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나른한 바닷가에죽은 듯 누웠다파도가 와서 아는 체해도모른 체한다온통, 몸 젖은 파도가 와서떠나온 길 사라졌다 중얼거리고하루가 다 가도록 내 앞에서, 청춘 같은세월 뒤에 몸 뒤척이는 날 두고돌아가겠다 돌아가겠다수런거리며 바위 숲에 가서해송처럼 머문다시인은 햇살 나른한 바닷가에서 지나온 청춘의 시간을, 열정과 의욕에 부풀어 올랐던 시간을 뒤돌아보며 허망한 세월의 물결을 보고 있다. 이제는 젖은 파도가 몰려와 떠나온 길을 쓸어가 버리고 나이 들어 낡고 무너져가는 몸과 의식만 남은 현실을, 돌아갈 수 없는 그 청춘의 시간을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시인
2020-03-15
공원 벤치에 가을이 앉아 있다지팡이를 짚고 온 가을이말없이 앉아 있다허공에 집을 지은 이들은지상에 폐지조각만 남겨놓은 채 떨고 있다번지 잃은 영혼의 무게들만발밑으로 수북이 쌓인다매달릴 수도붙잡을 수도 없는구름의 시간이 흘러간다노오랗게 신열(身熱)을 앓고 있는하늘,그 아래 아무도 기침하지 않는다시인은 공원에 가득 차 가을을 이루는 사물들을 호명하며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지팡이를 짚고 온 노인네들에게서도, 발 밑에 수북수북 쌓이는 낙엽들에서도 청춘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붙잡을 수 없는 구름의 시간을, 세월의 허허로움을 읽는 시인을 본다. 시인
2020-03-12
사랑은이 세상을 다 버리고이 세상을 다 얻는새벽같이 옵니다이 봄당신에게로 가는길 한 새로 태어났습니다그 길가에는 흰 제비꽃이 피고작은 새들 날아갑니다새 풀잎마다이슬은 반짝이고작은 길은 촉촉이 젖어나는 맨발로붉은 흙을 밟으며어디로 가도그대에게 이르는 길이 세상으로 다 이어진아침 그 길을 갑니다시인은 길가에 흰 제비꽃이 피고 작은 새들이 날고 새 풀잎마다 반짝이는 봄 길에서 엄동을 견디고 되살아나는 고운 생명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있다. 이 땅 봄이 오는 어느 산자락 어느 들녘의 흙인들 맨발로 밟지 못할 곳이 있으랴. 봄을 맞는 시인의 환희에 찬 사랑의 노래를 듣는다. 시인
2020-03-11
계원리 강씨 어른은 영락없이 목수다벼린 대팻날 한 눈 감고 쓰윽 가늠 타가용골 앉히고 송판 대패질 나선 지스무아흐레막걸리 두 독쯤 비우던 그날뱃머리 고사 상 차려‘청진 앞바다 거친 물살 잠재우시고 한 그물 찢어지게 명태 오리도록 해주소’라며동해 용신께 그저 빌고 빌며 배 띄우던골 깊은 파도 깎아 낮추고굽이진 소나무 펴서조선배 만들던 목수였다시인은 구룡포에서 감포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어촌 마을인 계원리에서 만난 목수 강씨 어른의 한 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평생을 작은 대패 하나로 송판을 깎아 배를 만드는 강씨 노인. 세차게 불어오는 갈바람에 새까맣게 그은 얼굴과 풍어를 기다리는 그윽한 눈빛을 읽어내는 시인의 눈빛이 밝고 따스하다. 시인
2020-03-10
토속가든을 끼고 비포장도로를 사 분쯤 걸으면이층집 한 채와 단층집이 나란히 산 밑에 있다이파리 넓은 옥수수들은 이층집과단층집을 두터이 감싸고 벽돌담은 가르고소나무들은 집 뒤로 쭉쭉 가지를 뻗고 있다이층집과 단층집에서는 이따금씩 사내와 여인들이마당으로 오가고 바삐 산비둘기들이고랑을 뒤진다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하루 종일 햇빛과 바람은 시간의 가장자리를울리며 사라졌다가 돌아와 나뭇잎들을고요히 흔든다 밤에는 이슬 같은 별들이 떠오른다지붕은 숨을 죽이고단층집에서는 현관문이 열리면서사내가 나오지만 밤은 동요하지 않고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 간다 사내는손가락질하며 따라간다 밤은 아랑곳없이골짜기로 빠져나간다 사내는 계속손가락질하며 따라가고 사내 뒤로 밤은깊어가고 밤은 꼬리를 감추고 침묵속으로 들어간다시인은 밤의 정경을 묘사하며 계속 흘러가는 시간을 불러내어 그 시간 속에서 부단히 움직이는 사물과 사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인간과 사물들은 움직이고 행위를 계속한다고 기록하면서, 우리를 그 팽팽한 밤의 침묵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03-09
