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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詩가 흐르는 뜨락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스치는 바람 결에 풍경소리 맑고 풍금소리 정겹게 들리는 풍경이다. 바람소리 새소리가 간간이 울리는 서옥(書屋)의 뒤뜰에서 잔잔한 배경음을 바탕으로 시 낭송하는 소리와 문학 얘기를 나누며 공감하고 담소하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 도심의 한 켠에서 시와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시를 읽고 시 이야기를 나누는 이른바 ‘시가 흐르는 뜨락(詩뜨락)’의 행사 장면이다.‘도심 속 작은 쉼터 아늑한 정원에는/이따금 풀꽃의 속삭임이 들려오고/새들의 지저귐 같은 낭랑함이 퍼진다//시(詩)의 행간에 목소리가 스며들어/그림을 그리듯 날개를 달아주니/비로소 시의 꿈이 피고 맵시마저 곱구나//별빛처럼 타는 운율 영롱함을 더하고/도란도란 엮는 시담(詩談) 달빛에 젖어 드네/뭉클한 감미로움이 새록새록 아리네//꿈결같은 시가 흐르는 뜨락에는/바람의 몸짓으로 시흥(詩興)이 어우러져/새로운 문화의 요람 향기 짙게 울리네’ -拙시조 ‘ 시(詩)가 흐르는 뜨락’ 전문.‘詩뜨락’ 행사는 일종의 시낭송 콘서트다. 경향의 저명한 시인이나 문인을 우거에 초빙해서 시낭송가들의 낭랑한 음성으로 음악을 곁들여 시를 낭송하고 시인의 시작(詩作) 배경과 삶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누는 시 누림이다. 즉, 저자와 독자가 같은 공간에서 가까이 만나 소통하고 문학적으로 교감하는 시 나눔 마당이다. 이러한 행사는 포항시낭송협회와 필자가 공동으로 작년부터 열기 시작하여 지난 주말에 네 번째로 열리면서 세간에 회자되어 시 감상과 시 낭송 콘서트의 대중성을 지향하는 새로운 문화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한 편의 시에는 소설같은 스토리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시에는 응축된 시간과 함축된 생각, 농축된 경험과 절절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는 가장 짧은 문장으로 가장 긴 울림을 준다고 했던가. 때로는 연분홍 편지 같고 아스라한 절해고도 같으며 한편으론 뇌성벽력처럼 일갈하는 시를 진지하게 또는 애절하게 낭송하는 것은 시의 행간에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활자화된 시에 어울리는 멋진 옷을 입혀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에게서 떠난 시는 독자의 몫이라지만, 시에 걸맞는 음색으로 옷을 입혀서 행과 연의 율격에 따라 목소리의 강약과 완급을 조절하며 표정과 몸짓으로 다시 우려냄은 시를 애틋하고 살갑게 가슴에 품는 일이다.표현하는 사랑이 아름답듯이 시낭송은 또 다른 색조의 감동을 전해준다. 저마다의 목소리와 특유의 표정, 몸짓으로 연출해내는 시낭송은, 시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가슴을 열게 하여 손으로 만져질 것만 같은 느낌과 운치를 더해준다. 시의 행간에 목소리가 스며들어 고운 음색과 조화로운 음률로 시를 단풍처럼 물들게 하는 것이다.시의 날(11월 1일)이 있는 계절에 별빛처럼 시가 흐르고 꿈결처럼 시 얘기가 피어나는 뜨락에서 시의 맛과 멋을 음미하며 교감하고 담소하는 아름답고 귀한 자리가 많아지고 계속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이러한 시 울림은 코로나19로 인해 소침해져가는 마음을 위무하고 활기를 더해주는 감성의 활력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020-11-01

오만(傲慢) 증후군

증후군(症候群)이란 질병의 몇가지 징후가 늘 함께 나타나지만 그 원인이 명확하지 아니할 때 쓰는 용어다. 영어로 신드롬이라 한다.권력이란 남을 합법적으로 지배하는 수단이다. 정부가 국민에게 강제하는 공권력 같은 것을 권력이라 한다. 권력이 꼭 정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직장이나 사회적 관계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권력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정치권력만큼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것은 없다.권력이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합법적 수단이라는 점에서 신중히 사용돼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권력을 남용해서 빚어진 불행한 일은 역사적으로 얼마든지 있다. 독재자의 말로 등이 그런 것이다.미국의 심리학자 대커 켄트너 교수는 “견제 없이 권력을 누린 자는 뇌 손상을 당한 사람처럼 공감 능력을 상실한다”고 말했다. 타인을 생각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실패에 대한 걱정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권력자의 공감능력 부족 등의 현상을 오만 증후군이라 부른다.상당 시간 견제 없이 권력을 누리게 되면 이런 증상은 더 심각해진다. 권력자는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자신에 대한 비판적 의견은 외면한다. 권력 집단의 판단에 대해 언제나 자신감이 넘쳐난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국정을 1인 운영체제로 만들고 그에게 견제와 균형을 요구했던 참모 다수를 해고한 것을 두고 미국 내에서는 오만한 권력의 행태로 보는 시각이 많다.오만 증후군은 일종의 권력이 낳은 부작용이다. 권력을 남용하거나 국민의 뜻을 외면한 권력자의 독주가 빚은 잘못된 결과물이다. 집권당인 더불어 민주당이 5년 전 국민과 약속했던 당헌 규정을 내팽개치고 서울·부산시장 후보를 내기로 내부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여당의 오만 증후군이 또 하나 추가되는 순간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11-01

‘팬덤(Fandom) 정치’ 망국론

안재휘 논설위원지구상에 광신정치(狂信政治)가 처음 나타난 게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21세기 대명천지에도 여전히 치밀한 선동전략에 의해 지도자를 신격화하여 미친 듯이 지지하는 나라가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긴 왕조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는 백성의 섬김이란 충효(忠孝) 사상을 중심으로 강요된 복종이었다. 나라는 온전히 왕의 소유물이고 백성은 오로지 얻어먹는 비렁뱅이 취급을 당했다.북한은 그 인민들이 동족이라는 사실을 빼고 나면 완전히 다른 행성의 나라다. 그 독재구조를 보면 왕조시대에서 오히려 퇴보한 국가체제라고 평가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선택하고 발전해온 우리나라에서도 양태는 조금 다를지언정 결과는 마찬가지인 전체주의의 비극적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대한민국 건국 이래 팬덤(Fandom) 정치는 늘 있었다. 8·15광복 이후 나타났던 팬덤 정치는 교육받지 못한 국민이 일부 명망가를 중심으로 한정된 정보를 갖고 극소수가 따로 뭉치는 정도였다. 전혀 새로운 양상의 선진적 팬덤 정치를 만들어낸 사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노무현이 무명에 가까운 정치인에서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나타난 팬덤 현상은 우리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독창적인 정치모델이었다. 투신자살이라는 비극적 종말을 맞았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팬덤 정치의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은 그 가능성을 상속받아 더욱 정교해진 선동기술에 의해 정치를 만들어갔다. 작게는 25%에 이르는 범(凡)친문계열 골수 지지층의 정서는 독특하다.친문계열은 친노가 그 핵심이다. 하지만 친노와의 차이점은 분명하다. 친노의 핵심인 노사모는 ‘노무현이 그저 좋은’ 사람들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친문은 다르다. 특히 대깨문(‘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의 준말)으로 불리는 핵심은 노사모와는 달리 이익 집단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진중권 같은, 한때 진보 논객이었던 사람들은 그 변질에 치를 떤다.조국 사태 때는 물론이고, 작금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해괴한 권력 힘자랑 현상에서 나타나는 그 자신감의 저변에는 바로 그 팬덤 정치에 대한 확신이 존재한다. ‘대깨문’들의 행태에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이성 따위는 전혀 작동되지 않는다. 오로지 확증편향으로 굳어진 아적(我敵) 개념만이 그들의 언행 양식 일체를 결정한다. 누군가 좌표를 찍어주기만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몰려가 때려 부수는 원초적 복종만이 작동할 따름이다.더불어민주당이 당헌을 뒤집고 내년 4월 서울·부산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래도 이기고, 저래도 이긴다는 팬덤·광신정치에 물든 자신감이 그들의 행태를 뒷받침한다. 이제 이 문제는 온전히 국민의 판단력을 가늠하는 시험대가 되었다. 괴물처럼 변해버린 팬덤 정치가 이 나라의 또 다른 치유 불능의 고질병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중우정치(衆愚政治)의 망령이 어른거리는 우울한 11월이다.

2020-11-01

진일보하고 있는 평생학습도시 청도

이승율청도군수우린 교육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공교육에 각종 사교육, 인터넷에 흘려 넘치는 정보 속에 사는 것이다. 사교육으로 부모의 허리가 휘지만, 우리 부모세대와 우리는 자식을 공부시키는 것이 큰 목표 중의 하나였다.지금은 누구나 대학진학을 꿈꾸지만, 자식을 대학에 보낸 것이 부모의 자랑거리인 시기도 있었다.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먹는 것조차 아끼며 오직 자식이 잘되기만 고대하던 아픈 추억이 있다.청도는 자식 뒷바라지에 청춘을 바친 많은 군민이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는 농촌도시다.군은 교육을 받고는 싶었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교육과 동떨어진 삶에 평생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해야만 했던 군민을 위해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평생학습교육을 군정목표로 삼아 평생교육진흥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 전담부서 설치, 전문가를 채용해 평생교육 중장기 종합계획을 수립하는 등 지역민의 행복한 삶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그 결과 2014년 10월 교육부로부터 평생학습도시 지정을 받았다.평생학습도시 지정을 받은 이후 행복학습센터 공모사업과 평생학습도시 특화 프로그램, 성인문해교육지원 사업, 지역 특성화 평생교육프로그램 운영 등 지역민의 평생교육에 전력투구했다. 이러한 청도군의 노력은 많은 국비와 도비를 확보하며 2017년 경북도 평생교육시책평가 대상을 받고 2018년에는 최우수상을 받는 결과로 나타났다.또, 경북도민 평생학습을 통한 행복지수 2016년 조사에서 도내 5위와 군부 2위를 차지하고 2017년 10월에는 인구 5만 명에 상대적으로 부족한 인프라에도 제5회 경북도 평생학습박람회를 개최해 32만 명이 관람하는 성과를 거두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지난해에는 중소벤처기업부 지역특구 평가에서 ‘청도우리정신글로벌화 교육특구’가 전국 197개 지역특구 중 10위 안에 들어 시상금을 받았다. 평생학습을 통한 행복지수는 학습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부정적인 정서가 감소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평생교육이 군민에게 끼친 영향력을 알 수 있다.평생학습은 연속성과 지역밀착, 수요에 따른 공급이 우선되어야 한다. 군은 제2차 평생학습 중장기 계획을 세워 연도별 전략적 특성화 프로그램 아이템 발굴, 주민요구조사를 통한 주민 맞춤형 교육 등 전략적이고 수준 높은 평생학습문화를 선도해 나갈 것이다. 올해 문학자판기를 민원실에 운영해 기다리는 민원인이 다양한 수필과 시, 문학, 명언 등을 제공하고 있다.평생교육은 시대상을 반영해야 한다.청도군은 평생교육을 온라인까지로 확대하는 교육환경체질개선에 나서 온라인 평생학습센터가 평생학습의 귀중한 자료와 지역의 학습자료를 축적해 지역의 평생학습 플랫폼으로 자리 잡도록 할 것이다. 생애단계별과 연령별, 성별, 환경별 다양한 잠재적 교육집단의 발굴을 통한 평생교육프로그램도 개발한다.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교육과 글로벌 시민교육, 환경교육 등으로 국제교육연합도시나 유네스코 글로벌 평생학습도시네트워크의 가입을 추진한다. 청도군의 이러한 노력과 결과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군민들이 있을 것이다.앞으로 마을단위의 평생교육 전폭 확대, 평생학습센터 확장, 지역개발사업과 도시재생 등에 필요한 주민교육, 두 가지 이상의 학습방법을 결합하는 블랜디드 러닝(blended learnig)과 비대면 교육 등 시대적·환경적 변화를 반영한 평생교육에 나설 것이다. 또 지역사회의 소외계층을 위한 사업을 확대하고 여성의 취·창업교육으로 일자리 마련, 청소년의 인성교육 등 평생교육에서 소외되는 군민이 없도록 할 것이다.청도군은 지역의 평생교육에서 나아가 세계평생학습포럼과 전국단위 평생교육 행사를 지역에 유치하는 꿈을 갖고 있다. 꿈이 꿈으로 그치지 않고 현실로 실현될 때 그 가치가 있다.청도군은 지역민의 행복지수가 점점 높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청도군을 거론하면 청정자연에 소싸움과 운문사 등 지역명소를 떠올리는 것과 함께 평생학습도시 청도를 말하게 할 것이다. 무분별한 교육의 홍수 속에서 지역민에게 꼭 필요한 평생학습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다른 지자체가 부러워하는 평생학습도시로 청도는 진일보해 나갈 것이다.

