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깊고 물이 맑은 대구광역시 군위군. 지도 한쪽에 조용히 접힌 이 고장에는 오래된 돌담과 기와집, 그리고 영화 한 편에 담긴 소박한 삶의 풍경이 남아 있다. 요란한 관광지의 군중 대신, 골목을 채우는 바람소리와 기찻소리, 한 그릇의 밥 냄새가 여행을 다독인다.
빡빡한 일상에서 여유를 찾고 싶다면 보석 같이 숨겨진 대구의 작은 마을에서 깊은숨을 쉬어 보면 어떨까.
△ 돌담의 정취 한밤마을, 천천히 걷는 시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이곳이 한밤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돌담을 모티프로 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고, 그 조형물을 지나면 솔향이 배어 있는 숲길이 운치를 더한다. 이 마을의 이름은 고려 중기 재상 홍란이 이주해 오면서 대야(大夜)라 불렀던 옛 이름에서 비롯됐고, 시간이 흐르며 ‘대율리 한밤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집집마다 둘러선 돌담은 마을의 경계를 나누는 동시에 시간의 층위를 드러낸다.
마을을 천천히 걷다 보면 돌담에 엉킨 덩굴과 골목의 고요가 먼저 반긴다. 마을 전체를 둘러싼 약 4km 길이의 돌담을 한 시간이면 천천히 충분히 돌아볼 수 있고, 골목 사이로 스민 햇살과 바람의 결이 오래전 사람들의 숨결을 전해준다.
한밤마을 중심에는 조선 후기의 학사로 개축·중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른 ‘대율리 대청’과, 350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온 남천고택이 자리한다. 남천고택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전통가옥으로 현재는 고택 숙박 체험과 한옥 펜션 체험을 병행해 운영된다. 고택에서의 하룻밤은 낡은 기와와 장작 냄새, 창호지로 스며드는 달빛이 함께하는 느린 시간으로 여행자에게 남는다.
△간이역의 소박한 낭만, 화본역
산성면 화본리에 있는 화본역은 1930년대 지어진 목조 건축의 외관을 온전히 간직한 간이역이다. 오래된 대합실과 플랫폼, 역 앞의 작은 상점들까지 마을의 일상과 함께 오래도록 머물러 온 풍경이다. 2010년대에는 ‘네티즌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선정되며 널리 알려졌다.
지난해 연말 중앙선 복선 전철화와 함께 철로 이설로 의흥면에 군위역이 신설되고 화본역은 폐역이 됐지만, 간이역 특유의 정취는 그대로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역사와 플랫폼, 그리고 역을 둘러싼 논밭의 풍경은 여전히 사진가와 영화팬들의 눈길을 끈다.
△ ‘엄마아빠 어렸을 적에’ — 골목에 쌓인 추억을 걷다
화본역에서 도보로 닿는 폐교(옛 산성중학교)를 활용해 꾸민 생활사 박물관 ‘엄마아빠어렸을적에’는 1960~80년대의 시골 풍경을 재현해 놓은 공간이다. 옛 교실과 사진관, 시골 가게, 찻집, 오락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어린이와 부모가 함께 체험하며 세대 간의 공감대를 쌓기 좋다.
달고나 만들기, 도자기·석고공예 체험 등 유료·무료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고, 운동장에는 꼬마기차나 에어바운스 같은 놀이기구도 있어 한나절 체류에 적당하다. 운영 시간과 요금은 계절에 따라 변동되므로 방문 전 전화나 공식 채널을 확인하길 권한다.
△ 영화 속 그 집, ‘혜원의 집’ — 리틀포레스트의 온도
군위군 우보면 미성리에 있는 ‘혜원의 집’은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졌다. 소박한 부엌과 마당, 처마에 매달린 곶감 모형, 혜원이 타던 자전거까지 영화의 장면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어 관객은 화면 속 한 장면을 현실에서 마주하는 기쁨을 느낀다. 마을회관 주변에 주차 공간이 마련된 경우가 많아 접근성도 비교적 좋다. 영화가 담아낸 사계절의 음식 풍경과 마당의 소소한 움직임을 따라 걷다 보면 도시의 소란이 사라지고, 오래된 집밥의 온도가 손끝에 전해진다.
