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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슬픔

관리자 기자
등록일 2012-01-10 23:30 게재일 2012-01-1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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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신객원 논설위원국제로타리 공공이미지 코디네이터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옛 어른들은 자식을 앞세운 슬픔을 참척(慘慽)이라고 했다. 참척의 고통을 겪은 부모의 가슴은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먼지가 앉지 않는다.

어제일 같았던 일본의 사회 현상이 우리 학교 곳곳에 몰려들어 요즘 우리사회의 최대 고통이 됐다. 왕따로 몰려 자식을 품에 묻은 대구와 광주에 사는 부모의 마음은 참척이다. 그래서 먼 훗날 한쪽 부모가 먼저 세상을 뜨면 꼭 앞세운 자식 이름을 부르며 데리고 가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물론 죽지 않을 만큼 맞고 들어온 어린자식을 보는 것도 큰 고통이다.

저녁 상가(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려져 있는 신발들/ 구두들이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망자의 신발뿐이다. 유홍준 시 `상가에 모인 구두들`이다. 서로 다른 구두의 표정에서 인생살이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산자의 구두는 뒤엉키지만 망자의 구두는 그날부터 평온하다.

벽하나를 사이에 둔 아파트에서의 죽음도 참혹하다.

“옆집 남자가 죽었다/ 벽하나 사이에 두고 그는 죽어있고/ 나는 살아있다/ 그는 죽어서 1305호 관 속에 누워 있고/ 나는 살아서 1306호 관 속에 누워 있다” 김혜순은 인심이 끊어져 버린 아파트를 통째로 관으로 비유했을 만큼 도시는 처절하리만큼 메마르다. 그 지경이 되면 사람 사는 세상이라기보다는 관이나 마찬가지다.

천안함에 탄 46명의 해군병사들이 북의 어뢰공격으로 생목숨을 잃은 참사도, 연평도를 지키던 해병과 민간인 4명이 북에서 날린 포탄에 또 목숨을 잃은 일도 참척의 아픔이다.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 목숨을 끊는 일도 너무 잦다. 대한민국에는 가치 있게 살만한 사람들이 더 목숨을 끊는다. 소득상위 10%에 속하는 사람들의 자살시도가 지난 3년간 10%씩이나 늘어난다는 것. 이것은 급증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살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국가다. 그래서 잘사는 국가들의 모임인 OECD에도 들어갔는데 대체 무엇에 쫓기기에 자살률 1위 국가, 살기가 힘든 국가로 내몰리고 있는 가.

한국인은 1년 새 1만5천400여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루 42명, 이 가운데 노인이 1/3을 차지한다. 고독한 노인사가 많긴 하지만 10대와 20대도 만만치 않다. 한해 교통사고로 숨지는 인원은 5천800명이다.

일본은 한해 3만5천명에서 지금은 많이 줄었다. 5년여 만에 3만1천명까지 내려가기까지는 일본 정부가 1천800억이 넘는 예산을 쓰는 예방책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인구를 따져보면 우리가 훨씬 심하다. 일본은 외부노출을 꺼리는 심리를 최대한 살려 방문 상담을 하고 정신과 치료를 알선해 주는 등 다양한 관리가 성공한 셈이다.

우리도 일본을 뒤따라 고독사 시대까지 맞고 있다. 일본에서는 한 해 3만2천여명이 홀로 죽음을 맞이하고 직장으로 세상을 이별한다. 직장이 우리에게도 곧 낯설지만은 않다. 여기에다 청·장년 실업 및 1인가구의 급속한 증가에 맞물려 비노인층의 고독사 징후마저 두드러져 새로운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카뮈소설 이방인의 주인공은 어머니 주검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가 사회 부적응자로 몰린다. 프랑스도 우리처럼 장례의식이 존엄해서 갈수록 가볍게 보내는 장례의식을 보고 언론마다 `노인들이 품위 없이 생의 종말을 맞는 것은 비극`이라는 사설을 종종 내보낸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삶이지만 허망하게 가는 빈손인가. 홀가분하게 가는 빈손인가는 분명 차이가 있는 게 현세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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