2020-11-01

기차와 향나무

경주 불국사역에는 무궁화호만 지난다. 멀리서 바라보면 전통 기와를 얌전히 이고 있어서 새로 만들어진 역에서 느낄 수 없는 세월이 느껴진다. 가을 햇살이 그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다. 조그마한 역이지만 100년의 역사를 품고 있어서인지 작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함께 간 친구는 불국사란 이름이 붙은 역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불국사 근처에는 시장 이름도 불국사시장, 밀면집도 불국사를 앞에 달고 장사를 하고, 길 이름도 불국로라 붙였다. 불국사의 그늘이 넓게 펼쳐져 있다.고려말 조선 초의 문인 ‘이행’은 소를 타고 여행을 했다. 그는 달 밝은 밤이면 술 한 병 옆에 차고 소 등에 걸터앉아 느릿느릿 산수를 거닐었다. 소보다는 말이 빠르지만 모든 것은 천천히 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법이라고 읊조렸다. 빠르기로 치면 KTX 열차가 제일이지만 달빛에 비친 아름다운 자연을 찬찬히 보기엔 소를 탄 것처럼 무궁화 열차만 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옛날에 사라진 비둘기호의 전설은 뒤로 미뤄두고 말이다. 느림의 미학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며 천천히 자연을 감상하는 둘레길이 만들어지고 스스로를 슬로우시티라고 이름 붙이는 곳이 늘어났다.경주는 이런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느리게 여행하기에 좋은 곳이다. 그 처음 시작이 불국사역이다. 몇 해 전 포항에서 기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갔었다. 부산 구포역을 거쳐 순천까지 가는 열차였다. 새벽에 출발해서 해운대를 지날 때쯤 바다에서 해가 떠오른다. 그 장면을 보려고 일부러 무궁화호를 탔었다. 그해를 마지막으로 해운대 노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져서 지금은 그 레일 위로 관광열차가 다닌다.불국사역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졌지만, 조선 시대 전통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1918년 11월 기차 운행이 시작된 불국사역은 올해로 102년을 맞았다. 오랜 역사와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코레일이 2013년 철도기념물로 지정하기도 했다. 불국사역은 부산~울산~경주~포항을 잇는 동해남부선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36차례 운행 중이며, 피서철과 여행 성수기에는 2000여 명이 불국사역을 찾는다. 기차를 타려고 역사를 나가니 레일 앞에 향나무 몇 그루가 우리를 반긴다. 기차가 처음 달리던 날 심었다고 이름표를 달았다. 5~10년 된 것을 심었다고 하니 불국사역보다 나이가 많다. 우둘투둘한 몸피에 이곳을 지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득 품고 있어서 함부로 말을 놓지 못하는 위엄이 느껴졌다.“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 키 작은 소나무 하나…”, 이규석의 ‘기차와 소나무’라는 곡이다. 노래 속에 소나무는 휙 지나치는 기차라도 볼 텐데 불국사역에 향나무는 곧 기차를 보지 못하게 된다. 동해남부선(총 142㎞·경주구간 52.4㎞) 복선화와 철도 이설사업으로 2021년 말이면 지금의 철도가 폐쇄돼 불국사역의 역할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열차 여행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불국사역을 살리자(불사조-불국사를 사수하는 조직모임)는 취지의 서명운동이 지난해 5월부터 진행 중이라고 한다.김순희수필가거기에 이름을 올려 힘을 보태야겠다. 나도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경주로 왔었다. 느리게 역마다 서는 비둘기호를 타고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이렇게 부르는 노랫말을 “독사 껍질 벗겨 그녀에 목에 걸면 그녀는 깜짝 놀라…”로 바꿔 돌림노래로 부르며.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면 까르르 웃게 되는 기차의 추억이다.향나무가 들려주는 100년의 이야기에 취해 있자니 기차가 들어온다. 호계역에서 달려온 기차는 젊은 연인들을 내려놓고 경주역을 향해 뒷모습을 남기며 가을 속으로 사라져 간다.향나무 아래 코스모스 꽃밭을 배경으로 기차의 꼬리를 넣어 한 컷의 사진을 남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불국사역의 무궁화호 모습도 역사 속의 한 장면으로 남을 테니. 기차역에는 사람과 기차가 드나드는 게 제모습이다. 향나무가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그 자리를 지키길 기도하며 역을 빠져나왔다.

2020-11-01

들국화 가을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코스모스가 지고나면 들국화가 제철을 맞는다. 여름의 열기가 덜 가신 초가을에 어울리는 꽃이 코스모스라면 들국화는 그보다 더 깊어진 가을에 어울리는 꽃이다. 그런데 들국화란 이름은 흔히 쓰이지만 막상 식물도감에는 나오지 않는다. 가을의 산과 들에 자생하는 쑥부쟁이나 구절초, 산국 같은 국화과 꽃들을 총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산야에 자생하는 꽃들을 통틀어 야생화라 하는 것처럼.“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絶交)다!” 안도현 시인의 ‘무식한 놈’이란 시 전문이다. 명색이 시인이면서 그것도 몰랐던 자신을 자책하는 시이다. 사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지 않고서는 구별이 잘 안 되게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바쁜 세상에 그따위 풀꽃이나 구별한다고 무슨 득이 되겠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시인이 아니라도 그 정도는 아는 것이 교양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세상의 어떤 지식보다도 종요로운 것이 자연에 대한 지식이다. 인류의 문명은 물론 생명까지도 자연에서 비롯된 것일진대, 자연을 모르는 사람은 그야말로 ‘무식한 놈’인 것이다. 하루 세 끼 제 입으로 들어가 목숨을 연장하는 음식의 출처도 모르면서 다른 무슨 대단한 걸 안다고 잘난 체 할 것인가. 그런즉 이 가을에는 들국화에 대한 공부라도 제대로 해서 무식을 면해 보시기 바란다.들국화를 대표하는 꽃으로는 아무래도 쑥부쟁이를 꼽아야 할 것이다, 가을 들녘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개화기간도 길어서 초가을부터 늦가을까지 줄곧 피고진다. 비슷하게 생긴 벌개미취나 구절초가 있지만 쑥부쟁이만큼 흔하지는 않다. 그 중에서 쑥부쟁이와 벌개미취는 연한 자주색 꽃만으로는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쑥부쟁이보다 잎이 훨씬 크고 줄기가 튼튼한 것이 벌개미취인데 요즘은 원예용으로 개량해서 화단에 심기도 한다. 구절초는 쑥부쟁이에 비해 흔치가 않은데다 주로 산자락에 핀다. 꽃잎은 희거나 엷은 분홍색인데 쑥부쟁이보다 넓다. 줄기도 곧고 단순한 편이어서 관심과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금방 알 수가 있다.가을 야생화로는 산국을 빼놓을 수 없다. 쑥부쟁이만큼이나 흔하지만 꽃이 노랗고 자잘하기 때문에 혼동할 여지는 없다. 들과 산의 경계쯤에 흔하게 피는 꽃인데 향기가 진해서 국화차로도 많이 쓰인다. 요즘은 산국과 꽃의 크기와 모양이 비슷하지만 색깔이 하얀 미국쑥부쟁이가 무서운 속도로 들녘을 잠식하고 있어 생태계 교란을 우려할 정도다. 북미 원산으로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미군 군수물자에 섞여 들어온 신귀화식물이라는데, 가을의 정취마저 바꾸어 놓을 것 같은 서슬이 자연스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산에 들에 들국화가 피어서 이 가을날이 얼마나 향기롭고 정겨운가. 이렇게 고운 꽃들로 장식한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다행한 일인가. 누가 뭐라 하는가. 우리 모두는 자연이 정성껏 차려놓은 연회장에 초대받은 손님들이다.

2020-10-29

이건희 그리고 삼성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Samsung is proud of being a part of Boston” (삼성은 보스턴 가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미국 보스턴공항 내 천장에 플래카드에 쓰여있는 문구이다. 하버드, MIT 대학이 있는 세계 학문의 중심이고 미국 개척의 시발점인 도시 보스턴시에 삼성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는 것은 한국민에게 큰 자부심을 심어준다.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3남 이건희 회장이 세상을 떠났다. 선대를 이어 1987년 회장에 취임한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호언하였다.그리고 그 약속은 지켜졌다. 한국의 삼성을 세계 초일류기업 삼성으로 성장시킨 변화의 중심에는 항상 단호한 승부사인 이건희 회장의 강한 의욕이 있었다. 이 회장이 취임한 1987년 10조원이 채 못되던 삼성그룹의 매출은 30여 년 후 400조에 가까운 40배 성장을 보이면서 한국정부의 총 수입보다 많아졌다.삼성이 IT 산업의 모태인 반도체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무도 삼성이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오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일본 기업들도 한국은 할 수 없다라고 평가했다.그러나 이건희는 외쳤다. “언제까지 일본의 기술 속국으로 남을 수는 없으며,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에 삼성이 나서야 한다”고 했다. 1986년 1메가 D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이후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다. 삼성 반도체가 메모리 강국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하며 세계 1위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이에 고취된 이 회장은 품질에 눈을 돌리며 90년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유명한 선언과 함께 역사적인 신경영 선언을 내놓기에 이른다.그는 “일류가 아니면 생산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키며 품질에 문제가 있는 휴대폰 애니콜 500억어치를 불태우는 강수를 둔 끝에 애니콜은 1995년 8월 전 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당시 대한민국은 모토로라가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가 됐다.80년대 미국 대학 경영대학원 교수들은 소니만을 칭찬하고 삼성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OEM(주문자상표부착)방식으로 생산했던 삼성은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삼성전자 TV라든가 특히 삼성 스마트폰 이런 것들이 미국 가전제품 상가의 전시대 맨 앞에 전시되어 있다.“우리의 목표는 초일류이며, 방향은 하나로, 눈은 세계로, 그리고 꿈은 미래에 두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갑시다”이건희가 생전에 남긴 이 한 마디는 이제 삼성의 또다른 도약의 깃발을 품고 있다. 삼성은 온갖 고난 속에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을 전세계에 한국을 알렸다. 일부 국민의 삼성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하여도 삼성이 한국민들에게 자긍심을 갖게해 주고 한국을 세계화 시킨 그 성과는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

2020-10-29

수불석권(手不釋卷)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면서 책을 가까이하기에 적합한 기온이어서 여름내 잊고 지냈던 책을 한번쯤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예로부터 가을을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이라 부른 것도 책 읽기에 좋은 환경이라는 뜻이다.가을은 오곡백과 등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책을 가까이한다면 이것도 힐링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 한다.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쌓게 한다. 또 눈으로 읽고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체득하는 과정에서 어느새 삶의 지혜도 발견하게 된다. “책은 사람이 만들지만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그 말이 옳은 것이다.공자도 논어 첫머리에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이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고 했다. 공부를 하고 책을 읽는 것이 군자의 으뜸가는 일이라 했다. 맹자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의 하나로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라 말했다.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 되는 것보다 세상에서 영재를 만나 그를 가르치는 것이 훨씬 즐거운 일이라 했다.세종대왕은 한 권의 책을 100번 읽는 백독백습으로 유명하다. 그의 책 읽는 습관이 이름난 성군으로 만든 계기가 됐는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정약용은 집안을 일으키는 데는 책 읽는 것 만한 것이 없다고도 했다. 빌 게이츠는 그의 저택에 무려 2만여 권의 장서를 보유한 개인도서관을 두고 매일 책을 가까이하는 것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코로나 바이러스로 집콕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코로나로 불편해진 우리 마음을 책으로 달래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가을이 깊어가는 지금, 책 읽는 기쁨으로 울적했던 마음을 떨쳐 보는 것도 지혜로운 생각이다. 수불석권을 실천해 보자./우정구(논설위원)

