父子의병의 기개는 학도병으로 이어져

▲ 포항시 북구 용흥동 탑산에는 한국전쟁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최후 방어선에서 육군 제3사단 소속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 장렬히 산화한 어린 전사들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그들의 넋을 기리는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이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한반도의 20세기는 1905년 을사늑약, 1910년의 경술국치로 이어지는 식민의 굴욕으로 부터 그 질곡의 시대가 예고됐다. 해방과 내전, 분단으로 이어진 역사의 골짜기에서 변방 민초들의 삶은 더욱 팍팍했다.

하지만 백성을 돌볼만한 여력이 없는 나라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의병의 기개가 이땅 곳곳에서 터져 나왔기에 오늘 우리는 감히 민족혼을 이야기할 수 있다.

또 남북이 갈라진 내전의 땅에 학도병들이 흘린 눈물과 피는 저 대로를 활보하는 청년들의 웃음 속에서 아름답게 부활하고 있다.

글 싣는 순서
<3부=고난에 단련된 국토의 등뼈>
16)변방, 국토수호의 현장- 항쟁1
17)포화에 휩싸인 근현대사- 항쟁2
18)위리안치를 이겨낸 유배문학
19)새 세상을 하늘에 빌다- 정신문화
20)험한 노동을 감내한 민초들

□ 포항 기개의 상징, 산남의진

경상도의 대표적 의병전쟁인 영양 일월산 전투에는 포항 출신 의사들이 참여해 큰 역할을 했다. 그 대표적 인물인 흥해 곡강 출신 최세윤은 뒷날 산남의진(山南義陳)의 3대 대장으로서 포항은 물론 한국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다.

산남은 문경새재 이남의 영남을, 의진은 의병의 군대를 일컫는데 아들의 의로운 죽음을 아버지가 이어받고(정환직 부자), 장남과 지아비의 연이은 죽음에 어미마저 동행한 충절(최세윤 가족)이 펼쳐졌다. 거의(擧義)의 시작은 삼남(경상, 전라, 충청) 도찰사 등을 역임한 시찰사 정환직(1844~1907)이 고종 황제로부터 `경이 화천지수(華泉之水)를 아는가?`라고 적힌 밀지를 받게 되면서 부터다. 제나라 환공을 적의 추격에서 탈출시킨 봉추부의 고사를 통해 고종은 나라를 되찾는데 힘써달라고 당부한 것이다. 이에 1905년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정환직은 장남 정용기(1862~1907)에게 뜻을 전하고 고향에 내려가 가문을 보존하라고 했다. 하지만 의로운 아들이 순순히 따랐을 리는 없었다.

광무 10년(1906) 2월 정용기는 62세인 아버지를 대신해 3천여명의 의병을 규합해 대장으로 추대됐으며 군호는 산남의진으로 정했다. 의병들은 영천, 신령, 청송, 진보, 흥해, 청하 등 곳곳에서 일병기지를 습격해 크고 작은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1907년 9월1일 북구 죽장면 입암리 주막에서 식사하는 일병들을 급습했다가 주변에 매복해 있던 영천수비대에 포위돼 정용기 등 의병 40여명이 전사했다. `산남의진 입암지변`으로 명명된 이날의 비극은 민가 수십채를 방화하고 수십명의 양민들을 학살한 침탈로 이어져 의병전쟁사에서 최초의 민간인 참화로 기록되고 있다. 64세의 노구를 이끌고 2대 대장이 된 정환직은 크고 작은 전과를 거뒀으나 1907년 12월 청하면에서 체포돼 영천 교외에서 총살당했다. 1908년 3월 3대 대장이 된 최세윤은 포항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하지만 매 전투마다 의병수의 30% 이상이 전사하는 참상 끝에 그해 7월 경주시 양북면에서 체포된 최세윤은 10년형을 언도받은 뒤 1916년 8월 11일간의 단식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인 윤영덕은 천리길을 걸어 시신을 모셔와 반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의 뒤를 따랐으며 아들 산두는 일병의 모진 고문 끝에 부모를 따랐다.

 

▲ 영덕 장사해수욕장 상륙작전을 위해 장사 해변에 도착한 문산호가 태풍에 좌초된 모습.

□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경북의 후기 항일의병전쟁은 대개 1906년 봄부터이다. `태백산의 호랑이`로 불리며 일병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신돌석은 1906년 3월 영덕군 축산면 도곡2리에서 영해진을 기병했다가 영해와 강릉을 의미하는 영릉의병으로 개칭했다. 신돌석은 영덕, 영해, 울진, 영양, 진보, 청송과 강원도 삼척, 강릉, 원주까지 진출해 일병을 공격했다. 그 명성이 전국에 떨쳐 1907년 음력 11월 경기도 양주에 모인 전국의 의병장들은 `13도 의병 창의대진소`를 결성하며 그를 교남창의대장으로 선출했다. 신돌석 의병의 공적은 독자적인 전투에 더불어 산남의진 등 인근의 의병진과 연합작전을 전개함으로써 더욱 전과를 올린 것으로 평가된다.

