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나의 고향은 학교에서 16㎞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방학 때는 골짝의 고향 집에 가서 한 달 이상 지냈다. 버스도 다니지 않아서 걸어 다녔다. 밤에는 호롱불 밑에서 라디오도 없이 지샜다. 겨울에는 문풍지가 추위에 떨던 긴긴 밤을, 여름 낮에는 매미소리에, 밤엔 모기떼에 시달리면서 친구 없이 혼자 어두운 방에 있으면 학교의 친구들이 매우 그리웠다. 산골의 집 몇 채만 있는 곳에서는 꿈에도 친구들이 종종 보였다.
그 후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생 시절에도 부모보다는 친구들이 주로 대화의 상대였다. 이때의 친구들은 앞에서 나를 이끌어 주거나 뒤에서 밀어주지 않고 옆에서 같이 헤쳐 나가는 동반자, 한 몸같이 되는 것이었다.
그 후 성인이 되어서 결혼을 하고 난 후에는 부부가 동행자로 되었다. 친구 간에는 말 못할 내용도 있었지만 부부간에는 모든 것을 서로가 알게 됐다. 드물게는 나의 생각과 맞아떨어졌지만 대부분은 부부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드러났다. 이런 과정에서 생각을 맞추다보니 벌써 노인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인간은 계속 성장해 간다. 키 크는 것은 멈추지만 정신적인 성장은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것 같다. 복잡한 사회생활은 나를 지치게 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 기회가 됐다. 이럴 때는 친구와 앉아서 대화를 하면 서로에게 위로가 됐다. 친구에게서 격려를 받거나 방향 설정에 자문을 받으면서 나이는 점차 늘어나게 됐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늘어나는 정보량을 잘 소화시켜 나갔다.
과거에 사농공상 등 직업의 다양성이 적을 때에는 친구나 다른 상대자와는 이해하기 쉬웠고 또 친구들의 도움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근래에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지식이 세분돼 넘쳐나고 살아가는 방법에도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적당하고 확실한 위로나 격려, 추진할 방향 등을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단순한 위로 정도만 가능하다. 거대한 세계가 지구촌이 된 오늘날은 인생을 동행할 정도의 친구는 만들어지기가 어려운 것 같다.
우리 인생이란 매일 누군가와 함께 자연 속을 동행하여 걸어가는 길로 비유할 수 있다. 그들은 가면서 사랑과 기쁨을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갈등으로 다투기도 한다. 때로는 홀로 거닐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그러나 혼자의 길은 외로워서 누군가와 같이 가기를 원한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제일 긴 시간을 동행하는 자는 어떻든 부부사이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은 늙어지고 육체의 힘이 줄어든다. 점차 접하는 사람 수도 적어지고 동행자 대신 지팡이에 의지하여 인생을 헤쳐 나가야 한다. 이제는 나의 모든 것을 맡길 곳은 하나님 밖에 없다. 그가 동행자가 된다. 장수할수록 종교의 역할은 커지게 된다.
살면서는 계속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세상은 연속적으로 우리를 속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행복에 대한 바람을 접지 않는다. 마음은 미래의 희망을 갈구한다. 그래서 현재는 우울하고 서러운 날이 계속되지만 이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리움의 대상으로 변화됨으로 푸쉬킨은 `슬퍼하지 말라`고 우리를 위로했다.
행복함에 대해 매일 속임을 당하는 현실에서도 동행자는 위로를 주고 슬플 때는 등을 토닥여 준다. 어느 교수는 사별이 아닌데도 동행자가 없는 인생을 `미완의 삶`이라고 했다. 비록 그가 세속적으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완성하지 못한 인생이라고 했다.
동행자와는 서로 공감 일치를 위해 애를 쓴다고 해도 대부분의 세상사는 이뤄내기가 어렵다. 오히려 성취하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다. 이뤄내지 못해도 좋다. 노력한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삶은 노력하는 과정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