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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진흥원에 보관 중인 ‘금강유람가’

김윤숙 시민기자
등록일 2025-03-30 19:56 게재일 2025-03-31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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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록

일제시대 금강산을 여행하고 ‘금강유람가’를 쓴 장일상 선생의 손자 장세민씨(칠곡군 거주)를 만나 ‘금강유람가’의 전승 내력과 내용을 들어 보았다. ‘금강유람가’는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한문의 진본이 보관 중이다.

‘금강유람가’는 담재 장일상 선생(1897-1963)이 1930년 30대 나이로 금강산을 둘러보고 적은 기행문이다.

본래는 한문으로 글을 썼으나 부모님이 볼 수 있게 한글로도 작성했다고 한다. 그는 “진서 한불 꾸려놓고 언문으로 가사지어 부모님께 드린다”고 별도 주석을 붙였다. 효심을 느끼게 한 대목이라 하겠다.

장 선생은 1919년 파리장서운동 때 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하는 등 독립운동을 한 장석영 선생의 손자다. 손자 장세민씨에 의하면 집안에 언문으로 필사한 ‘금강유람가’가 전해져 오는데, 조부의 형수인 풍양 조씨와 학성 이씨, 맏며느리 여강 이씨 등이 필사했고, 현재 본인은 맏며느리 여강 이씨가 필사한 것을 보관 중이라 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장일상 선생은 1930년 음력 6월 15일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친구들과 칠곡 약목을 출발하여 석달 간의 금강산을 유람했다. 이후 경원선을 타고 철원을 거쳐 서울로 돌아와 총독부 건물과 동물원으로 변한 창덕궁을 둘러보고 “주권 잃은 백성의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내용 중에 금강산을 둘러보니 많은 사람들이 석벽에 이름을 남기고 있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당시만 해도 금강산 구경이 쉽지 않은 여행길이었음을 짐작케 했다.

또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우리말 방언이 많이 수록돼 있다는 것이다. 당시 칠곡을 중심으로 영남지역 방언을 연구하는데도 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예를 든다면 ‘돌뿔딱’(돌뿌리) 우케덕석(벼를 말리는 멍석), 산만당이(산꼭대기), 까끔끼다(팔짱끼다), 틔들다(끼어들다), 홑바락이(홑옷바람) 십전구도(엎어지고 자빠지며), 수괴지심(부끄러움), 모력(힘을 다해), 괘영하다(영정을 걸다), 소두방(솥뚜껑) 등의 표현이다.

장세연씨는 내방가사 작가의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며 “내방가사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지역 목록을 넘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김윤숙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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