2020-10-29

정치의 이상향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현대에서 정치의 이상향은 어떤 것일까.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고, 우물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먹으니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 있으랴.” 태평성대의 대명사 격인 ‘요순시대’의 격양가에는 좋은 나라, 좋은 지도자란 서민들이 나랏일 신경 안 쓰고 자기 일만 하게 하는 존재라는 교훈이 담겨 있다. 인류역사상 정치가 있는 듯 없는 듯 여겨졌던 날이 며칠이나 있었을까. 인류 역사는 권력투쟁의 역사로 이어져왔기 때문이다.이 나라 민주주의 역사도 피와 땀으로 얼룩져있다. 일제로부터 광복이후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겪었고, 자유당 정부의 방종과 혼선에 이어 5·16혁명을 거친 군부정권의 경제개발, 그 이면에 독버섯처럼 피어난 독재, 문민정부 시대로 바뀐 이후에는 지역과 지역, 보수와 진보진영으로 나뉘어 격돌해온 정치판이다. 문제는 국민의 힘으로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한 이후다. 어찌된 일인지 이 나라는 아직도 한마음 한뜻으로 국론을 모으지 못하고 정쟁을 거듭하고 있다.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람사는 세상 홈페이지에 ‘정치, 하지 마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무척 진솔한 성품의 노 전 대통령은 그 글을 통해 정치인으로서 살아온 자신의 고뇌와 고통을 가감없이 털어놨다.그는 “이웃과 공동체, 그리고 역사를 위해 가치있는 뭔가를 이루고자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라면 한참을 지나고 나서 그가 이룬 결과가 생각보다 보잘것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 이라고 진단했다. 바로 노 전 대통령 자신이 정치를 시작하게 된 이유와 그 결과를 촌평한 것 처럼 느껴진다. 특히 그는 “정치인이 가는 길에는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거짓말의 수렁, 정치자금의 수렁, 사생활 검증의 수렁, 이전투구의 수렁 등의 난관과 부담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이 가운데 ‘이전투구의 수렁’ 에 대한 설명에서 그는 “정치인은 왜 그렇게 싸우는가? 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민주주의 정치구조가 본시 싸우도록 돼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 이라고 말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독재시절에는 여야의 싸움을 전쟁처럼 감시하고, 조사하고, 죄를 씌우고, 감옥에 보냈다.패자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으니 전쟁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는 싸움이 전쟁에서 게임으로 바뀌어 패자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게 됐다. 물론 민주주의라고 해도 정쟁을 전쟁으로 하던 적대적 정치문화의 전통이 남아있고, 사회적 대립과 갈등이 큰 나라에서는 싸움이 거칠어지고 패자에 대한 공격도 가혹해지기 마련이라는 설명도 덧붙었다. 어쩌면 자신의 운명마저도 예측한 듯한 내용이어서 마음 짠했던 대목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구이자 동지로서 평소 “정치하지 마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을 법한 문재인 대통령이 28일 국회 시정연설에 나섰다가 야당의원들로부터 냉대와 야유를 받았다. 민주주의가 원래 비효율적이고, 시끄러운 정치시스템이라 했던가. 이상적인 정치를 꿈꿔온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구인 문 대통령의 소회가 새삼 궁금해진다.

2020-10-29

핑크빛 주유권

강길수수필가여직원이 불렀다. 친구의 사무실 문을 나서는 참이다. 뒤돌아서니 명함크기만한 봉투를 내밀었다. 뭐냐고 묻자, 사장님이 드리라고 한다는 말만 남기고 여직원은 총총 안으로 가버렸다. 조금 의아한 기분으로 봉투를 주머니에 넣으며 하늘을 바라본다. 벌써 때 이른 가을 저녁노을이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다.차에 돌아와 봉투를 열었다. 핑크색 주유권 한 장이 들어있다. 보너스 카드 포인트로 주유권을 받은 적은 있지만, 손으로 내용을 적은 주유권을 받기는 처음이다. 사무실에서 직접 주면, 내가 곤란해 할까 봐 배려하는 친구의 마음이 느껴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이다. 하지만, 마음 한편이 편치만은 않았다. 만나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동정(同情)이라도 바라는 태도를 그에게 보이지는 않았나 하는 염려 때문이다.친구 사무실에서의 상황을 되돌아본다. 내 차림이 종전과 다른 것은 없다. 방문목적도 내가 활동하고 있는 문학단체의 동인지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대화도 내 문학 활동에 관한 이야기와 친구의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짧은 시간 나누었을 뿐이다. 오가는 말 중에 경제적 어려움을 말하거나, 평소와는 다른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러니 친구는 내 태도를 보고 주유권을 선물한 것 같지는 않다.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는 호의를 베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정리되니 고맙고 즐겁다.친구의 사무실엔 이런저런 일로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들르게 되었다. 갈 때마다 그는 비서를 시켜 주유권을 선물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이 교차하기도 했다. 그러나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마음이 두 갈래로 갈리는 현상을 자각해 갔다. 한마음은 ‘그래. 전에 내가 친구 회사와 거래할 때, 주유권에 비교되지 않을 이익을 안겨주었는데 뭐 대수이랴’하는 마음이다. 다른 마음은 ‘아니야. 그건 정당한 거래였으니, 주유권과는 무관한 거야. 그러니 주유권에 담은 친구의 따사한 마음은 참 고마운 일이지.’하는 마음이다.지난봄 코로나19 사태로, 소위 재난지원금이란 공짜 돈을 정부로부터 덥석 받았다. 우리 부부 두 사람 몫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나랏빚을 늘려서 국민에게 지급한 것 같다. 우리 집의 경우, 늦은 나이에도 일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빠듯하게 살아도 그 돈이 가계에 큰 보탬이 되지는 않았다. 공짜라 꼭 필요치도 않은 것 몇 가지 사니 금방 다 없어졌다. 그 때문에 우리 집은 공짜심리로 과소비가 되었지 싶다. 어쩌면 정부의 숨은 의도도, 돈을 돌리기 위한 과소비 조장이 아니었을까.주유권 선물을 받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시나브로 생각도 않던 바람(望)이 마음에 자리 잡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친구 사무실에 가려고 마음먹으면, ‘오늘도 주유권을 주려나’라고 속으로 은근히 바라고 있는 자신을 만나곤 했다. 기실 그 무렵은, 조기퇴직 후 시작했던 1인 사업이 신통치 않아 휴업 상태였다. 자연히 차를 쓸 일도 줄어, 친구가 준 주유권이 거의 수요를 맞추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가계에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튼 친구에게 주유권을 받을 때마다, 고마우면서도 찝찝한 무언가가 마음 바닥에 하나씩 가라앉는 것 같은 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짐이 아닌데도, 짐같이 느껴지는 아이러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란 속담이 떠오르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무언가 출구전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짙어갔다.신통치 않던 사업수익마저 끊어졌다. 그때 기술 자격으로 취업하라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취업사이트에 한동안 부지런히 이력서를 냈다. 제법 시일이 흐른 후 다행히 취업하였다.친구 사무실에 갈 일이 생기자, 우선 생각나는 것이 핑크색 주유권이었다. 재취업하였으니 고마운 주유권은 그만 받겠다고 정중히 사양하여, 마음의 짐을 덜었다. 핑크색 주유권이 핑크빛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정부의 공짜 돈은, 국민의 세금으로 의타심도 얹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친구의 주유권은 자기 것을 나누어주는 사랑의 핑크빛 징표로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다.오늘 저녁에도 핑크빛 하늘이 열리겠지.

2020-10-28

타자기를 추억함

노트북 키보드가 흠집투성이입니다. 자주 누른 글쇠는 보호막 비닐이 너덜거리는데다 글자 표식마저 벗겨져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닳은 정도에 따라 어떤 글쇠가 혹사를 당했는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각각 왼손 검지와 중지가 맞닿은 ‘ㄹ’과 ‘ㅇ’의 윗면은 허옇게 까졌고, 오른손 중지가 관장하는 ‘ㅏ’ 글쇠자리는 영어 자판 ‘K’ 안내 글자가 사라지고 없을 지경입니다.오래된 노트북도 아닌데 키보드가 이렇게 너저분하게 된 것은 오래된 습관 때문입니다. 저는 손바닥을 키 판에 대지 않고 허공에 띄운 채, 손가락을 세워 자판을 내리찍는 편입니다. 자연스럽지 못한 이런 타격법은 손목에 힘이 들어가 타이핑 소리도 시끄럽습니다. 손톱에도 힘이 실려 글쇠판이 쉽게 긁힙니다. 이런 방식은 수동식 두벌 타자기를 칠 때 유용합니다.제 이십대의 글자 생활은 두벌 타자기의 나날이었습니다. 대학시절 한때 한글 운동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모임의 취지는 순우리말을 아끼고 퍼뜨리는 데에 있었습니다. 한자어가 칠십 퍼센트 이상인 게 우리 모국어의 현실인데, 순우리말을 고집한다는 것은 코미디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청춘의 열정과 우정으로 그 활동을 즐겼습니다. 지금은 생각조차 나지 않는, 한글 운동의 여러 행동강령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글자 생활을 기계화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또한 미적 감각을 지닌 문자인가를 기계화를 통해 널리 알리자는 취지였지요.개인용 컴퓨터가 일반화되기 전인 그때 글자 생활의 기계화란, 타자기를 활용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도 거창한 슬로건이었지요. 하지만 실제 글자 생활을 기계화하는 회원은 흔치 않았습니다. 절실하게 와 닿지 않은 면도 있었고, 무엇보다 주머니 사정이 타자기를 구할 만큼 넉넉지 않았지요. 그럴수록 그 모토가 제겐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행동강령을 실천하는 차원이라기보다 타자기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댔던 것 같습니다. 이미 서구 작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타자기가 선사하는 경쾌한 터치감의 글 너울을 맘껏 타보고 싶었습니다. 자판 위에 손끝을 올리는 상상만으로도 얽힌 상념들이 흰 종이 위에서 사유의 길을 내는 것만 같았습니다.학교 정보센터 타자 교실에 등록을 했습니다. 수업이 없는 시간마다 들러 자판을 익혔습니다. 낱개였던 자모음이 유의미한 문장이 되어 꼬리를 잇는 게 신기하고 뿌듯했습니다. 창가 자리에 앉아 더듬더듬 자판을 익히는 그 짬 속으로 희망이라는 빛이 스며드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럴수록 타자기를 갖고 싶다는 열망은 더했습니다. 지금처럼 아르바이트 거리가 쉽게 나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주머니 사정은 늘 빈궁했습니다. 타자기를 산다는 건 제 깜냥으론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음을 읽은 큰오빠가 크로바 두벌식 중고 타자기를 사들고 왔습니다. ‘열심히 써봐라.’ 타자기 케이스를 열어 주던 큰오빠의 무심한 듯 따스한 눈길.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지요. 그렇게 타자기는 제 보물 1호가 됐습니다.종이를 롤러에 끼우고 원하는 자판을 두드립니다. 글자쇠막대가 잉크 묻은 리본 위를 건반처럼 때립니다. 촬촬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자를 만들어내는 해머의 타격감은 지금 생각해도 무척 낭만적입니다. 종성용 자음을 칠 때는 왼쪽 아래에 있는 ‘받침’이란 누름쇠를 누른 뒤 해당 자판을 눌러야 합니다. 초성에 쓰였던 글자가 받침자리로 옮겨져 타이핑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받침 글자가 중앙으로 쏠려 묘한 듯 매력적인 두벌식 타자 특유의 서체가 나옵니다. 한 줄 글이 다 써지면 왼쪽에 달린 레버를 밀어 종이 위치를 중앙으로 옮겨 주면 됩니다. 오타가 나면 타자용 흰 물감지우개를 글자 위에다 덧씌우고 다시 타건하곤 했지요. 청아한 쾌감을 지나 숙연한 의지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그 정신적 사치를 꽤 즐겼습니다. 저만의 보물인 크로바 타자기로 우리말을 갈고닦거나(?) 리포트를 작성했으며 단상도 끼적였습니다.김살로메소설가타자기의 자판을 두드리려면 손가락 각도를 가파르게 한 채 손끝에다 힘을 실어야 했습니다. 지금의 키보드처럼 평면이 아니라 계단식 글쇠판이라 글자를 누르는 동안 손바닥은 항시 허공에 떠있어야 했지요. 오래된 이 습관이 타자기 시대를 접은 지금까지 이어져 키보드에다 생채기를 내는 것이지요.버리기 좋아하는 저는 이사를 핑계로 많은 물건을 버렸습니다. 크로바 타자기도 예외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버린 것에 대해 좀처럼 후회하지 않는 편이지만 가끔은 그것이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타자기의 나날과 함께 했던 소박한 열정이라는 연결고리가 쉽게 버려질 수 있는 건 아니겠지요.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그때를 떠올리며 뒤늦은 마음의 자판을 눌러 봅니다. ‘추억추억’하며 글자가 종이에 박히는 동안, 공중에 뜬 두 손바닥 사이로 파노라마처럼 한 시절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2020-10-28

미워하여 행복할 수 있을까?

