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종흠 시사칼럼니스트

국회가 헌정사상 처음으로 해를 넘겨 새해 예산안을 처리하는 위법행위를 하면서도 국민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커녕 예결위 계수조정소위 소속 의원 9명이 당일로 외유를 떠나 국민들에게 깊은 배신감을 줬다. 국민들은 불과 며칠전 대통령선거 기간 여야가 내놓은 갖가지 정치쇄신 공약과 정책에 대해 투표로 엄중한 선택을 했다. 정치권은 국민이 선택한 명령을 따를 것이라 믿었지만 믿는 도끼에 발이 찍힌 것이다.

국민이 배신감을 느낀 것은 세가지 이유다. 국민이 선택한 정책을 정치가 제대로 수용을 못한 것과 국민에게 약속한 정치쇄신을 지키지 않는 것,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국민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고 있는지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제주강정 해군기지 건설은 이미 국민이 새누리당 박근혜 당선인의 정책으로 다수가 지지했고, 제주도민과 강정마을이 소재한 서귀포 주민들도 이에 손을 들어 주었다. 이번 예산안 지연 처리가 강정 해군기지 단골반대에 나섰던 이념적 시민단체 등의 눈치를 본 민주당의 몇몇 의원들 때문이었다는 것은 아직도 국민의 선택과 심판을 무시한 일부 정치세력의 위법적 오만과 횡포가 통하는 국회로 건재함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왜 투표를 하는지, 왜 민주주의를 하는지 이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시민단체의 눈치나 살피는 국회의원은 의원직을 그만두고 아예 시민운동에 나서는 것이 올바른 처신이다. 이들 잘못된 소수의 횡포에 끌려다니는 여야 국회의원들도 국민의 소명을 절실하게 받아들이지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신을 의심받게 하는 것이다.

정치쇄신 공약은 대선 당시 후보들이 약속했던 입에 침도 채 마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정치쇄신은 지난 대선의 최대 쟁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새정치`의 아이콘처럼 떠오른 안철수 현상은 바로 총체적으로 불신받는 정치권의 행태를 바로 잡을 가능성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환호였던 것이 바로 이를 입증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안철수 현상은 국민의 눈에 비친 정치적 신기루였지만 다급해진 기성 정치권의 후보들은 의원 불체포특권포기, 의원정수 감축, 의원연금 폐지, 세비 30%삭감, 영리업무의 겸직금지,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폐지 등을 앞다퉈 공약했다. 새누리당에선 선거기간중에 여야가 합치되는 공약은 바로 국회에서 처리하자고 서둘렀다. 그러나 이번 예산안처리가 그걸 허사로 만든 것이다.

특히 “세비를 깎겠다”, “의원 연금을 폐지하겠다”는 등의 약속은 국회의원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발상 이전에 불경기속에 고통받는 서민들과 아픔을 함께 한다는 정서를 내포한 것이었다. 이번에 보니 국회의원들은 역시 서민의 아픔을 모르는 국회의원에 불과했던 것이다. 세비를 깎아 국민의 고통에 동참했다는 다른 나라 국회의원들의 이야기는 지나가는 바람소리였다. 이들이 실직자, 영세상인, 영세기업인, 비정규직근로자 등의 손을 잡고 한 표를 호소할 때 고통에 동참하겠다며 지은 표정은 표를 위한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불과했다.

이제 눈앞의 허위와 거짓 앞에 국민이 선택할 길은 무엇인가. 신기루 안철수도 사라진 마당에 당장 대안은 없을 것같다. 내년이면 닥칠 지방선거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인가. 물론 금년중에도 재보궐선거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이 알아야 할 것은 고통받는 국민의 입장에선 반드시 선거를 통해서만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MB정부도 집권초기에 촛불시위의 저항을 받지 않았던가. 정치쇄신 방기가 빚은 국민의 분노는 여야 모두에 책임이 있다. 그러나 다수당으로 집권한 새누리당은 정국을 주도할 책임이 있고 박근혜 당선인은 집권세력을 선도할 책무가 있다. 정치쇄신 늑장이 국민의 저항을 부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박근혜 당선인은 대선 초심으로 돌아가 국민의 신뢰에 금이 가지 않도록 정치권의 약속을 뼈에 새겨서 챙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