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혁신 vs 시장제도’로 갈린다 日, 공공조달로 GX스틸 시장화 韓, 기술은 선도•기준체계 미흡 공공조달 우선구매제 도입 필요
세계 철강산업의 탈탄소 전환이 본격화되면서 한국과 일본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린철강 시장’을 구축하고 있다. 한국은 수소환원제철(HyREX) 기반의 기술혁신에 투자해 장기 경쟁력을 확보하는 전략을 택한 반면, 일본은 정부·업계가 공동으로 규칙과 인증체계를 정비하며 ‘저탄소 철강의 가격·시장 기준’을 제도화하고 있다. “기술 혁신형 한국 vs 시장 설계형 일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해 출범한 ‘GX(그린 트랜스포메이션) 추진 그린철 연구회’ 논의를 바탕으로, 올해 10월 일본철강연맹과 함께 그린철강 인증체계의 근간이 되는 세 가지 가이드라인을 공식 제정했다. 핵심은 ‘GX 스틸’이라는 공인 분류를 신설해, 철강사가 감축한 온실가스(GHG)를 제품에 반영하고 이를 정부 조달·수요 산업과 연계해 시장가치를 인정하는 체계를 만든 것이다.
GX 스틸은 두 방식으로 공급된다. 감축 실적을 인증서 형태로 제품군에 배분하는 GX 마스밸런스 방식과, 감축량을 제품별 탄소발자국(CFP)에 직접 반영하는 GX 할당 방식(GX Allocation)이 그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인증체계를 기반으로 그린구매법에 GX 스틸 우선 구매 조항을 반영, 공공조달부터 저탄소 철강 시장을 열어가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자동차·건설 등 주요 수요산업도 LCA(전과정평가) 기반 탄소규제가 강화되면서 GX 스틸 활용이 사실상 필수 조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반면 한국은 POSCO의 HyREX 수소환원제철, 현대제철의 수소 기반 고로 전환·CCUS 적용 등 기술 중심의 감축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고로 기반 생산효율과 대규모 실증 경험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기술 잠재력은 한국이 앞선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저탄소 철강의 규격·정의·가격을 국가 차원에서 제도화한 일본과 달리, 한국은 기업별 CFP 산정 방식이 상이하고, 정부 조달·수요산업 규제와의 연계도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글로벌 규제환경도 양국 전략 차이를 더 크게 만든다. EU는 CBAM과 자동차 탄소규제를 통해 “저탄소 소재 없이는 수출 불가” 구조를 만들고 있고, 미국·유럽 OEM 기업들도 LCA 기반 공급망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일본은 이러한 환경 변화에 맞춰 국제 표준 논의(SBTi·worldsteel GHG 관리체계 등)에 적극 참여하며 규칙 설계자로 움직이고 있다. 한국은 국제 규정 대응과 기술 개발에는 속도를 내고 있지만, 국가공인 그린철강 정의·가격 구조·표준 검증 체계는 여전히 미완이다.
전문가들은 “2030년 이전 규제형 시장에서는 일본 방식이 유리하지만, 2035년 이후 수소환원제철 대량생산 시대에는 한국 기술모델이 앞설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한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수요산업 규제 연계, CFP 공통가이드 정비, 공공조달 우선구매제 도입 등 정책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탄소감축이 제품 가격과 시장경쟁력으로 직결되는 시대, 철강산업 경쟁력은 더 이상 생산량·가격만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더 깨끗하게 만들었는가’가 곧 새로운 산업 규칙이 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선택이 향후 글로벌 철강 공급망의 판도 변화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