일흔일곱 한 생이훌쩍 등 돌려 떠난 자리열여섯 새색시로 만나한평생 손마디로 굳어버린은가락지 한 쌍과칠순 때 시집간 딸이 끼워준두 돈짜리 금가락지 하나등껍질로 깔고 누운 담요 밑엔일금 사만칠천삼백 원이 든우체국 통장도 하나강 건너는 영혼 앞에한 가지씩 나눠 들고사형제 엎드려 곡소리 높다시집 올 때 낀 은가락지 한 쌍과 칠순 잔치 때 받은 금가락지 하나, 우체국 통장 하나를 남기고 어머니는 가셨다. 그것은 파란 많은 한 생을 피땀 흘리며 사랑과 정성을 다해 사형제를 키워낸 어머니의 거룩하고 위대한 유산이 아닐 수 없으리라. 시인
2020-03-08
마른바람이 모래언덕을 끌고 대륙을 건너는타클라마칸 그곳만 사막이 아니다황무지가 끝없이 이어지는 시대도 사막이다저마다 마음을 두껍고 둔탁하게 바꾸고여리고 여린 잎들도 마침내 가시가 되어견디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곳그곳도 사막이다우리 안에도 선인장 가시 같은 것이 자라나여차하면 남을 찌르고 내게 날카로워지는데뜨거움은 있으나 서늘한 숨결은 없지 않는가오직 전속력으로 그곳을 벗어나고자 하는 곳연민도 눈물도 없이 사는 이곳도 사막 아닌가눈 줄 데 없는 황량하고 메마른 풍경 속에서모두 다 카우보이가 되어버린시인은 타클라마칸 사막만 사막이 아니라고 말하며 황무지 같은 우리 시대가 사막이라고 한탄하고 있음을 본다. 저마다 아집과 단절의 벽을 쌓고 여차하면 남에게 상처를 주는 곳, 뜨거움보다 서늘한 숨결이 있는 곳, 연민도 눈물도 없는 우리 시대가 황폐하고 생명이 멸절되어가는 사막이라고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03-05
진주장터 생 어물전에는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진 어스름을울 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빛 발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은전(銀錢)만큼 손안 닿는 한(恨)이던가울 엄매야 울 엄매(….)진주 남강 맑다 해도오명 가명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울 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시인은 유년 시절의 낡은 사진 하나를 보여주고 있다. 진주 장에 생선 행상을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이다. 은전 한 닢은 광주리로 생선 장사를 하는 어머니의 손끝에 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에 있고, 이제는 그 아이도 나이가 들어 그때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것이다. 시인
2020-03-04
한 꼬마가 아이스케키를 쭉쭉 빨면서땡볕 속을 걸어온다두 뺨이 햇볕을 쭉쭉 빨아먹는다팔과 종아리가 햇볕을 쭉쭉 빨아먹는다송사리 떼처럼 햇볕을 쪼아 먹으려 솟구치는 피톨들살갗이 탱탱하다전엔 나도 햇볕을쭉쭉 빨아먹었지단내로 터질 듯한 햇볕을지금은 해가 나를 빨아먹네아이스케키를 쭉쭉 빨아먹던 꼬마는 꿈 많고 건강한 아이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그 아이도 나이가 들어 ‘해가 나를 빨아먹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간명한 묘사 속에서 시인은 쏜살같이 지나가버리는 시간의 주름을 펴보이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03-03