장규열 한동대 교수당신은 잘살고 있는가. 어떻게 해야 잘사는 것일까. 부귀영화를 누리며 만수무강하는 삶, 모두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을까. 1975년에 62세였던 기대수명이 오늘은 83세가 되었다. 일인당 국민소득은 1975년에 600불을 겨우 넘겼었는데 오늘은 3만불에 육박하고 있다. 스무 해도 더 오래 살게 되었으며 오십 배나 더 많이 버는 셈이 아닌가. 그 어떤 잣대로 견주어 보아도 손색이 없는 국격을 지니게 된 오늘, 우리는 행복한가 다시 물어야 한다. 겉으로 보아 모자람이 없는 조건 속에서 어째서 우리는 아직껏 만족하지 못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어느 산사(山寺)에 큰불이 났다. 까닭을 찾고 보니 어느 여인의 방화였다고 한다. 다른 종교를 믿는 그는 우상을 섬기는 절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게 아닌가. 미움으로 가득한 그 마음으로 남의 종교를 말살할 작정이었는가 보다. 사회 규범과 법적 통제가 있어 제어할 수는 있겠으나, 우리 종교계는 이런 혐오범죄에 어떤 의견을 가지는지 궁금하다. 종교는 미움을 가르치는가 아니면 사랑을 가르치는가. 종교가 혐오를 바로잡지 않는다. 미워하고 배척하는 태도를 종교만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진영을 갈라 싸우는 일에 능한 정치는 백성들을 자기편에 세우기에만 최선을 던진다. 날마다 지지율을 확인하며 세를 불리기에 집중하느라 나라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정치도 혐오를 바로잡을 생각이 없다.미움은 자란다. 시간이 지나며 혐오의 수렁은 깊어가고 표현의 강도는 짙어진다. 미워할 까닭을 배우고 익히며 다지고 훈련하여 행동에까지 이른다. 진행 중인 미국의 대선판에도 혐오와 테러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급기야 해외 공관들에게 선거 전후에 있을지도 모를 폭력사태에 대비하라는 훈령이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미국 사회가 어떻게 치유와 회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혐오의 늪에 빠진 개인은 위태롭고 미움에 물든 사회는 위험하다.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 전에 사회적 각성이 있어야 한다.국민은 피곤하다. 정치와 종교가 만들고 퍼붓는 사회적 혐오에 지친다. 정치가 편안한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가 부끄럽다. 종교가 평온한 개인을 회복해 주리라는 희망도 허망하다. 남 탓에만 익숙한 ‘내로남불’이 식상하고 자신은 돌아보지 않는 ‘후안무치’에도 기가 질린다. 부귀영화와 만수무강을 누리면서 선진국에 살아도 행복하지 않은 까닭이 혹 ‘미움’ 탓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좀 부드러운 시선과 따듯한 마음이 필요한 게 아닐까. 각자의 부족함과 허술함에 겸허하며 남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그동안 부수고 깨뜨려 정복하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면, 이제는 보듬고 다독이며 함께 쌓아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완전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며 완벽한 사회는 지구상에 없다. 주어진 환경에 오늘의 최선을 함께 던져야 한다. 미워하여 행복할 방법은 없다.

2020-10-28

주식리딩방 주의보

주식리딩방은 자칭 투자전문가가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 등을 통해 투자자문을 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곳을 말한다.문제는 주식리딩방이 금융감독원의 엄격한 규제를 받는 투자자문업자와는 달리 불특정 다수인을 대상으로 간행물, 출판물, 통신물, 방송 등을 통해 대가를 받고 단순한 투자조언을 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유사투자자문업자’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이들은 ‘고수익 보장’ ‘연간300% 수익’ 등과 같이 소비자들이 혹할만한 문구를 내세워 유혹하거나 연예인이나 유명인을 광고모델로 내세우기 때문에 외관만을 믿고 유료회원으로 가입했다가 큰 손실을 입고 계약을 해지하는 사례가 많다.주식리딩방을 이용할 때는 우선 금융감독원에 신고된 유사투자자문업체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금융감독원 소비자정보포털 ‘파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금융감독원에 신고된 유사투자자문업체라고 하더라도 금융에 대한 전문성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유사투자자문업자의 경우 전문인력을 보유해야하는 요건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위 ‘주식리딩방’을 운영하는 운영자가 일반 개인인 경우 전혀 전문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유사투자자문업자는 법적으로 일대일투자자문을 할 수 없고, 오직 불특정 다수인을 대상으로 금융상품에 대한 투자조언만 가능하다. 상담게시판이나 카카오톡 등 대화방을 통해 특정 주식에 대한 추천을 하거나, 전화를 이용한 매수·매도 권유는 모두 불법이다.수수료의 환불조건, 환불방법 등도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피해를 입었다면 금융감독원 유사투자자문피해신고센터에 신고하면된다. 금융감독원 홈페이지를 통해 신고하면 연2회 심사를 통해 건당 최고 200만원의 포상금을 받을 수 있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10-28

포스트 자유학년제 준비를!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아빠,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 학교에서는 1분이 1시간보다 더 길던데 ….!”월요일 아침 일찍 깨워달라고 한 중학교 1학년 아이가 일어나면서 한 첫마디다! 알람 소리를 사이렌 소리로 할 정도로 등교에 대한 의지가 강한 아이지만, 잠에는 장사가 없었다. 그래도 잠시 뒤척이더니 벌떡 일어나서 2주 만의 등교 준비를 하였다.출근 준비를 하다 달력을 보았다. 한 주밖에 남지 않은 10월이 필자를 처연하게 보고 있었다. 달력에서 제일 먼저 마음에 들어온 것은 “상강(霜降)”이었다. 출근길에 상강을 생각했다.상강은 가을의 마지막 절기이다.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라는 속담처럼 차창 너머 들판에는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멀리서도 농부의 콧노래가 들리는 것 같아 손장단을 쳤다. 내년을 위해 숨 고르기에 들어간 추수를 끝낸 들판을 지날 때는 손이 더 경쾌하게 움직였다. 자연과 함께 하는 출근길은 늘 즐겁다. 끝은 시작이라는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하는 자연이 필자에게 화두를 던졌다. 핵심은 “준비”였다.“아빠, 내년부터 시험 보는 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정말 많아.”코로나 19 때문에 모두가 힘들지만, 가장 큰 혼돈을 겪는, 또 겪을 층은 현 중학교 1학년이다. 중학교 1학년은 자유학년제에 해당하는 학년이다. 하지만 등교일 자체가 얼마 되지 않기에 중학교 1학년들은 자유학년제 프로그램은커녕 중학교 생활 자체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 경험 부족은 당연히 이해 부족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해 부족은 부적응을 낳을 것이 뻔하다.자유학년제를 지낸 학생들은 자유학년제 전후 학교생활은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자유학년제는 취지만 보면 교육계의 문명(文明)과도 같은 제도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자유학년제 해당 학년은 문명 이후의 삶이라면, 자유학년제가 끝난 학년의 삶은 문명 이전의 혼돈의 삶이다.교육 수요자는 자유학년제 때문에 힘들다고 하는데, 교육 당국은 연계학기(년)제라는 말도 안 되는 제도를 예로 들면서 괜찮다고만 한다. 과연 학교 현장에서 자유학년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시행할 수 있는 교사가 몇이나 될까? 필자는 오래전부터 서열경쟁 중심의 교육과정 속에서는 자유학년제는 절대 불가능한 제도라고 계속해서 외치고 있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그래도 또 제안한다. 자유학년제를 지속하려면 학생들이 자유학년제 이후의 중학교 생활을 준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학생들이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바로 학교 정규 시험이다. 그러니 중학교 1학년 11월부터는 자유학년제의 이상을 거둬내고 학생들이 대한민국 학교 현실에 적응할 수 있도록 1학년 정규 시험 기간을 두자. 이런 준비도 없이 그냥 학생들을 중학교 2학년으로 진급시키는 것은 무책임을 넘어 범법 행위이다.사교육 현장에서는 “수학은 대학을 결정하고, 영어는 직업을 결정한다.”라고 학생들을 세뇌하고 있다. 이 말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초등학교 8학년인 내년 중학교 2학년이 걱정이다.

2020-10-28

가짜편지

김규종 경북대 교수며칠 전 삼성 이건희 회장이 별세했다. 숱한 화제를 뿌리며 한국 사회를 쥐락펴락했던 인물. 언젠가 노무현 대통령이 “이제 권력은 시장(市場)으로 넘어갔다”고 일갈했을 때, 시장이 뜻하던 바는 삼성. 삼성 총수가 6년 넘도록 투병하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이 10·26과 하루 차이라는 우연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절대권력도 엄청난 돈도 결국에는 죽음 앞에 무의미해진다는 자명한 사실.그들도 사랑 때문에 밤을 새우거나 가슴이 아파 몇 날 며칠 두문불출 괴로워한 일이 있는지, 궁금하다. 18년 권력을 휘둘렀던 전직 대통령과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면서 이 나라 삼척동자도 아는 재벌총수. 그들이 사랑하는 여인으로 번민의 밤을 하얗게 밝혔을지, 그것이 알고 싶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김수영 시인처럼 나는 왜 사소한 일에 관심이 있는지 모를 일이다.그의 죽음에 즈음해서 가짜편지가 시중에 떠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가 손수 썼다는 편지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아프지 않아도 해마다 건강검진 받아보고, 목마르지 않아도 물을 많이 마시며”로 시작하는 장문의 편지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양보하고 베푸는 삶을 설교하는 대목도 이채롭다.사람의 가치가 비싼 옷과 자동차와 집이 아니라, 건강한 몸이라고 설파하면서 만족할 줄 알라고 편지는 충고한다. 중간 이후는 스스로 자책하면서 늙고 젊은 사람들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무한한 재물추구는 나를 그저 탐욕스러운 늙은이로 만들어 버렸어요. 내가 한때 누렸던 돈, 권력, 직위가 이젠 그저 쓰레기에 불과할 뿐….”자신의 성취와 소유를 이토록 강렬하게 부정할 줄 아는 비판능력의 소유자! 편지를 읽으면서 곳곳에서 나는 전율했다. 그리고 ‘좋아요’를 눌렀다. 젊은이들은 너무 황망히 서둘러 살지 말기를, 나이든 축들은 행복한 만년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라는 가르침. 내가 알던 재벌총수 이건희와 너무도 다른 모습에 당혹스럽기도 했다.삼성은 편지가 가짜라고 확인한다. ‘에휴, 그러면 그렇지!’ 하는 아쉬움과 허망함이 동시에 몰려온다. 숱한 불법 탈법 무법 초법(超法) 위법을 감행하면서 거대재벌 총수로 등극한 사람이 저리 자상하고 따뜻한 인물이었다니, 하는 희열의 순간은 아주 짧았다. 만일 우리나라 유수의 재벌 가운데 누군가 저런 편지를 유훈으로 남기면서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빌 게이츠 같은 사람 말이다.가짜로 드러났지만, 많은 사람이 감동과 기쁨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도록 한 편지는 오래도록 인구에 회자(膾炙)될 듯하다. 우리의 확증편향과 선택적 기억을 단박에 날려버리는 청량한 한줄기 소낙비 같은 편지였으므로! 가짜도 이런 가짜는 닦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나뭇잎처럼 말이다. 하나의 시대가 조용히 저물고 있다. 21세기가 흘러간다, 붉게 물든 단풍잎처럼!

