 공자의 답은 한발 더 나아가 강직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좋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살고, 부유하면서도 겸손한 데서 멈추지 않고 예를 좋아해야 한다고 답했다. 공자의 안빈낙도(安貧樂道)와 호례(好禮)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가난 속에 도를 즐길 줄 안다는 것은 이미 부자와 차이를 알고, 그 차이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여기에는 상대와 나의 차별심이 사라지게 되므로 자연히 안빈낙도할 수 있다. 부자나 권력자 역시 자신의 부나 권력에 대해서 크게 의식하지 않으면 상대와 나 사이의 차이가 사라진다. 따라서 상대의 가난은 물질적 가난일 뿐이고, 상대와 나는 인격적인 대면만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가난한 자에게는 낙도(樂道)를 요구하였고, 부자나 권력자에게는 예를 요구하였으니 부자나 권력자가 예를 통해 상대와 자기의 동등함을 인정하는 태도라고 보겠다. 따라서 부자나 권력자가 먼저 시작해야 한다. 군주와 신하 관계에는 신분적인 차이가 있지만 군주는 신분적 차이만 인정할 뿐 신하를 인간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이 먼저이며, 장유(長幼) 사이도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상대에 대해 예를 갖추지 않는 것은 상대의 진면모나 진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심리적 태도에서 출발한다. 형식적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형식 이전에 실질적인 이유로 존재하는 것이다. 예에는 본디 톨레랑스적인 사고가 전제돼 있다. 톨레랑스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에서 출발해 다른 상대를 포용한다는 뜻이니 우리는 서구를 근대 이전에 양이(洋夷·서양오랑캐)라고 불렀지만 그들 내부에는 이미 예에 버금가는 톨레랑스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우리의 정치집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중에는 상호 예의만 지켜졌다면 충돌을 피해 갔을 법한 일들이 많다. 생각이 서로 같지 않다고 반대 방향으로만 치닫는 정치사회적 구조와 진영 논리의 갈등 속에 상대를 향해 쏟아지는 막말이 그렇다. 여야 할 것 없이 모두가 집단이나 개인의 이익만 존재하고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는 풍조에서 나온 발상들이다. 아무리 정치가 말로 하는 전쟁이라 하지만 국민들의 수준을 우습게 여기지 않고서야 이런 언어폭력들이 마구 쏟아질 수 있겠는가. 세월호 같은 슬픈 역사를 정치에 이용해 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이들도 큰 문제다. 사회적 갈등을 치유해야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갈등을 조장하고 정치의 품격을 추락시켜 국민들의 정치혐오증을 끝없이 증폭시키는 요인을 만들고 있다. 지구촌에서 소통으로 존재하고 있는 무수한 언어 중에서 한국어가 가장 우수하다는 증거는 저속어와 욕설 그리고 막말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겠다. 언론 또한 이러한 막말을 기사의 무슨 호재처럼 앞 다퉈 보도하니 갈등유발의 한몫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의 언론은 이제 단순히 보도뿐만 아니라 계몽과 교육적 기능도 함께 해야 한다. 한 국가로서 생존과 번영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상대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이며 국가에 대한 바람보다 내가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