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종지도(三從之道)와 페미니즘
삼종지도(三從之道)와 페미니즘
  • 등록일 2018.08.23 20:24
  • 게재일 2018.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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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희룡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의례(儀禮)는 유교경전 13경 중 하나이다. 이 의례 상복전(喪服傳)에 삼종지도가 기록되어 있다. 삼종지례라고도 하는 이 단어는 ‘좇아야 할 세 가지의 도리’로서 동양의 봉건사회에서 여성이 마땅히 복종해야 할 윤리를 말한다. 이 사회적 윤리는 집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시집을 가면 지아비를 따르며,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의 뜻을 좇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역 64괘의 해설에 의하면, 건은 남자를 상징하며 건강을 덕으로 하여 여자를 지배하고, 곤은 여자를 상징하며 유순을 덕으로 하여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이것으로 남녀의 지위를 정립하였다. 이러한 교육관은 봉건사회에서 여성을 남성에 종속된 존재로 보고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는 굴레로 작용하였다. 또한 대대례(大戴禮)의 본명편에 ‘부인에게는 7가지 내쫓을 사항이 있으니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경우, 아들이 없는 경우, 음탕, 질투, 나쁜 병, 말이 많은 경우, 도둑질 등 이 칠거(七去)의 경우는 내쫓지만 예외조항은 의지할 곳이 없는 경우, 함께 부모 3년 상을 치른 경우, 가난하다가 후에 부자가 된 경우는 삼불출(三不出)이라 하여 내쫓지 못하니 이를 칠거삼불출이라고 했다.

동양의 율령에서 남편의 일방적 의사표시로써 아내와 이혼하는 일을 기처(棄妻)라 하여, 이 기처의 이유가 칠거였던 것이다. 조선에도 이 규정이 계수되었으니 본조에 해당하는 죄를 소박정처죄(疏薄正妻罪)로 하여 비첩이나 기첩과 애욕에 빠진 자를 처벌한 사례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후기까지 이어졌으며 조선의 여성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성본위의 사회규율 속에 삼종지도로 방향이 설정된 삶을 살아야했음은 물론이다. 여성의 정조에 대한 황당한 조선성리학의 집단사고는 병자호란(1636) 직후 청나라로 끌려갔다 몸값을 치르고 돌아와도 조선에서 살 수 없던 환향녀(還鄕女)들에게 영향이 미쳤다. 대부분 정조를 잃은 이들이 이혼과 박해를 당하자 조정은 ‘한양으로 들어오는 입구 개울에서 몸을 씻으면 부정이 사라진다.’는 희한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환향녀들은 홍제원(지금의 홍제동)의 개울에서 몸을 씻고 또 씻었지만 지울 수 없었고 서방질하는 여자 ‘화냥년’으로 통했다. 당시 사대부들은 성리학의 가치를 지킨다는 명분에 사로잡혀 전쟁을 자초했고 입만 살았지 실제 국력은 미약하여 전쟁에서 항복하자 여인들은 불가항력적인 강간의 위치에 처해졌다. 당쟁으로 사분오열된 조선은 결국 삼전도의 항복으로 이어졌고 이 굴욕적인 패전은 사대부들의 비굴한 민낯이고, 화냥년은 조선이 극단적으로 찢어질 때 발생한 파열음인 것이다. 이 외에도 여성의 고통은 임진왜란에서도 있었고, 일제강점기 때도 위안부로 고통받았다.

오늘날 가부장제 폐지와 성 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각 때문에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에 저항하는 여성해방 이데올로기인 페미니즘의 활동이 활발하다. 이러한 사회운동을 발판으로 터진 사건이 미투운동이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미투 폭로에 대한 법원의 1심 판결을 주목해온 여성단체들은 남성 편향적인 한국사회의 틀을 바꿀 변곡점이 될 제도권의 첫 응답이었기에 그 결과를 기대하고 참여했다. 그러나 법원은 입법에 책임을 넘기는 듯한 모호한 해석으로 안희정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미투의 분노와는 달리 우리사회는 여전히 여성들에게는 동토(凍土)임을 확인해 줬다. 법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이 법이 엄정하지 못하고 권력에 빌붙어있으면 국가의 존재가치가 없다. 지금의 정치상황은 380년 전 조선의 사대부 정쟁과 비슷하다. 결국 속물들은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못하고, 타인의 불행에서 자신의 행복을 구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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