신돌석은 1908년 후반기 들어 일병의 토벌이 강화되고 겨울이 되자 부대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 혹한을 피하도록 했다. 몇몇 측근들과 잠행을 계속하던 장군은 1908년 12월12일 지품면 눌곡리 두집매(집 두채가 있다는 뜻)에서 예전의 부하이던 김상호, 상열, 상태 삼형제에 의해 31세의 나이에 피살됐다. 영덕군지에는 일병의 피살 보고서에 이들 이름 대신 기록된 김도룡, 김도윤이 본명일 것으로 추정해 기록돼 있다. 장군의 묘는 1971년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 인천상륙작전의 열쇠, 장사

맥아더 장군은 6·25전쟁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군사전문가들 조차 성공 확률을 `5천분의 1`로 점치며 만류했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다. 그리고 `성동격서`의 양동작전용으로 영덕 장사 해안 상륙을 선택했다.

1950년 8월24일 대구, 밀양에서 대부분 중·고교생인 772명의 대원으로 창설된 독립 제1유격대대, 명부대는 15일여간의 기초훈련만 받은 채 9월13일 LST 문산호로 부산항을 출발했다.

다음날 새벽 4시 30분 장사해안에 도착한 문산호는 태풍 케지아로 인해 좌초됐지만 오후 2시 50분 상륙에 성공, 적군의 주 보급로인 포항~영천 방면 국도를 완전 차단하고 17일까지 적군 2군단 정예부대 2개연대의 북상 공격을 격퇴했다. 이어 19일 오후 3시30분 해상철수용 LST 조치원호로 철수를 완료했지만 미처 승선하지 못한 유격대원 40여명은 끝까지 저항하다 전원 전사했다.

장사상륙작전에서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했으며 유격동지회원 38명이 생존해 있다. 좌초된 문산호의 선체 대부분은 주민 등이 고철로 팔아 넘겼으며 해저에는 아랫부분만 잔해가 있는 것으로 파악돼 있다. 장사상륙작전은 포항·안강지역 전투의 적 김무정 군단 예하 제5사단에서 정예부대 2개 연대와 4대의 전차를 장사로 분산하게 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총 반격의 계기가 됐다. 또 적의 전투력 약화는 국군 제3사단이 형산강을 도하하여 북진하는데 크게 일조했다는 군사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잊혀진 전투`였던 장사상륙작전은 이제 역사속에서 부활했으며 정부는 학도병들의 넋을 기리고 교육의 장으로 삼기 위해 장사상륙작전기념공원 건립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 전략의 요충, 형산강 공방전

▲ 경주시 안강읍 강동면의 7번국도 변에 건립돼 있다가 현재는 철거된 안강전투승전기념관.
사단법인 포항지역사회연구소가 포항과 경주 일대를 무대로 지난 2002년 발행한 역사인문지리서인 `형산강`에는 경주시 안강읍 강동면 인동리 동쪽산에 건립돼 있다가 수년전 철거된 안강전투 승전비의 비문이 인용돼 있다. 8월9일 침공해온 적 제7사단은 (포항)기계에 침입한 뒤 17일까지 필사적으로 공세를 되풀이했으나 우리 수도사단과 제17연대의 피어린 역습으로 이를 좌절시켰다. 22일부터 병력을 증강해 다시 내습한 적에 15일간 결사적인 지연전을 감행했다. 달포에 걸친 이 지구의 전투에서 적 294명을 사로잡고 전차 2대 격파, 사살 2천328명의 전과를 거뒀다.

포항 형산강 일대 전투는 1950년 8월11일 학도의용군 전투, 형산강 방어전 등 포항지구 전투, 포항 비학산전투, 기계 탈환전으로 구분되는 기계·안강 전투로 요약된다.

포항은 항구시설을 갖춘 교통 요지로 이를 점령하면 영천, 대구, 경주 방면 진출이 가능해 포항지구는 피아에 그만큼 중요했다. 이 가운데 8월11일 제3사단의 후방지휘소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벌어진 학도병들의 혈투는 영화 `포화 속으로`와 서울 동성중 3년생 이우근의 피 묻은 편지 등을 통해 부활하고 있다.

의성지구에서 9일 저녁 도착해 있던 학도의용군 71명은 이날 새벽 4시께 인민군의 기습을 받았다. 이들은 영일비행장에 주둔 중이던 미 해병대에서 구해온 M1소총 68정, 수류탄 3발, 탄환 2만발로 무장해 북의 정규군과 혈투를 벌인 끝에 김춘식 등 57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미해병 비행대와 북한군이 접전한 포항 중심부는 폐허로 변했으며 결국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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