어디라 가서 잘 살 수 있을까눈물이 많았는데아득하게 뼈만 남아서가다가 서구, 가다가 주저앉곤 했는데수국이 보이는 뒤뜰저 그늘 방에 할머니 어머니처럼 오래 있었는데이젠 어디서든 다시는 볼 수 없다지만고향집 수국이 보이는 뒤뜰 구석 그늘진 건넌방은 식구들이 채취와 아옹다옹 살아온 생의 흔적과 온기가 서려 있는 곳이다. 이제는 낡고 헐어서 예전의 그 따스한 공간으로서의 건넌방을 다시 볼 수 없지만, 사랑과 정성이 서려 있는 오랜 구석 건넌방은 시인의 가슴 속에 오래오래 남아있으리라. 시인
2020-03-02
언젠가도 나는 여기 앉아 있었다이 너럭바위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지금과 같은 생각을 했다그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가슴속 응어리를노을을 보며 삭이고 있었다응어리 속에는 인간의 붉은 혀가석류알처럼 들어 있었다그러다 어느 순간슬픔의 정수리로 순한 꽃대처럼 올라가숨결을 틔워주던 생각감미롭던 생각그 생각이 나를 산 아래로 데려가 잠을 재웠다내가 뿜어냈던 그 향기를 되살려내기가이다지도 힘들다니 ….순간은 금방 다른 순간을 물고 이어지고가 반복된다. 시인은 그런 순간의 반복 속에서 품고 있던 생각과 가슴 속 응어리들이 자기 자신을 슬픔이나 욕망에서 벗어나게도 하고, 거기에 갇히게도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순간의 연속에서 웃고 울고 절망하고 희망을 가지는 것이리라. 시인
2020-03-01
삼십 년 만에 만나 배불뚝이 동창생 녀석이눈을 똥그랗게 뜨고 말했다“예나 이제나 고향 우시장(牛市場)에 박힌말뚝처럼 비쩍 마른 건 여전하구나!”평생 내 삶을 괴어온내 안에 살아 계신 이가 불쑥 나서며이렇게 날 변호하는 것이었다“비쩍 마른 말뚝임엔 틀림없으나하늘과 땅을 잇는 말뚝이라네!”삼십 년 만에 만난 동창생이 던진 말에 시인은 미소 지으며 한마디 말로 대꾸를 하고 있다. 왜 시인은 자신을 ‘하늘과 땅을 잇는 말뚝’이라 답했을까. 시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목사이기 때문이리라. 고진하 시인은 친구의 말처럼 비쩍 마른 편의 시를 쓰는 기독교 목회자다. 시인
2020-02-27
의자에 앉으면 내 몸은 유체이다아니 갑자기 뼈가 없어져 버리는 연체동물이다의자가 만들어 놓은 틀에 맞게내 몸은 자동적으로 변형된다튀어나온 어깨 부분에서는 내 어깨도 튀어나오고쑥 들어간 허리 부분은 내 허리가 알아서 가듯이의자의 깊은 골 따라 알맞게 들어간다의자에 앉으면 방금 전까지 벌판에서 펄펄 뛰던내 몸의 야성은 어느새 사라지고나는 말 잘 듣는 얌전한 애완견처럼의자의 본에 맞춰 내 몸을 재조정한다달리는 봉고차 의자에 앉아서말없이 졸면서 한나절씩이나 보내야 하는나의 불규칙한 생계여여태 나는 내가 살아있는 줄도 모르고 살고 있네시인은 의자에 따라 몸도 마음도 변하는 것에 주목하면서 생계를 위해 삶의 여건과 조건, 생활의 패턴이 바뀌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몸도 마음도 주어진 상황에 적응해가며 애완견처럼 길들어 가는데 대한 서글픈 심정을 토로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20-02-26
꽃 피는 봄에배추꽃 노란 꽃잎 뒤로새 한 마리 아스라이 파묻히는하늘을 보다가기다리는 사람 없이홀로 저무는외딴 집꽃 피는 봄날 시인은 지리산의 어느 외딴집에서 부재의 쓸쓸함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는 사람이 없으므로 기다림도 없고 그리움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죽음이 아닐 수 없다. 현대인의 정신세계에도 이런 부재의 외딴집이 허다하리라는 가정을 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시인