2020-10-28

인재경영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가 선정한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 10인 중 한 명이다.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인재로 그는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의사, 천문학자 등 수많은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가 남긴 대표작 ‘모나리자’ 하나만으로 그의 천재성은 충분히 입증된다.보통 천재라 함은 “선천적으로 남보다 월등히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하지만 심리학계는 이를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하나는 표준화한 지능검사 결과, 보유능력이 뛰어난 인물을 가리킨다. 미국의 심리학자 터먼은 지능지수 140 이상을 잠재적 천재로 보았다. 그 숫자는 전체 인구의 0.4%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또 하나는 실제 업적에서 나타난 높은 수준의 창조적 능력을 말한다. 천재는 독창성과 창조력, 사고력을 필수적으로 지녀야 하며 미개척분야를 개척함으로써 그 속에서 가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본 것이다.‘네이처’지가 선정한 역사상 세계 최고의 천재로 꼽힌 인물치고 빛나는 업적이 없는 이는 없다. 독일 문학 최고봉을 상징하는 괴테나 영국이 낳은 극작가 셰익스피어, 상대성 이론의 아인슈타인, 미켈란젤로, 뉴턴 등등 그 어느 누구도 천재라 불러도 어색지 않는 인물이다.한 사람의 천재성이 지구와 인류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에 반론할 이유는 없다. 지난 25일 타계한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의 인재경영론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천재 1명이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그의 철학은 지금 삼성을 세계 최고 기업으로 만든 원동력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도 사람이 하듯 인재중시 경영의 가치는 앞으로도 존중돼야 할 경영지표다./우정구(논설위원)

2020-10-27

고종 황제의 친일 행각을 다시 본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아직도 이 땅에는 친일 문제가 청산되지 못했다. 과거 친일을 논할 때 한일합방에 앞장선 소위 박제순, 이완용 등 매국에 앞장선 을사오적을 혹독히 비난했다. 친일 인명사전 발표 후 친일의 범위는 대폭 확대됐다. 백선엽이 등장하고 ‘토착왜구’가 회자되는 오늘의 현실이다. 을사조약 전야의 고종의 무능과 친일 행적이 드러나고 있다. 한말 고종의 일본정부의 뇌물 수뢰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말의 고종의 친일 행적을 찬찬히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국정 최고 책임자 왕의 책무를 되새겨 보기 위함이다.한일합방 전후의 고종의 정세 판단 능력이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임란 시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세워 조선을 침공한 일본을 막지 못한 선조보다 못한 그의 처신이다.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에 이어 러일전쟁 초 일본군의 창덕궁 진입까지 허락했다. 일본의 노일 전쟁의 승리는 미일간의 소위 ‘가쓰라-테프트 밀약’으로 이어졌다. 고종은 이 밀약대로 필리핀은 미국이, 조선은 일본이 분할 통치하는 사실도 몰랐다. 고종은 당시 일본과 미국이 조선을 보호한다고 믿었으니 정말 무능의 극치다. 고종은 당시 밀약의 추진자 미 대통령 루즈벨트의 딸의 조선 방문 시 극진히 대접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고종이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 일주일 전 일본 공사로부터 뇌물 2만원을 받았다. 현재 우리 돈 25억원에 이르는 거금이다. 수뢰 명목은 대사 이토오 히로부미 접대비로 되어 있다. 대표적인 친일 관료 박제순 1만5천원, 이완용은 1만원, 관료들도 친일 행적에 따라 3천원에서 5천원 씩 받았다. 일본 왕실의 주한영사 기록 24권(1905년 12월11일)에 기록된 내용이다. 고종은 그해 3월 31일 일본 특사로부터 당시 경부선 철도 지분과 함께 뇌물 30만 엔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1904년 당시 영국 외무부 자료) 모두가 충격적인 사실이다. 당시 왕실의 뜻있는 관료들은 고종의 친일적 행위를 반대했다. 당시 의정 참정 한규설은 고종의 을사조약 체결을 적극 반대하다 파면됐다. 고종은 매국노 박제순을 그의 자리에 앉혔다. 당시 의정부 참찬 이상설은 박제순의 의정 서리 임명에 울분을 참지 못해 연해주 망명길을 택하였다. 원로대신 조병세는 왕에게 읍소하다 파직되고 민영환 역시 울분을 참지 못해 자결했다. 고종은 갑신개혁의 김옥균의 시신까지 찾아 응징했다. 매국관료들은 승승장구하고 이를 상소한 충신들이 파직되는 상황에서 나라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우리 역사는 을사오적은 비난하면서도 이들을 비호한 고종만은 비판하지 않았다. 조선의 마지막 왕에 대한 동정의 발로였을 것이다. 해외의 애국지사들은 멀리 망명지까지 고종을 모셔오기로 결심했다. 해외 연해주에서도 상해 임정에서도 고종의 구출 작전까지 세웠다. 일본 총독부의 엄격한 감시로 모두 좌절됐다.고종 장례 일에는 한성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성통곡하는 행렬이 이어져 3·1 만세 시위로 변했다. 고종의 친일 행적을 모르는 순진한 민초들의 눈물이었다. 무정한 역사는 숨겨진 비밀만은 감추지 못하는 법이다.

2020-10-27

깡 신드롬과 환불원정대를 탄생시킨, 댓글 ‘판’ 짜는 MZ세대

사회적 거리 두기의 영향으로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플랫폼의 시장이 더욱이 급성장하고 있다. 나 또한 하루에도 적지 않은 시간을 스트리밍 플랫폼에 사용하고 있는데, ‘넷플릭스’의 시리즈물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는 이미 본 것이라도 습관적으로 틀어 놓는 편이다. 영화가 보고 싶을 땐 ‘왓챠’ 서비스를 애용하고, 연재 중인 만화를 다시 보고 싶을 땐 ‘라프텔’을 이용하고 있다.OTT 플랫폼인 ‘디즈니 플러스’는 최근 ‘그룹 스트리밍 서비스’를 공개했다. 그룹 스트리밍 서비스란 각기 다른 곳에 있는 이용자들이 같은 영상을 보며 실시간으로 댓글을 나눌 수 있는 서비스다. 가까운 지인이나 연인과 함께 장소나 시간의 구애 없이 영화와 TV쇼를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실제로 한 공간에서 수다를 떠는 듯 흥미롭고 생각보다 영화의 몰입도 또한 나쁘지 않다. 최대 7명까지 시청할 수 있으며 PC나 모바일, 스마트 TV에서 사용할 수 있고, 영화의 몰입감에 방해된다면 이모티콘을 사용해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다.‘넷플릭스’와 ‘왓챠’도 그룹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한다. ‘넷플릭스 파티’는 크롬 기반의 웹브라우저를 통해 URL을 생성하고, 공유 링크를 통해 이용자가 접속해 같은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다. 채팅방에 입장한 모든 이들이 동영상을 멈추거나 돌려볼 수 있으며 실시간 채팅도 가능하다. 각자의 공간에서 함께 보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 새롭고도 안정된 시청 환경을 느낄 수 있다.‘왓챠 파티’ 또한 공유 링크를 통해 이용자들이 입장할 수 있다. 왓챠에서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를 왓챠 파티로 감상할 수 있어 영화 감상 모임을 꾸리거나 아이돌 영상을 찾아보는 특정 팬덤이 만나 작은 콘서트를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언택트 시대에 걸맞은 색다른 소통법이자 함께 콘텐츠를 공유하고 교감하며 늘 플랫폼으로 연결되어 있는 MZ세대의 소통법과도 무척 닮았다.그룹 스트리밍 서비스는 게임 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인 ‘트위치’가 앞서 시작했다. 게이머는 스트리머(Streamer)로 불리며, 스트리머가 게임을 하면 실시간으로 시청자들은 댓글을 달며 소통에 참여한다. 게임을 이기는 조건으로 후원금을 걸거나 특정 행동을 주도하는 등 흥미 요소를 일으키고 분위기를 이끈다.댓글 달기는 혼자가 아니라 다 함께 즐기고 교류하며 MZ세대 사이에서 하나의 놀이 문화로 자리 잡았다. 콘텐츠를 그저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댓글 문화의 영향력은 상상이상으로 크다. 가수 비는 지난 2017년 미니 앨범 ‘MY LIFE愛’의 타이틀 곡 ‘깡’을 발표했다. 음원을 발표한 당시 일관성 없는 가사와 독특한 안무로 혹평을 들으며 빠르게 묻혔지만 호박진서연이란 유튜버가 1일 1깡 챌린지(하루에 한 번씩 춤을 추는 )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이후에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했다. 비의 춤을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우스꽝스럽게 춘 것인데 의외로 이 동영상에 많은 이들이 몰렸다.그들은 오히려 역대급 혹평에 관심을 가지며 댓글을 달았고, 댓글에 대댓글을 달아 동조하며 또 하나의 재미를 만들어 냈다.비의 노래 제목인 ‘깡’에 걸맞게 ‘깡’으로 끝나는 과자 제품 광고를 찍어야 한다는 댓글에는 실제로 의견이 반영되어 과자 회사의 마케팅으로 활용됐다. 가수 비에게 제2의 전성기라 불릴 만큼 새로운 밈(meme)을 일으켰다.MZ세대는 센스 있고 재미있는 댓글을 발견하는 ‘댓글 맛집’ 영상을 찾아다닌다.올해 초 ‘숨듣명’이라는 유행어를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숨듣명이란 ‘숨어 듣는 명곡’이라는 뜻으로 나에게는 명곡이지만 밖에 나가 듣기에는 꺼려지는 노래를 일컫는다.주로 2010년대 발표작이며 독특한 음과 난해하고 모순적인 가사로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노래가 주를 이룬다. 비의 ‘깡’을 시작으로 제국의 아이들의 ‘마젤토브’, 틴탑의 ‘향수 뿌리지마’, 유키스의 ‘만만하니’ 등 발표된 당시 잠잠했던 곡들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해당 영상뿐만 아니라 반응이 좋은 동영상의 댓글을 모은 ‘댓글 모음’ 콘텐츠는 현재까지도 성행하고 있다.숨듣명은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문명특급’은 숨듣명 콘텐츠로 MZ세대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2010년 전후 당시 괴작 취급을 받았던 가요를 재발굴해 새롭고도 신선한 콘텐츠를 이끌어 냈다는 평을 받았다.MZ세대는 2010년 전후에 즐겨 들었던 가요를 중심으로 추억 여행을 한다. 노래가 출시되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노래 가사와 얽힌 웃긴 일화를 댓글로 공유한다.여기에 B급 정서의 노랫말과 일반인은 소화하지 못 할 가수의 의상, 한때 유행이었던 패션 소품을 보는 재미를 나눈다. 그간 완벽한 발라드곡에 지친 이들이 심플한 댄스곡이나 B급 감성이 느껴지는 단순한 곡을 선호하는 것 같다는 의견도 있다.그렇게 MZ세대는 콘텐츠를 소비하며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그들만의 ‘판’을 짠다. MBC ‘놀면 뭐하니?’의 회심작 그룹 ‘환불원정대’는 SNS의 댓글에서 시작되었다. 한 댓글인은 한 때 가요계를 대표했던 여성 가수와 현재 강한 인상으로 트렌드를 이끄는 가수를 모아 환불원정대의 데뷔를 제안했다.댓글을 본 가수 이효리의 긍정적인 반응으로 인해 엄정화, 이효리, 제시, 화사 등 4명의 가수가 빠르게 모여 그룹이 탄생했다. 환불원정대는 데뷔 과정으로 예능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의 관심과 주목 속에서 화려하게 데뷔했다.MZ세대는 어디에서나 그들만의 판을 다양한 콘텐츠로 이끌어 가고 있다. ‘에브리타임’은 전국 대학생의 휴대폰에 하나씩은 꼭 깔려 있는 애플리케이션이다. 대학교 시간표 스케줄을 보기 쉽게 정리할 수 있으며, 여기에 대학교 커뮤니티의 역할을 겸하고 있어 대학생들 사이에서 이용률이 매우 높다.앱을 사용하여 휴대폰 배경화면에 시간표를 띄울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학점 계산기, 강의평 열람도 가능하다. 주로 사용하는 건 커뮤니티인데 그들만의 강의 후기를 공유하거나 취업 이야기, 편입 상담, 스터디 모집, 중고 서적 거래, 드라마 추천, 물건 나눔 등 고루 이루어진다.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익명성이 보장되는 댓글 문화 덕분에 자신만의 경험이나 노하우 등을 빠르게 공유한다. 학교별 커뮤니티의 경우 이메일로 재학생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정보를 나누는 댓글은 신뢰도가 높다.콘텐츠를 소비하는 이들이 만드는 문화의 비중이 중요해졌다. 참신하고 독특한 문화의 새로운 방향성은 환영이지만 익명성에 기대어 차별과 혐오의 장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도 하지 못할 말은 아무에게도 아무 곳에서도 하지 말자.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가는 문화가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2020-10-27

