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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단상) 원술과 시득, 김유신 가문의 두 길

등록일 2026-06-16 16:21 게재일 2026-06-17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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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문 시민기자

김유신 장군에게는 여섯 아들이 있었다. 삼광, 원술, 원정, 장이, 원망, 그리고 서자인 시득이다. 그중 원술과 시득은 신라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여러 기록에 이름이 전한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신라는 당나라와 대립하게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 백성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옛 땅을 장악하며 세력을 넓혔다. 이에 당 고종은 말갈과 연합해 신라를 공격했다.

672년 음력 8월, 석문 전투에서 신라군은 장군 효천, 의문, 산세가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이 전투에 참전한 김유신의 아들 원술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려 했으나, 담릉이 “헛된 죽음보다 살아서 훗날 공을 세우는 것이 낫다”며 말렸다. 결국 원술은 살아 돌아왔고, 김유신은 임전무퇴의 정신을 저버렸다며 왕에게 아들의 처형을 청했다. 문무왕은 그를 용서했지만, 원술은 부끄러움에 산골로 몸을 숨겼다.

1년 뒤 김유신이 세상을 떠나자 원술은 어머니 지소 부인을 찾아가려 했으나, 지소 부인은 남편에게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자를 자신도 아들로 여길 수 없다며 외면했다. 큰 충격을 받은 원술은 태백산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675년 당나라가 다시 침공하자, 그는 지난 실책을 만회하고자 매소성 전투에 나아가 목숨을 걸고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럼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부모에게 외면당한 상처가 끝내 그의 삶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김유신에게는 서자인 시득이 있었다. 672년, 시득은 백수성 인근에서 당나라군을 물리치는 데 참여했다. 그러나 이어진 석문 전투에서 패하자 그 책임으로 충남 부여의 가림군으로 좌천되었다. 그는 좌절하지 않고 군함을 정비하고 병사를 훈련시키며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676년 음력 11월, 시득은 사찬이 되어 신라 해군을 이끌고 설인귀의 당나라 수군과 기벌포에서 맞섰다. 첫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이어진 22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며 당나라 군 수천 명을 궤멸시켰다. 그는 기벌포 대첩의 영웅이 되었고, 훗날 장보고와 이순신에 비견될 명장으로 재조명되었다.

원술과 시득은 모두 김유신의 아들이었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원술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죄책감 속에 살았고, 목숨을 건 활약에도 끝내 외면받은 자로 남았다. 반면 시득은 인정받지 못한 서자였으나, 전장에서 진가를 드러내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

김유신의 집안은 엄격하고 냉정했다. 임전무퇴의 기개를 실천하지 못하면 핏줄조차 이름을 잃었고, 의로움을 잃으면 가문의 명예마저 깎였다. 그러나 그 엄격함이 있었기에 김유신의 가문은 사사로운 삶보다 나라의 운명을 먼저 선택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어쩌면 김유신 가문의 가풍을 달리 부르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 집안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자도 나라를 위해 칼을 들었고, 인정받은 자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스스로를 벌했다.

가문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한 사람들. 누군가는 잊히고, 또 누군가는 끝내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들의 충과 절개는 지금도 우리 삶의 기준으로 남아 있다. 

/김성문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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