2020-02-25
네가 상처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리봉으로 와. 아무도 없는 술집에서 뼈해장국 시키면거기 네 설움이 울대째 넘어온 듯퉁명스러운 감자 몇 알이 묻어 나올 거야때 타고 흙먼지 묻었지만씻겨 놓고 보면 말갛던 네 옛 친구들이퍽퍽하니 목에 메일지도 몰라어우러진 한 솥 펄펄 끓었어도제각기 자란 토양 달라 한 맛내기 쉽잖던 시절왜 우린 서로 뼈처럼 단단해지기만을 바랐을까바람 불어 오거리 쓸쓸한 날아무도 없는 해장국집 들러다글다글 끓는 지난날 떠올리자면거기 내 그리움도 얼큰히 풀려고춧가루 서너 숟갈 더 퍼부어도 시원찮은데….시인은 뼈해장국을 먹으며 지난날 함께 노동운동에 나섰던 친구들을 떠올리고 있다. 떠나버린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익살스럽고 따스하게 전해지는 작품이다. 뼈처럼 단단하게 서서 견디며 사람 살만한 세상을 일으켜 세우자고 맹세했던 친구들과의 연대는 무너지고 꿈꿔오던 세상은 오지 않음을 개탄하며 흩어져버린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02-24
도로 위에 납작하게 누워 있는 개 한 마리.터진 배를 펼쳐놓고도 개의 머리는 건너려고 했던 길의 저편을 향하고 있다.붉게 걸린 신호등이 개의 눈동자에 담기는 평화로운 오후. 부풀어 오른 개의 동공 위로 물결나비 한 마리 날아든다.나비를 담은 개의 눈동자는 이승의 마지막 모퉁이를 더듬고 있다.개의 눈 속으로, 건너려고 했던 저편, 막다른 골목의 끝이 담긴다.개는 마지막 힘을 다해 눈을 감는다. 골목의 끝이, 개의 눈 속으로 사라진다.출렁이는 어둠 속으로 물결나비 한 마리 날아간다.납작하게 사라지는 개의 죽음 속으로도로를 횡단하다가 차에 치여 죽어가는 개의 눈동자에 물결나비 한 마리가 날아든다. 개의 눈이 감기고 죽는 순간 나비도 날아가 버린다. 문명이 짓이겨 버리는 폭력성과 비정함을 고발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의 연민에 어린 눈빛을 본다. 시인
2020-02-23
나무에서 물방울이내 얼굴에 떨어졌다나무가 말을 거는 것이다나는 미소로 대답하며 지나간다말을 거는 것들을 수없이지나쳤지만물방울 - 말은 처음이다내 미소 - 물방울도 처음이다나무는 물방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시인에게 말을 걸어오고 소통함을 본다. 물방울은 그 본성이 생명의 순환 매체이므로 단순하지만 소박하고 순수한 것이므로 시인의 마음과 통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 시인의 섬세한 시심이 이채롭기 짝이 없다. 시인
2020-02-20
퇴락한 절집의 돌계단에 오래 웅크리고돌의 틈서리를 비집고 올라온보랏빛 제비꽃 꽃잎 속을 헤아려본다어떤 슬픔도 삶의 산막 같은 몸뚱아리를쉽사리 부서뜨리지는 못했으니제비꽃 꽃잎 속처럼 나 벌거벗은 채천둥 치는 빗속을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내 몸을 휩싸는 폭죽 같은 봄의 무게여내가 부둥켜안고 뒹구는 이것들이혹여라도 구름 그림자라고는 말하지 말아라네가 울 때, 너는 네 안의 수분을 다하여울었으니숨 타는 꽃잎 속 흐드러진 암향이여우리 이대로 반공중에 더 납작 엎드리자휘몰아치는 봄의 무게여대적광전 기우뚱한 추녀 또한뱃고동 소리로 운다시인은 어느 봄날 퇴락한 절집의 돌층계 아래에 핀 제비꽃을 들여다보며 그 제비꽃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환상에 빠지게 됨을 본다. 어떤 슬픔도 삶의 산막 같은 몸뚱아리를 쉽사리 부서뜨리지 못했다고 그래서 종종걸음으로 빗속을 달려왔다고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에서 최선을 다해 생의 험로를 달려오면서 슬픔을 이겨냈다는 자기 위안의 마음을 제비꽃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시인