담벼락

공간을 둘러막기 위해 흙이나 돌, 벽돌 등으로 쌓아 올린 것을 담이나 벽이라 한다. 영역을 보호하고 표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벽을 만들기도 하고 독립된 공간에서 외부와 단절의 안식을 갖고자 하는 목적도 있다. 종종 아주 미련하여 어떤 사물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하여 담벼락이라 하기도 한다. 담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꽉 막히고 답답하니 그렇게 비유된다. 이렇듯 담벼락은 자신을 보호하기도 하고 영역을 표시하기도 하지만 자의에 의한 단절과 고립의 용도이기도 하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본능을 최대한 잘 나타내는 것이 담벼락이라고 할 수 있다.현대의 담벼락은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었다. 예전과 달라진 특징 중에 두드러지는 것은 소통을 배려한 형태의 담벼락이다. 수많은 정보와 간접 경험의 기회가 풍부해진 현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 조건 중의 하나가 소통이기 때문이다. 소통에 적극적이어야 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적절히 편승하는 것이며, 소통을 통해 신속하게 정보를 습득하는 것은 존재감과 사회적 위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인간은 소통과 자의적 고립의 양립 선상에서 숱한 고뇌와 번민에 빠지게 된다.나는 담벼락의 형상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을 통해 소통과 자의적 고립 사이에서 고뇌하는 현대인의 다양한 본능을 탐색하고 기록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의 외적 형상이 무엇을 표현하려 하는지 무엇을 감추려 하는지 어렴풋이라도 알게 되리라 기대해본다. /박의희(사진작가)

2020-10-26

지는 노을 바라보며

얼마 전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편과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멋진 노을을 보았다고. 그 자리에서 차를 세우고 노을을 보고 싶었지만, 배고픈 남편이 차를 세우지 않고 통과해버려 아름다운 노을을 놓치고 말았다고.문득 호주에서 살 때가 생각났다. 아침에는 학교에 다니느라 도시락 싸서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다녔었고, 주말에는 나를 먹여 살리느라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다. 그래도 평일 오후에 집 근처 달링하버에서 산책을 할 때면 노을 지는 풍경을 가끔 바라보곤 했었다. 붉은 해가 뒷걸음칠 때면 그리운 가족들, 보고픈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울음을 삼키곤 했었다. 어린 마음에도 엉엉 우는 건 남들에게 보이고 싶진 않았던 거 같다. 주말마다 가족들과 통화를 할 때면 그저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하루하루가 행복하다고 했었다. 여행할 때마다 해넘이를 보며 넋을 놓았던 것도 그때의 어린 내가 생각나서였다.며칠 후, 아침부터 흐린 하늘이 나를 우울하고 멍하게 만들었다. 지인과 함께 노을을 보러 떠났다. 포항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칠포해수욕장 입구였다. 주말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나다니던 바닷가였는데, 지인의 놀라운 관찰력과 세심함에 한 번 더 놀랐다. 지나가던 나이든 남자도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역시 무덤덤한 아저씨조차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노을 명소 인가보다.칠포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강에 노을이 내려앉았다. 하루 일을 마치고 서산으로 귀가하는 태양의 모습만으로도 우리들의 발길을 사로잡고도 남는데, 그 모습이 강물에 반영돼 노을의 모습이 두 배가 되었으니 감동이 두 배였다. 바람 한 점 없어서 더 풍경이 아름다웠다. 강물이 바다에 진입하기 전에 또 하나의 임무를 완수하고서 강이라는 이름을 반납하고 바다가 되었다. 오랫동안 말없이 노을을 바라보았다. 20대의 내가 40대를 준비하는 나에게 그동안 잘살았노라고 붉을 노을로 토닥여주고 있었다./엄민재(포항시 북구 삼호로)

2020-10-26

꽃에게서 배운다

꽃을 키우다 보면 항상 먼저 꽃망울을 터트려 기쁨을 주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른 애들이 한창 필 때쯤엔 처음에 핀 꽃들은 시든다. 당연한 결과이리라. 처음 보여준 고마움에, 미련에 시들어 가는 꽃대를 그냥 두면 꽃나무도, 시든 꽃도 피우려고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도 모두 힘들어진다. 그래서 부지런히 시든 꽃을 잘라줘야 한다.사람 관계도 마찬가지이리라. 친구 H의 아들이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1년 넘게 슬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들은 나도 가슴 아픈데, 지켜보는 엄마는 얼마나 속이 시릴까?살다 보면 꽃 피지 못 하고 사그라든 인연도 많다. 한때 꽃 피웠으면 그걸로 됐다. 토닥토닥 시절 인연이 다 했으니 힘들어하는 그 인연을 놓아 줘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인연의 꽃이 필 테니.나의 말을 듣던 K가 새 인연을 위해 놓아주어야 한다는 그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며 자신의 꽃을 떠나보낸 마음을 털어놓았다. 꽃나무 드라코를 기르다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죽어버렸다고. 나는 꽃을 죽인 게 아니라 화훼 농가를 살린 거라고 위로했다. 화훼 농장하는 언니가 해준 말이었다. 많이 죽여봐야 그다음에 잘 키운다는 덕담도 해주었더니 경제적 마인드로 자신을 위로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다.우리 집 옥상에 가을꽃이 한창이다. 소국이 퐁퐁 꽃을 피워 향기를 가득 내뿜고 키 낮은 채송화도 색색이 피어 존재감을 드러낸다. 힘든 일이 있으면 허리를 숙여 자신을 보고 웃으라는 듯 생글거린다. 이른 봄을 준비하는 동백은 몽오리를 한껏 만들고 있다. 백작약은 마른 잎을 더 말며 5월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인사를 한다. 목이 말라도 주인의 손길이 오기만 기다릴 뿐 생떼를 쓰지 않는다. 하지만 말 없는 꽃을 기른다는 것은 쉬운 듯 보여도 언제 목이 마른 지 추위를 타는지 자주 들여다보는 관심이 있어야 한다고 온몸으로 알려준다. 말수 적은 꽃에게서 오늘도 배운다./이홍숙(경주시 안강읍 갑산2리)

2020-10-26

할머니의 숟가락 사과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이가 몇 개 없으셨다. 내 기억에 할머니는 입술 밖으로 살짝 튀어나온 아래 송곳니 하나와 그와 비껴 달려 있는 윗니 두 개가 잇몸에 남아 있으셨다. 그런데 나는 모든 이가 멀쩡한데도 애늙은이란 별명처럼 딱딱한 음식은 잘 씹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내게 할머니는 사과를 깨끗하게 씻은 후 껍질째 사과를 반 쪼개서 할머니의 왼손바닥에 사과를 얹어 쥐시고는 밥숟가락으로 사과를 긁어주셨다.그렇게 숟가락으로 긁어주셨던 사과는 어찌나 달고 잘도 넘어가던지, 사과 반쪽이 순식간에 내 입속으로 꿀떡꿀떡 들어왔다. 과육이 숟가락에 반 정도 차면 입안에 침이 고이며 빨리 사과가 갈아지길 기다렸고, 그렇게 가운데 씨를 중심으로 사과는 위아래 꼭지를 빼고 껍질만 남아 그릇처럼 비워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쉬지 않고 사과를 갈아내셨던 할머니는 얼마나 손목이 아프셨을까 싶다. 그때의 내 모습은 마치 맛난 간식 앞에서 빨리 그걸 넘겨주길 바라는 댕댕이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할머니는 머리숱이 많이 남아 있지 않으셨는데도 정갈하게 쪽 머리를 하셨고 할머니의 물건 꾸러미에는 참빗이 있었다. 그리고 꽤나 오래 사용하신 듯한 낡은 은비녀를 쓰셨다.나는 아침에 할머니께서 쪽 머리를 하시기 전 풀어 내려진 할머니의 긴 머리 길이를 보고 놀랐고, 그 머리를 가지런히 참빗으로 빗으신 후 말아 올려 쪽지시는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봤었다. 우리와 늘 함께 사셨던 게 아니라 어쩌다 다니러 오시면 내게 사과를 갈아주셨던 할머니. 다 비워졌던 사과 껍질처럼 할머니의 몸무게가 가벼워지셨을 그 언젠가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가끔 사과를 보면 한번 숟가락으로 갈아 먹어볼까 하는 생각과 할머니께서 갈아주신 사과즙의 달콤함과 너무 어려서 뭔가 제대로 해드리지 못한 아릿함이 겹쳐진다./권현주(포항시 북구 장성동)

2020-10-26

내 삶에 의지와 모험을… 영주 희방사(喜方寺)

이른 아침 중앙고속도로는 안개로 자욱하고, 대형 전세버스들로 몸살을 앓았을 소백산 입구조차 한산하다. 붉게 물든 단풍과 상실의 눈물처럼 떨어지는 낙엽들, 소백산 가을잔치는 화려하고도 쓸쓸하다.희방사는 고운사의 말사로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두운이 창건하였다. 1850년 화재로 소실되어 강월이 중창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네 채의 당우와 보관되어 오던 월인석보 판목 등이 소실되었다. 다행히 주존불은 무사하여 두운이 기거하던 천연동굴 속에 보관하다가 1953년 중건한 뒤 대웅전에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희방사는 생각보다 작은 사찰이다. 보수 중인지 인부들이 자재를 옮기느라 경내는 분주하다. 일행은 여러 번 와본 절이라며 스치듯 등산로로 접어들고 나와 남편은 대웅전에 들러 삼배의 예를 갖춘다. 어수선한 절 분위기 때문인지 마음이 신산하다. 수런거리는 가을의 수다가 법당까지 흘러들어와 나를 유혹한다.서둘러 법당을 빠져나오는 발걸음이 편하지가 않다. 절 기행과 등산,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에 소백산은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다. 절 주변을 밝히는 단풍들과 시나브로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자꾸 나를 돌아보게 한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들으며 붉은 슬픔이 차오르는 숲으로 흐느끼듯 걸어 들어간다.가을 숲과 음악이 있어 행복하다. 하지만 계절에 대한 감탄도 잠시, 하늘은 멀미가 일 듯 단풍으로 출렁이고 산길은 점점 더 가파르다. 얼마 오르지 않아 아픈 다리와 거친 호흡으로 걸을 수가 없다. 산을 잘 타는 남편이 앞에서 잡아주고 호흡법을 가르쳐 주며 격려하지만 몸은 등반에 대한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가슴이 죄어오고 두통까지 몰려온다.내 곁을 떠나지 못하는 남편과 기다리고 있을 일행이 점점 부담스럽다. 지켜보는 눈들이 산행을 더 힘들게 한다. 중간중간 이정표는 까마득히 남은 거리를 제시하며 낙오자 하나쯤 자랑스럽게 내걸고 싶어 하는 눈치다.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명산으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작정 산을 오른다. 시야에서 벗어난 일행을 좇기 위해 산을 오르는 것도 같다.지금이라도 희방사로 내려가 스님을 뵙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그토록 황홀하던 단풍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나는 험난한 등산로 앞에서 괴로워하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싣고 사막을 달리는 낙타처럼 나 자신의 사막으로 달려가고 있다. 산을 오를수록 나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벤치가 있는 나무 아래에서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나를 위로하는 남편의 주름진 얼굴 위로 선득한 바람이 분다. 젖은 옷 속으로 스며드는 한기보다 더한 서글픔이 밀려든다. 가는 세월 앞에서 나는 무엇으로 위안 받기를 원하는가.연화봉 정상에 설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을지 모른다. 아름다운 시간은 덧없이 짧고 머지않아 닥칠 겨울은 길고 건조하리라. 무엇이 두려워 주어진 시간과 젊음을 포기하려고 하는가. 비록 정상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스스로를 극복하며 최선을 다하는 게 삶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든다.이른 점심을 챙겨 먹고 남편보다 먼저 폴대를 잡고 앞서 걷는다. 바닥을 보이던 체력은 놀랍게도 다시 힘이 난다. 일행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과 언젠가 다녀온 비로봉의 힘든 노정이 나를 옥죄었던 것일까. 몇 번의 난코스를 힘겹게 오르자 나는 지친 낙타에서 한 마리 사자로 변하고 있었다.육체적인 고통은 무감각해지고 길은 스승이 되어 나를 이끈다. 나와 길은 하나가 되기도 하고 때론 내가 길보다 앞서 걷는다. 거친 장벽과도 같던 산은 다양한 즐거움을 안겨주며 함께 걷는다. 고비를 극복하고 난 뒤에 안겨드는 희열이 좋다.“많이 힘들지요?” “힘내십시오.”마주치는 사람들이 건네 오는 격려에는 진심어린 온기가 담겨 있다. 정상을 밟고 내려오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이며, 같은 아픔을 맛본 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믿음과 위로이다.연화봉은 아직 멀기만 한데 능선에서 바라본 희방사는 한참이나 아래에 있다. 절은 작지만 또렷한 상징물이 되어 나를 격려한다. 어수선하고 산만하던 절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머리를 맞댄 당우들이 자기를 낮춘 채 소백산 품에 안겨 있다. 어떤 확고함으로 중심을 지키고 서 있다.조낭희 수필가날이 밝기까지 고뇌하지 않은 어둠이 있을까. 묵묵히 이 길을 올랐을 사람들의 땀방울과 그들이 짊어졌을 무게를 생각한다. 고통의 밑바닥에서 쟁취한 자유는 더 깊고 클 수밖에 없다. 일행보다 한참 늦었지만 1,376m 연화봉에 서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고독한 낙타가 아니었다. 의지와 모험을 추구하며, 나 스스로를 극복해 나가는 한 마리 사자가 되어 있었다.내려오는 길에 들른 희방사는 그제야 속살을 드러내며 다가온다. 지장전 앞을 지키는 상록수는 흔들림이 없고 종소리가 은은하다는 동종도 함부로 울지 않았으며, 요사채 뜰 위에 검정 고무신 한 컬레가 좌선하듯 사색에 잠겨 있다.

