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시절엔 시(詩) 한 줄보다 쌀 한 됫박이 절실했으니까요. 그때 음악은 귀만 즐겁게 할 뿐, 배를 달래주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문화는 늘 배부른 뒤에나 찾는 ‘입가심용 디저트’ 취급을 받았습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는 그런 존재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거꾸로 묻습니다. “문화 없이 대체 어떻게 먹고 살 거냐?”
이제 밥은 기본이고, 관건은 ‘맛’입니다. 그리고 그 맛을 결정하는 ‘조미료’가 바로 문화입니다. 똑같은 커피라도 편의점 구석에서 마시는 것과 낙동강 노을을 배경으로 마시는 것은 값이 다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커피는 뒷전이고 사진부터 찍느라 바쁩니다. 주인은 속으로 ‘얼른 마시고 한 잔 더 시키지’ 하며 울지만, 겉으로는 ‘인생샷’ 나오라며 조명을 밝힙니다. 이것이 바로 ‘갬성(감성)’이라는 이름의 문화 권력입니다.
이쯤 되면 문화는 장식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 전략입니다. 굴뚝 달린 공장도 귀하지만, 사람 마음을 낚아채는 ‘이야기 공장’은 더 무섭습니다. 그 전설 같은 이야기가 펄떡이며 살아있는 곳, 바로 사문진(沙門津)입니다.
사문진이 어떤 곳입니까. 옛날식으로 치면 영남권 최고의 ‘택배 허브’였습니다. 다만 ‘로켓 배송’ 대신 ‘언젠간 가겠지 배송’이 미덕이던 시절이었죠. 그러던 1900년 어느 날, 이 나루터에 괴상한 나무 상자 하나가 상륙합니다. 뚜껑을 열자 딩동댕 소리가 났고, 구경하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했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저 통 안에 귀신이 들었나 보다!”
지금 같으면 유튜브 실시간 조회수 100만 회를 찍고도 남을 ‘귀신 들린 상자’ 소동. 그 정체는 바로 이 땅에 처음 들어온 피아노였습니다. “귀신이 아니라 천상의 소리네.” 그 낯선 경이로움이 감동으로 바뀌고, 그 감동이 쌓여 오늘의 ‘사문진 100대 피아노 콘서트’라는 거대한 역사가 되었습니다.
낙동강 황금빛 노을 아래 피아노 100대가 열을 맞춰 앉아있는 풍경은 그 자체로 압권입니다. 100명이 동시에 건반을 두드리면 강물도 숨을 죽이고 공기마저 파르르 떱니다. 공연을 본 한 관람객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고 고백하더군요. 사람을 죽일 듯 감동시키고는 끝내 다시 살려내는 것, 그것이 문화가 부리는 마법입니다.
문화의 진짜 힘은 ‘강력 접착제’ 역할에 있습니다. 생판 남이던 사람들이 같은 선율에 박수를 치는 순간, 우리는 잠시 ‘너’와 ‘나’를 잊고 ‘우리’가 됩니다.
물론 현실은 늘 녹록지 않습니다. 나라 곳간이 비면 늘 문화 예산부터 칼질을 당하곤 합니다. 마치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운동도 내일부터”라며 미루는 심산과 비슷하죠. 하지만 문화는 소모되는 ‘비용’이 아니라 수익을 낳는 ‘투자’입니다. 사람이 모이면 돈은 절로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없는데 경제가 무슨 소용입니까.
문화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성급한 주인처럼 거위 목을 비틉니다. “야, 너는 왜 오늘 알을 안 낳아? 내일은 곱빼기로 두 개 낳아라!”
거위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입니다. 문화는 재촉한다고 쑥쑥 자라지 않습니다. 묵힐수록 깊어지는 된장처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제 사문진을 중심으로 공연과 먹거리, 관광이 실타래처럼 엮이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보고, 먹고, 자고, 그러다 보니 정들어서 또 오게 만드는 구조 말입니다. 지갑을 열 ‘기분 좋은 핑계’도 만들어줘야 합니다. 기념품 하나에도 사문진의 사연을 입히고, 음식 하나에도 달성의 색깔을 입혀야 합니다. 그래야 배가 부른데도 “이건 꼭 먹어봐야 해”라며 하나 더 주문하는 ‘매출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결국 여행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연’의 문제입니다. 이야기가 도시를 살리고 감동이 자산이 되는 시대입니다. 누군가 다시 묻는다면 이제는 시원하게 웃으며 답해줍시다.
“문화가 밥 먹여주냐고요? 당연하죠! 밥은 고봉밥으로 주고, 반찬에 디저트까지 풀코스로 챙겨줍니다. 잘하면 자다가도 생각나는 인생 단골집까지 예약해 드릴게요!” /방종현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