2020-02-19
돌아갈 시간 앞에 죄어드는 이 마음을차마 떨칠 수 없어 다시 묻는 너의 안부못다 한 사연을 담아 등대불로 띄우는가불 꺼진 해안선에 인적 소리 멎었건만흐린 눈 초점을 모아 어둠 속을 헤맵니다어느 먼 세월 저편에 다시 올 날 기약하며만남의 그림자로 태어나는 이별 앞에눈물은 또 하나 가슴 안의 피로 돌아흐느낌 젖은 뱃고동 분단의 한 토합니다북녘 땅 고성에서 월남하여 남쪽에서 살아온 실향민의 가슴 아픈 망향가를 듣는다. 이제 나이 들어 살아생전 고향에 갈 수 있을지 모르는 화자는 멀리 고성항에서 들려오는 젖은 뱃고동 소리가 분단의 한을 토해내고 있다고 느끼고 분단 극복, 통일을 간절히 열망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02-18
고속도로 휴게소건성으로 스치던봉고차 잡화점에서칼 하나 샀다산에 갈 때 쓰인다고용도를 말했지만오래전부터 그냥칼 하나 갖고 싶었다숨어 있다가한 꺼풀 젖히면새파란 날로나를 놀라게 할칼 하나 품고 싶어작지만단단한 칼자루에숨겨지는칼 하나 샀다왜 시인은 칼 하나를 갖고 싶어 했을까. 칼의 속성은 생사의 경계를 하고 있고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물이다. 시인은 생의 긴장감을 느끼려는 마음으로 칼을 가지고 싶어했을 것이다. 늘 깨어 있으려고, 긴장감을 느끼고 새로워지려는 마음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
2020-02-17
잇몸이 간지러운지밤새 보채더니오늘 아침첫니 하나 돋았다삼재에 시린아비 등줄기 같은새파란 젖니네가 있어오히려우리 가난은따뜻하다시인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어린 아이를 보면서 삶의 아픔도 고통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지독한 가난 속 고통스러움이 거듭되어도 새로 돋아나는 아이의 새파란 젖니를 바라보며 강한 생의 집착을 느끼고 새로운 활력을 얻는 것이다. 희망의 끈을 다시 단단히 여며 쥐는 시인을 본다.시인
2020-02-16
오리가 쑤시고 다니는 호수를 보고 있었지오리는 뭉툭한 부리로 호수를 쑤시고 있었지호수의 몸속 건더기를 집어삼키고 있었지나는 당신 마음을 쑤시고 있었지나는 당신 마음 위에 떠 있었지꼬리를 흔들며 갈퀴 손으로당신 마음을 긁어내고 있었지당신 마음이 너무 깊고 넓게 퍼져나는 가보지 않은 데 더 많고내 눈은 어두워 보지 못했지나는 마음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고꼬리를 흔들며 뒤뚱거리며당신 마음 위에 뜨곤 했었지나는 당신 마음 위에서 자지 못하고수많은 갈대 사이에 있었지갈대가 흔드는 칼을 보았지칼이 꺾이는 걸 보았지내 날개는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오리와 호수의 관계를 연애 관계로 설정한 시인은 사랑의 본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펴고 있음을 본다. 오리가 아무리 호수를 돌아다녀도 호수의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아무리 살갑게 사랑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진정으로 상대의 가슴 속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리가 언제든 호수를 떠나 날아오르는 것처럼 인간의 사랑도 어느 순간 결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02-13