2020-10-26

완급을 가진 리듬, 즐겁고 환상적인 영상

웨스 앤더슨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있다. 화면에 배치된 인물과 소품들, 그들의 동선에까지 경쾌한 리듬을 지닌다. 이 리듬은 완급의 조절과 멈춤에서 기인한다. 멀리 빠져 있던 카메라는 서서히 들어가는가 싶더니 과감하게 점핑해서 클로즈업하거나 더 들어가는가 싶더니 멈춘다.완급을 가진 리듬에 음악이 깔린다. 이 음악은 그의 영화를 이끄는 속도를 따라 혹은 사건을 따라 배경이 되어 영화 속으로 녹아들게 만든다. 끊임없이 분위기를 이끄는 음악과 완급을 가진 리듬에 대사는 넘치지 않는다. 절제된 대사는 이야기를 이끄는 필요한 만큼의 정보를 전달할뿐 구구절절하지 않다.이는 무성영화의 형식과 흡사하다. 모든 대사가 자막으로 전달되던 무성영화에서 대사는 함축적이며 간명했다. 그리고 시종일관 그 배경에 음악이 깔려 분위기를 전달하며 결말로 관객들을 이끌었다.편집은 완급을 가진 리듬에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과정을 나눠주고 있으며, 친절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관객이 이야기 밖으로 이탈하지 않도록 돕는다. 영화 속 현재는 1980년대다. 그리고 1930년대와 1960년대 후반을 오간다. 이에 따라 화면 비율은 1.85:1, 2.40:1, 1.37:1을 오간다. 모두 해당 장면이 배경으로 하는 시대에 주로 쓰이던 영화 화면 비율이다. 화면 비율만으로도 우리는 어느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편집과 완급을 가진 영화의 속도와 경쾌한 음악으로 인해 영화가 시작되면 깔끔하게(?) 결말에 이른다. 깔끔하다는 것은 복잡한 전개구조와 갈등이 없으며, 복선과 암시로 인해 앞뒤의 사정을 되짚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모든 것들은 경쾌한 분위기를 살려주는 ‘스타카토’와 같다. ‘스타카토’는 음악의 형식을 나타내는 기호로 해당 음의 길이를 줄여 짧게 연주하라는 악상기호이다. ‘스타카토’로 인해 선율에 변화를 주거나 특정 부분을 강조할 수 있다. 자칫 복잡해 질 수 있는 영화의 구성에 과감한 생략을, 멈추고 달리는 전개에 ‘스타카토’선율처럼 속도에 변화를 부여한다.여기에 영화의 색감은 화려하고 선명하다. 세트와 등장인물의 의상, 소품까지 선명한 색감들을 가지고 있어 아기자기하게 표현되었다. 이러한 색감은 영화의 주요 무대가 되는 1930년대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호텔 외관과 몇몇 장면은 정교한 미니어처 세트를 만들어서 촬영했다. 이 영화는 허구이지만 193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시대에 몰아쳤던 광풍이 영화의 미술과 형식에 의해 아기자기하면서도 동화같은 느낌을 갖는다.웨스 앤더슨 영화의 특징인 좌우대칭은 여기서도 등장하는데, 사물과 배경, 등장인물의 등장과 퇴장 등은 좌우대칭을 배경으로 들고난다. 이는 등장인물과 영화의 모든 미장센이 철저히 계산된 감독의 의도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이 모든 것들 속에서 기저를 이루는 정서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유머다.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과 대사, 정서들은 모두 참혹한 전쟁과 함께 사라진 낭만과 예술에 대한 애수로 가득하다. 호텔의 품격을 위해 내려지는 일련의 지시와 주인공 구스타브가 유지하는 일련의 고집들에서 그것이 고스란히 드러난다.영화의 몇몇 장면들은 잔인하다. 그것이 다른 영화에서 행해졌다면 잔인함이 극대화되고 관객은 그 장면이 내내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는 잔인한 장면이 그냥 흘러가 버린다. 거기엔 화려한 동화같은 미장센과 리듬을 가진 속도와 속도를 가진 배경음악과 함께 유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유머에도 리듬과 속도가 있다. 심각한 상황에서 터져나오는 위트. 멈추어 숨을 고르고 이어지는 잔인한 장면이 아닌 적절한 속도를 가지고 행해지는 잔인한 장면 이후에 이어지는 흐름들이 완급을 조절한다.현재와 과거, 과거에서 다시 더 먼 과거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구조는 복잡해질 수 있지만 시대에 따른 화면구성과 톤, 이야기 전달을 위한 영상 구성의 면밀함이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밝고 경쾌한 음악과 환상적인 동화같은 배경이 시작되고, 우리는 적절한 리듬과 속도를 지닌 열차를 타고 종착역까지 지루할 틈없이 달려갈 것이다./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2020-10-26

화씨지벽(和氏之璧)의 교훈

강희룡 서예가사냥꾼은 좋은 사냥개를 얻으려 하고 말 타는 사람은 좋은 말만 얻으려 하지 그것이 어떤 새끼를 낳을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정치에 있어서도 위정자의 인물 됨됨이가 중요한 것이지 문벌은 그리 중요치 않다. 공자가 위나라 영공의 무도함을 힐난하자 강자가 물었다. ‘그러한데 그 나라는 어찌 망하지 않았습니까?’ 이에 공자가 답했다. ‘중숙어가 외교를 맡고, 축타가 종묘를 다스리고, 왕손가가 군사를 맡아 다스리니 어찌 망하리오!’ 이렇듯 비록 왕의 됨됨이가 비루하더라도 훌륭한 신하들이 그 임금을 보좌해 백성을 위해 국정을 돌본다면 그 나라는 굳건히 영속할 것임을 공자 또한 알고 있었다.기원전 770년부터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 춘추전국시대는 약 550년에 달하는 기간이다. 이 시기는 각자 지역에 근거한 집단이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문화적 풍토를 배경으로 나라를 세우고 왕을 세워 맹주를 다투던 시기였다. 주 왕조의 일방적인 천하지배 구조는 무너지고 지방정권들이 역사적, 지리적 환경에 근거해 자립하면서 초기에는 온건하게 연합과 합병을 거듭하다 재화와 자원, 인재와 기술을 두고 싸움이 시작되면서 철기의 출현은 치열한 경쟁을 더욱 부추겼다. 정치중심의 다극화는 사회불안을 초래했지만, 동시에 가치의 다양화를 낳았고, 대륙에는 옛 체제와 가치관의 붕괴가 진행되는 가운데 유례없는 창조가 태어나게 된다.국가와 정치, 산업과 인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키워낸 사상가와 명신들이 나타났으니, 이들이 바로 유가, 법가, 도가, 묵가, 병가 등으로 불리는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학설을 내세워 문하생을 교육시키고 각국을 떠돌며 자신의 주장을 실제 정치에 반영시키려 했다.병가(兵家)의 손무, 완벽(完璧)의 인상여 등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대륙역사의 한 대목을 대변할 수 있을 정도의 수많은 현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옛 시대의 사상과 학문을 배우며 과거를 토대로 현재의 자신을 반성하며 교훈을 얻고 있다. 치열한 삶을 살았던 고대인들의 주옥같은 일화와 교훈은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은 물론 미래에서도 여전히 금과옥조 같이 여겨질 것이다. 초나라 사람 화씨가 다듬지 않은 옥돌을 구해 두 번이나 왕에게 바쳤을 때 옥을 감정하는 관리가 돌이라 결론짓자 왕을 속인 죄로 두 발이 차례로 잘려나갔다. 세 번째 왕이 즉위하자 화씨는 옥돌을 안고 궁문 앞에서 사흘 밤낮을 슬피 울었다.소문을 들은 왕이 이유를 묻자 화씨는 ‘보옥을 돌이라 하고 곧은 선비를 속임수 쓰는 자로 몰아 마구 베는 것이 슬프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왕이 화씨의 돌을 쪼개고 다듬으니 마침내 천하제일의 옥이 드러나자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했다. ‘한비자, 변화편(韓非子,卞和篇)’에 보인다. 화씨는 두 발꿈치를 잃고서야 다듬지 않은 돌을 천하의 옥으로 인정받았다. 지금 우리사회가 절차에 따라 돌을 쪼개 옥을 다듬는 것은 외면한 채 사람 다리 자르는 것은 쉽게 여기지 않는지 깊이 성찰해볼 문제이다.

2020-10-26

일·가정 양립하는 길로!

