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포항시는 남구 오천읍 일대에 방치된 일제강점기 인공동굴을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전쟁과 같은 비극적 역사현장 탐방을 통해 교훈을 얻는 ‘다크투어리즘’ 역사 관광지로 활용하는 데 나선다. 현재 오천읍 세계리와 광명리 일대에는 20곳의 인공동굴이 확인됐지만, 군부대나 사유지에 있는 데다 사실상 방치 수준으로 남아 있다. 다행히 포항시가 용역을 통해 인공동굴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학술조사와 더불어 동굴의 수·규모·위치·를 정밀 조사한다. 국가등록문화유산 지정을 추진해 5~10년 단위의 단계별 정비계획도 세운다. 포항에 산재한 인공동굴이 전쟁의 상흔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중요한 소재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끈질긴 조사를 통해 인공동굴의 존재를 널리 알린 향토사학자 이상준 포항문화원 부원장과 사현지 경북연구원 연구위원을 통해 인공동굴이 지닌 가치를 살펴보고 가장 효과적인 활용방안과 이를 위해 풀어야 할 과제를 살펴봤다.
이상준 포항문화원 부원장 “집단유산 인공동굴, 전쟁이 무얼 남겼는지 보여주는 증거"
포항시가 남구 오천읍 일대 인공동굴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추진하고 내년 상반기 50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학술용역에 착수하기로 한 것은 한 향토사학자의 끈질긴 노력에서 출발했다. 이상준 포항문화원 부원장은 오랫동안 ‘존재는 알려져 있지만 설명되지 않았던 공간’으로 남아 있던 인공동굴의 성격을 문헌과 현장 조사를 통해 추적해 왔다.
오천읍 일대에는 일제강점기 인공동굴 20여 곳이 있다. 이중 절반은 해병대 1사단 부지 안에 있고 나머지는 농지와 민가 담장 사이에 흩어져 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일본이 파놓은 동굴”이라는 말이 전해졌으나 조성 시기와 용도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설명이 없었다.
이상준 부원장은 이를 두고 “말은 있었지만, 기록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독립운동사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이 동굴들을 알게됐다며 “군이 팠다는 주장부터 해방 이후 시설이라는 말까지 주민 증언이 있었고 문헌이 없다는 이유로 수십년간 방치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전환점은 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서 확보한 일련의 문서였다. 특히 1945년 9월 9일 일본 해군 진해경비부사령장관이 미군 제7함대 사령장관에게 제출한 무장해제 보고 문서는 영일해군항공기지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였다.
해당 문서에는 기지 면적 313만㎡, 활주로 길이 1500m·폭 50m, 격납고, 폭탄고, 어뢰 격납고, 특설견장소(레이더 관측소)까지 갖춘 종합 전쟁기지의 구조가 기록돼 있다. 이 부원장은 “이 문서를 통해 포항이 단순한 지방 비행장이 아니라 전쟁 말기 남부조선 해군 항공작전을 총괄하던 핵심 거점이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 해군은 1945년 7월 17일 부산에 있던 해군항공기지 사령부를 영일해군항공기지로 이전한 기록도 남아 있다. 전쟁 말기 남부조선 해군 항공작전의 중심이 포항으로 옮겨졌다는 의미다.
문헌 분석은 현장 조사로 이어졌다. 오천읍 세계리 일대 인공동굴 내부에서는 바닥에 레일 설치 흔적이 확인됐다. 이 부원장은 “동굴 규모와 구조, 레일 흔적을 종합하면 단순 탄약고로 보기는 어렵다”며 “병사 1명이 탑승해 적함에 돌진하는 자폭 병기인 가이텐 10기가 세계리 일대 어뢰 격납고에 보관돼 있었다는 문헌 기록까지 함께 보면 관련 시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부원장은 포항 오천 인공동굴의 가치를 개별 시설이 아닌 ‘집단 유산’으로 본다. 하나의 군사기지를 중심으로 다수의 인공동굴이 함께 남아 있는 구조 자체가 전국적으로도 드물다는 것이다. 그는 “동굴 하나만 떼어 놓고 보면 의미가 약해 보일 수 있지만 항공기지와 함께 보면 전쟁 수행 구조가 입체적으로 드러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전쟁기지 기능과 식민지 수탈 구조가 한 공간에 중첩돼 있다는 점을 꼽았다. “경기도 광명동굴이나 제주 가마오름 일제 동굴 진지가 군사 또는 산업 기능에 초점이 맞춰졌다”면서 “오천 인공동굴은 전쟁 수행과 식민지 노동 구조가 동시에 얽혀 있다”는 것이다.
이 부원장은 이 유산의 성격에 대해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는 “이 동굴들은 일본을 미화하기 위한 유산이 아니다”라며 “전쟁이 이 지역과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했다. 이어 “지금 정리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는 이 역사를 아예 접할 기회조차 잃게 된다”고 덧붙였다.
사현지 경북연구원 연구위원 "전쟁·식민지 지배 흔적 어떤 관점으로 설명하느냐가 중요”
일제강점기 인공동굴을 어떻게 해석하고 다크투어리즘으로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 사현지 경북연구원 연구위원은 포항 인공동굴을 단순한 군사시설이나 관광자원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 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흔적을 어떤 관점으로 설명하느냐가 향후 활용의 방향을 가른다는 지적이다.
사 연구위원은 인공동굴 관광자원화 논의에서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보다 이 공간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가 먼저”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공동굴을 체험형 관광시설로 소비하려는 접근에 대해 “이곳은 즐거움을 소비하는 장소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전쟁과 강제노동, 식민지 구조의 흔적이 응축된 공간인 만큼 흥미 위주의 체험이나 과도한 재현은 역사적 맥락을 흐릴 수 있다는 판단이다.
공간 연출에 대해서도 ‘최소화 원칙’을 제시했다. 사 연구위원은 인공동굴을 전시물처럼 꾸미기보다는 과도한 연출을 덜어내고 공간이 지닌 조건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봤다. 그는 “전쟁의 비극을 크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말하며, 조명과 음향을 최소화해 공간이 주는 긴장감과 침묵의 울림을 살리는 방식이 적절하다고 설명했다.
사 연구위원은 다크투어리즘의 핵심을 ‘공감과 성찰’로 정리했다.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이 동굴이 왜 만들어졌는지 누가 이 공간을 파야 했는지”라는 질문이 방문자에게 남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그 질문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사의 중심은 시설이 아니라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사 연구위원은 동굴을 파던 노동자와 당시 지역 주민의 삶이 해석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봤다. 개인의 비극을 나열하는 데 그칠 때 이 공간이 다시 군사시설로 소비될 수 있다며, “식민지라는 시대적 구조 속에서 왜 이런 시설이 필요했고 그 부담이 누구에게 전가됐는지를 설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존 방식에 대한 논의로도 이어졌다. 사 연구위원은 장기적으로 일부 동굴에 대해서는 ‘핵심 유산’ 개념을 적용해 더욱 엄격한 보존 체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그는 역사적 희소성, 원형 보존 상태, 전국적·학술적 가치가 함께 고려돼야 하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준은 ‘대체 불가능성’이라고 짚었다.
포항 인공동굴이 전국 단위 사례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관리의 ‘방식’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사 연구위원은 전면 개방이 아닌 단계적·선별적 활용을 전제로, 접근이 어려운 공간은 디지털·가상 탐방으로 보완하고 군부대·사유지 소유주와의 협력 구조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고 봤다. 이런 조건이 갖춰질 때 포항 사례는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근대 군사 유산 관리에 있어하나의 표준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김보규기자 kbogyu84@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