누가 저리 울어밤새워 하얀 무명 손수건을걸어놨을까사월의 아침 햇살을 타고새떼들 날아간푸르른 창공에순결한 목숨인양 피어난 목련꽃 송이가슴에 보듬으면 흰 적삼자락 고운 눈물이 밸까누가 울다 지쳐저리도 하얗게 타는 마음을 소복소복 풀어 놨을까접동새 목메어 울고눈이 시리도록 꽃피고 지던 마을빈 나뭇가지 가슴 붉은 이 산하에아직은 시린 사월, 햇살 아래 하얗게 목련이 피어오른 아침 시인은 이 땅의 민주화와 자유를 위해 피 흘린 청년 학도들의 고귀한 희생을 떠올리고 있다. 목련꽃같이 순결한 목숨이 뚝뚝 떨어져 간 날 접동새 목메어 울고 눈 시리도록 꽃피고 지던 마을, 빈 나뭇가지 가슴 붉은 이 산하를 떠올리며 그들의 고결한 희생을 추념하고 있는 시인을 본다. 시인
2020-02-12
모든 국은 어쩐지괜히 슬프다왜 슬프냐 하면모른다 무조건슬프다냉이국이건 쑥국이건너무 슬퍼서고깃국을 발음도 못하겠다고깃국은.....봄이다. 고깃국이왜 시인은 국이 슬프다고 말했을까. 냉잇국이건 쑥국이건 슬프다고 말하는 시인의 가슴 속에는 그 국을 먹는 사람들의 한 많은 생이 녹아나 있다고 느끼는 것이리라. 힘들고 어려운 삶 속에 봄나물을 넣어 끓인 국은 이 땅 민중들의 서러운 눈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다 명절이나 경삿날 먹는 고깃국 또한 그럴 것이라는 시인의 인식이 눈물겹게 배여 있는 시다. 시인
2020-02-11
아직 잠들지 못하는 이 있다머리 부딪치며 파도를 몰고달려오는 광기진한 바닷냄새 몰고 오는 바람 같은 사람그대 잠들지 못한 저 바다의 가슴에달큰한 타액으로 애무하고 싶었다절망의 젖은 뭉치들깜깜한 밤에 궁글리며 몸부림치고핥으며 쓰다듬으며 가라앉히며들뜬 나의 바다우우 방황하는 숲을 달래는해안의 숨은 이야기울먹이는 바다 속으로금시라도 까무러칠 듯 성난 바람은몇 안 되는 바닷가 마을을적막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밤바다는 어떤 예감으로 웅웅거리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삶에서 느낀 절망감을 안고 밤바다 앞에 선다. 바다도 시인의 마음을 아는지 밤새워 출렁이며 잠들지 못하고 울먹인다고 표현하고 있다. 대자연은 넉넉한 가슴을 열어 인간을 품어주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20-02-10
맥주처럼 마음 부글대느라 듣지 못했을까차바퀴에 깔린 비명 소리술과 속도감에 취해누군가를 죽이고 도주하는 무리들뒤이어 차들 왈칵왈칵 몰려와부서진 삵 으깨어아스팔트 위에 납작하니 붙여놓는다로드킬, 아스팔트 위에 으깨어진 주검을 보며 시인은 현대사회 문명의 폭력성과 비정함을 고발하고 있음을 본다. 인간은 순정한 자연물에 대해 얼마나 오만한가를 비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02-09
봉분 하나가스르르 눈을 감는다무덤의 주인은티끌 한 점의 기억마저 데리고주섬주섬흙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새 한 마리 날아올라톡, 톡서쪽 하늘을 열고 몸을 던진다이쯤에서나의 목숨도 가볍게봄비에 젖고아직 맥박이 뛰고 있는무덤가에 누워나는 죽어서징글한 뱀의 허물을 남길까내가 떠난 자리부엉이 울까비에 젖는 새로 조성된 봉분을 바라보며 시인은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떠난 지 얼마 안 된 봉분 속에는 망자의 혼이 머물러 있을 것이고 서쪽으로 가는 문을 열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고 있다. 언젠가 다가올 자신의 사후를 예견하며 욕심 없이 천리(天理)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부엉이가 울어주기를 기대하는 겸허한 마음 한 자락을 펴보이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20-02-06