박은미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실장일·가정 양립지원정책은 남녀 근로자가 경제활동에 참가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직장 그리고 가정생활의 충돌을 완화하고자 도입된 정책이다. 근로자의 임신, 출산, 자녀 양육기의 모성보호와 경력단절을 방지해 경제활동을 촉진하고 자녀 양육기의 가족생활을 보장하는데 정책의 초점을 두고 있다. 출산전후휴가제도, 육아휴직제도, 근로시간 유연화 관련 제도, 돌봄 정책을 포괄한다. 일·가정 양립지원정책은 2000년대 초반 양성평등, 2000년대 중반 저출산 현상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 단계에 접어든다. 제도의 기본 틀은 1953년 근로기준법과 1987년 남녀고용평등법에 반영되어 있었다. 출산전후휴가는 1953년 근로기준법에 유급제로 도입됐고, 육아휴직제도는 1987년 남녀고용평등법에 무급제로 도입됐고, 역시 2001년에 정액 20만원의 고용보험 급여가 신설됐다. 이로 인해 육아휴직제도와 출산전후휴가제도 활용은 증가했다.현재 일·가정 양립지원제도는 크게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으로 대변되는 부모휴가제도와 유연근무제로 구분할 수 있다. 부모휴가제도는 출산(전후)휴가제도, 육아휴직제도, 배우자출산휴가제도, 가족돌봄휴직제도 등이 있는데, 그 영향력과 제도적 개선 가능성을 육아휴직제도를 중심으로 검토되어 왔다. 일·가정양립지원을 위한 다양한 휴가·휴직제도 중 육아휴직이 제도적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그 보편성과 중요성은 물론, 출산휴가와 달리 근로자의 선택에 의하여 제도 활용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한편 최근에는 육아휴직으로 인한 근로관계 단절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유연근무제 활용성이 증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가정 양립을 위한 유연근무제는 사업장 단위에서 제도 도입과 운영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높다. 유연근무제를 규율하는 법률은 크게 ‘근로기준법’과 ‘가족친화 사회환경의 조성 촉진에 관한 법률’이 있다. 이를 기반으로 해 여성경제활동 활성화와 직장맘의 안정적인 고용유지, 경력단절 예방, 나아가 행복한 일과 가정의 균형 있는 삶을 위해서는 불평등하고 열악한 고용구조 개선과, 가사와 양육의 남녀 공동부담, 사회적 책임강화, 일생활 균형의 중요성을 사회적으로 인식하는 종합적 접근이 모색되어야 한다. 공공기관, 기업, 가정 등 사회전반에 걸쳐 일·생활균형이라는 워라밸의 실천을 위한 인식과 실천 아젠다들이 발굴되는 분위기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다양한 근무방식, 장시간 노동을 감축하거나 휴가 사용을 촉진하는 등 제도 도입 및 실천은 기업의 근무방식 개혁을 적극적으로 시도한다. 직장에 국한되지 않고, 자택과 오피스에서도 업무를 볼 수 있는 생산성이 높은 업무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코로나19를 겪으면서 새로운 사회적 변화에 대응하는 신패러다임이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일·가정양립지원의 활성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때문에 일·가정양립형 지원 정책의 적극적 활용 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쳐 일과 삶에 관한 인식 개선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2020-10-26

정상과 병리 사이

유영희작가​​​​​​​·인문글쓰기 강사매스컴에서 듣던 조현병 환자의 이야기가 어느샌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내 주변에도 가족이 조현병을 앓고 있어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가족들조차 조현병을 비롯한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몰라서 우왕좌왕한다.그래서인지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라는 책에 유난히 관심이 갔다. 이 책은 가족이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알려주는 책이다.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실을 잘못 보는 환자와 논쟁하지 말라는 것이다.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은 현실 인식이 부족하다. 현실을 왜곡해서 본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설득하려고 한다. 그건 A가 아니야, B야. 아무리 설명을 하고 납득을 시키려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때로는 정신질환이 아니더라도 큰 병을 앓다 보면 이상한 소리를 듣기도 한다. 5년 전 돌아가신 엄마는 파킨슨씨 병을 앓으면서 환청이 있으셨다. 내 신발에 도청장치가 있어, 사람들이 나와서 나한테 소리를 질러, 누가 죽었대 등등. 이런 말씀을 하실 때마다 그렇지 않다고 설명해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책에서는 이런 환자들에게 설득하려 들지 말라고 조언해준다. 심하게 흥분했을 때는 잠시 거리를 두는 것이 좋고, 그 망상이 누군가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개입하지 말고 가볍게 흘려듣거나 슬며시 화제를 바꾸라고 한다. 논리적으로 반박하거나 논쟁하지 말고 대신 그 밑에 깔린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고 한다.그런데 이런 조언은 정신질환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적 기능을 어느 정도 수행하는 사람들도 비현실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 경우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실증적인 증거를 들이대도 수용하지 않는다. 책의 조언을 적용하면, 이때 그런 생각과 논쟁하거나 교정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그 생각이 누구에게 해를 끼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면 굳이 개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설득은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때로는 비논리적인 사고로 남을 미워하거나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도 있다. 그런 감정이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한때 나는 실패한 사람이라는 부정적 감정에 휩싸여 제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한 적이 있다. 상담사가 아무리 나의 성취한 부분을 말해주어도 부정하거나 폄하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럴 때 상담사가 논리적으로 내 생각을 반박하려 하지 말고, 그 생각 뒤에 숨은 감정을 알아주었으면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정신질환자들이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인정했을 때 오는 후폭풍, 예를 들어 자신의 현실을 직시했을 때 오는 부담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대목 역시 정상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도 유효한 대목이다. 방귀 뀐 사람이 성낸다는 말이 있다. 그럴 때 논리적으로 그 사람의 감정과 행동을 반박하기보다 부끄러움이라는 속감정을 이해해주는 것이 그 사람과 같이 살기 위한 방법이다. 정상과 병리 사이는 멀고도 가깝다.

2020-10-26

유전자가위

생명공학 분야에서 혁명적인 발견으로 불리는‘유전자 가위’는 특정유전자에만 결합하는 효소를 사용해 원하는 유전자를 잘라내는 기술을 말한다. 올해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다우드나 교수와 샤르팡티에 교수가 2011년 3세대 유전자가위‘크리스피 캐스9’을 완성해 각광을 받았다.‘크리스피 캐스9’은 박테리아에서 발견되는 면역시스템인‘크리스퍼’에 마치 가위처럼 DNA 염기서열을 자를 수 있는 단백질‘캐스9’을 결합한 기술이다.박테리아는 자신에게 침입한 바이러스의 유전자 일부를 표식으로 보관하다가 나중에 같은 유전자를 가진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바로 효소 단백질로 잘라낸다. 이를 손상된 유전자를 교정하는 데 쓰는 게 바로 유전자가위다. 유전자 가위를 절단하고 싶은 DNA에 붙이면 DNA 이중나선이 풀리면서 가이드 RNA와 DNA가 결합한다. 이 과정에서 특정 DNA가 잘리거나 붙으면서 DNA 교정이 가능해진다. 3세대 유전자 가위를 활용하면 연구자들이 동식물과 미생물 DNA를 정확하게 수정할 수 있어서 암 치료를 위한 새 대안을 제시하는 데 기여할 뿐 아니라 유전질환을 정복한다는 꿈을 달성할 가능성이 있다고 기대를 모으고있다. 다만 유전체를 마음대로 편집할 수 있다는 말은 생명의 기본적인 설계도를 마치 신이 된것처럼 조작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 윤리적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쥐라기 공원에 나오는 것처럼 멸종된 생물을 복원한다던가, 유전질환을 지닌 태아의 생명을 구하는 것처럼 기술적으로 난제에 봉착하던 난제들에 도전할 수 있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발전이 인간의 생명윤리 자체를 넘어설 경우 인류가 겪을 재앙이나 공포가 결코 녹록치 않다는 점을 꼭 명심해야 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10-26

‘독도의 날’에

윤영대수필가10월 25일 어제는 ‘독도의 날’이다.1900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로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반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2000년에 독도수호대가 ‘독도의 날’로 지정한 것을 계기로 2010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주축이 되어 관련 단체 등과 공동으로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전국 단위로 선포했었다. 이것은 일본이 그동안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온 것에 대한 경고이자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알리고 우리의 강력한 독도수호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백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가수 정광태가 부른 ‘독도는 우리 땅’은 포항에서 뱃길 258km,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섬이고, 동도와 서도로 이루어져 있는 작지만 소중한 우리의 영토이며 자산이다.영해와 영공을 결정짓는 지리적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고, 난류와 한류가 합치는 황금어장에 해양생태계의 보고이다. 여름철이면 오징어 떼가 넘쳐나고 겨울과 봄에는 명태가 몰려오며 꽁치, 대구들도 무리 지어 다니고 있다. 해저 암초에는 다시마, 미역 등이 숲을 이루어 해삼, 문어들이 풍성하고 이제는 멸종된 바다사자 강치의 기억을 더듬으며 바다제비, 괭이갈매기, 슴새 등 많은 철새들의 서식 낙원으로 천연기념물 33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바다 밑 울릉분지에는 천연가스 부존가능성이 있어 경제적 가치로도 동해의 보물이다.이러한 독도에 일본이 끊임없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옛날부터 근해에서 자기들이 고기잡이를 해왔고 1905년 시네마현 고시로 다케시마(竹島)라고 불렀으며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내용에서 빠졌다는 것을 핑계로 억지를 부리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세종실록지리지 등 우리의 고문서와 고종 칙령을 보더라도 얼토당토않는 행위인 것이다. 자기네들의 태정관 지시(1877년)에도 ‘죽도(울릉도) 외 1도(독도를 말함)는 일본과는 무관’함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1965년 한일협정에서 우리 측의 허술함도 있었겠지만 1994년 배타적 경제수역이 실시되면서 독도 주변이 공동 구역으로 정해졌었다. 사실 전 세계지도의 80% 이상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다니 우리도 빨리 외교나 학술발표 등을 통해서 바로 잡아야 한다.역사를 보더라도 삼국사기에는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했었고 이조실록에도 수차례 사람을 보내 지키도록 했었으며 17세기 말 안용복은 일본에 건너가서 ‘독도는 조선 땅’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고 왔지 않은가. 이제 홍순칠 대장의 독도의용수비대를 이어받은 독도경비대가 주둔하고 독도 주민도 살고 있는데 아직도 일본은 영유권 고집을 피우고 있다.독도 문제는 일본과의 감정 대립을 넘어 그들의 전략과 속셈을 파악하고 명확한 역사적 자료와 폭넓은 외교력으로 일본의 영유권 야욕을 꺾는 힘을 길러 극일(克日)을 해 나가야 한다.입도신고제로 바뀐 후 매년 수만 명의 관광객이 들어온다고 하니 ‘독도의 날’을 맞아 해양환경도 지키며 우리의 영토 주권수호에 대한 의지도 길러야겠다.

2020-10-25

책 읽어 주기의 힘

김현욱 시인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뇌가 독서를 배우는 방법을 ‘고생스럽게 추가, 조립해야 하는 액세서리’라고 말했다. 소리에 관한 한 아이들의 선(線)운 이미 연결되어있지만, 문자는 고생스럽게 추가, 조립해야 하는 액세서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말은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지만 글은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다. 애초에 뇌는 독서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책을 읽는 행동은 인간에게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E. B 휴이는 “독서라는 과정은 문자를 단순히 시각적으로 읽는 행위만이 아니다. 독서는 인간의 행위 중에서도 가장 복잡다단한 활동 중의 하나.”라고 거들었고, 멀린 위트록은 “우리는 하나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단어의 사전적 의미로 읽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 텍스트를 위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낸다. 텍스트를 읽으면서 자신의 지식, 경험에 얽힌 기억 글로 쓰인 문장, 절과 단락 사이의 관계를 구축해 가면서 의미를 만들어 낸다. 이처럼 독서는 뇌의 다양한 정보원 특히 시각과 청각 언어와 개념 영역을 기억의 감정 부분들과 연결하고 통합하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다. 그런데 이런 통합을 위해서는 뇌의 각 영역이 최소한의 성숙도를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그렇다면, ‘최소한의 성숙도’를 확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책 읽어주기다. 1979년 ‘하루 15분, 책 읽어 주기의 힘’을 출간한 짐 트렐리즈에게는 어린 시절 책을 읽어 준 아버지가 있었다. 그때의 느낌과 추억을 아련하게 간직하고 있던 그는 마찬가지로 아버지처럼 자녀에게 매일 밤 책을 읽어 주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많은 아이가 책 읽기를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가 부모와 교사에게 있음을 깨달은 트렐리즈는 자비로 이 책을 냈다. 그 후 트렐리즈의 책은 스테디셀러에 올랐고, 전 세계의 교실 풍경까지 바꿔 놓았다. 특히, 일본에서는 지금도 2만여 개가 넘는 학교가 매일 아침을 책 읽기로 시작하고 있다.많은 부모가 자녀교육에 대해 노심초사하지만 어릴 때부터 침대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사실, 읽기는 모든 학습의 기초요 주춧돌이다. 책 읽기와 학업 성취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수많은 통계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읽기가 교육의 중심이고, 읽기가 최우선이다. 읽지 못하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아이의 읽기 능력을 키워줄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어릴 때부터 소리 내어 책을 꾸준히 읽어 주는 것이다. 트렐리즈는 요람에서 10대 중반까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핀란드 아이들은 여덟 살이 되어 글을 배우지만 읽기 능력과 학업성취도는 세계 최고이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핀란드의 많은 가정은 책을 읽는 분위기이고,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을 매우 강조한다. 한 학기 한 권 읽기를 학교에서 실천하고 있는 교사들의 역할도 막중하다. 좋은 책을 골라 아이들에게 열심히 읽어주자. 좋은 책과 책 읽어주는 당신의 목소리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줄 것이다.

2020-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