푸른 겨울밤 하늘냉골의 암자에서 흐른 술을 마시던 그대를 추억한다댓돌에 가만히 얹혀 있을 한 짝 신발을 추억하는 것이다모든 길은 걸어서 가야 한다풍경이 울리는 마당 가에서늙은 물고기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얼어간다무욕의 생이란 한낱 저 목어(木魚)와 같아쓰리디 쓰린 입술로 세상에 입을 맞추는 것저 별의 빛이 내 가슴에 와 닿기까지얼마만큼 서늘한 공간을 날아와 고단한 몸을 투신하는가형형한 해골 하나를 추억한다이 겨울밤,거세하지 못한 내 생의 뿌리가 부끄럽다혹 들판에 낱낱이 뿌려지는 하찮은 눈발이도제발 내 헛것에 감감을 불어넣어다오하여,소용없음을 진각하게 해다오꿈도 아닌 가난한 생의 저 밖을 헤매는한 그루 겨울나무처럼나, 여기짧고 명료하면서 많은 울림을 품고 있는 일본의 시 하이쿠의 시인 바쇼를 추억하며 쓴 시다. 시인은 살쾡이의 눈을 떠올리며 육신을 다 버리고 난 뒤의 형형한 해골 하나에도 빛나는 눈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무욕의 생을 표방하고 살아가지만 그렇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며 겨울밤을 새우는 바쇼처럼 진정한 시인의 길을 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시인
2020-02-05
못된 아이들은 이렇게 항상 머리 위에서 논다, 106호 고독한 남자는 갑자기 참을 수 없었다. 천장이 아니라 천둥 같잖아. 오늘 밤은 조용해야 해.오늘 밤은 쉬어야 해. 106호 고독한 남자는 206호 고독한 여자가 된다. 우리 집엔 애들이 없어요. 그리고 난 쭉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어요. 306호는 살인사건 이후 칼 한 자루까지 사라졌잖아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집이 됐잖아요그러니 우리는 좀 더 올라가 봐야 해요. 못된 아이들은 빠르게 기어올라요.어디쯤에서 배꼽은 쑥 빠질까요? 옥상까지 올라온 우리들은 43명이다. 우리들은 일제히 하늘을 노려본다. 1206호 별빛같이 고독한 남자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아파트의 층간 소음 문제가 이 시의 모티브다. 아파트는 지독한 단절과 고립, 철저한 익명의 공간이다. 층간 소음은 일상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106호, 206호로 불리는 층별 사람들은 그 소음의 근원을 찾으러 오르고 올라 옥상에 이르고, 거기서 하늘의 별을 찾게 되고 그들은 다시 지독한 고독의 위치로 되돌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단절된 도시인들의 서글픈 초상을 본다. 시인
2020-02-04
은현리 대숲이 비에 젖는다책상 위에 놓아둔 잉크병에녹색 잉크가 그득해진다죽죽 죽죽죽 여름비는 내리고비에 젖는 대나무들몸의 마디가 다 보인다사랑은 건너가는 것이다나도 건너가지 못해내 몸에 남은 마디가 있다젖는 모든 것들제 몸의 상처 감추지 못하는 날만년필에 녹색 잉크를 채워 넣는다오랫동안 보내지 못한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사람푸른 첫줄 뜨겁게 적어놓고내 마음 오래 피에 젖는다울산의 은현리 대숲에 녹우가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시인은 사랑을 생각하고 있다. 사랑은 저 비처럼 건너가는 것인데, 온전히 건너가지 못하고 몸 안에 마디가 있다는 시인의 고백을 듣는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과 푸른 빗물로 쓴 부치지 못한 사랑의 편지를 품고 그 사랑에 대한 그리움에 젖은 것이리라. 시인
2020-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