돌담 위로 비친 햇살, 폐교의 분필 자국, 한옥 부엌에서 김 오르는 밥냄새—군위의 작은 마을들은 모두 크고 작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시끌벅적한 관광지보다 여백이 많은 곳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걸어보자. 오래된 것들이 주는 위로와 소박한 기쁨이, 지금의 답답함을 조금은 풀어줄 것이다.
- 여행 수첩
• 가는 법: 대중교통은 열차와 버스가 연결되지만, 지역 내 이동은 렌터카나 자가운전이 편리하다.
• 숙박: 한밤마을의 남천고택은 고택 숙박 체험이 가능하므로 사전 예약(054-382-2748)을 추천한다. 전통 한옥의 구조와 방 배치(사랑채, 온돌방 등)를 확인하면 더 편안하다.
• 체험: ‘엄마아빠어렸을적에’는 체험 프로그램이 시즌별로 운영되므로 방문 전에 운영시간과 체험 예약 여부를 확인하자.
• 예의: 고택과 마을은 실제 생활 공간이니 주민의 사생활을 배려하고, 사진 촬영 시 출입 금지 구역은 지키자.
울진 등기산 스카이워크서 출렁이는 파도 위 걸으면 등골이 오싹 - 경북도 가을에 가기 좋은 숨은 명소
육지 속의 섬같은 마을 예천 회룡포
낮과 밤이 아름다운 청도 프로방스
△ 등기산 스카이워크와 등기산 등대공원
울진군 후포면 후포리에 있는 등기산 스카이워크는 울진의 탁 트인 바다 위를 걸으며 한여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국내 최대 길이인 135m(목재데크 68m, 스틸그리이팅 10m, 강화유리 57m), 높이 20m로 만들어졌다. 투명한 강화유리 구간을 걸으면 마치 출렁이는 파도 위를 걷는 짜릿한 기분이 든다. 스카이워크에서 내려다보이는 거북 등처럼 넓은 후포 갓바위는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등기산스카이워크에서 출렁다리를 건너면 후포 앞바다를 마주한 공원이 나온다. 바닷가 언덕에는 신석기 유물전시관이 있으며, 이집트 파로스, 스코틀랜드 벨록, 프랑스 코르두앙, 독일브레멘하펜 등 세계 유명 등대를 본떠 만든 모형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스코틀랜드 벨록 등대는 실제 전망대로 등대에 올라 푸른 바다와 공원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 내성천의 매력적 풍경 회룡포
예천군 용궁면에는 낙동강 물돌이동 마을인 회룡포가 있다. 내성천이 마을을 휘감아 돌아가는 육지 속의 섬 같은 마을은 드라마 ‘가을동화’의 촬영지로 그림 같이 아름답다. 물길이 마을을 품은 풍경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마을 건너편 비룡산 전망대인 회룡대에 올라야 한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용이 날아오르면서 크게 한 바퀴 돌아간 자리에 강물이 흘러 만들어졌다는 옛이야기가 저절로 이해된다. 한여름의 초록빛도 아름답지만 황금빛으로 물드는 가을이 오면 회룡포는 화양연화처럼 가장 아름다운 빛을 낸다.
섬마을 회룡포를 육지로 이어주는 ‘뿅뿅다리’는 원래의 외나무다리 대신 강관과 절발판으로 다시 다리를 놓았다. 출렁이는 발판 구멍에서 물이 퐁퐁 솟는다고 해 퐁퐁다리로 불렀으나 신문과 방송에 뿅뿅으로 잘못 보도돼 이 이름이 더 많이 알려져 ‘뿅뿅다리’가 됐다고 한다. 회룡포 마을과 전망대, 두 개의 뿅뿅다리를 이어 걸으며 트레킹을 해도 좋다.
△ 이국적인 풍경이 가득한 청도 프로방스
청도군 화양읍에 있는 프로방스 마을은 낮과 밤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이국적인 마을이다. 낮에는 아기자기한 소품이 가득한 집을 배경으로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마을에 어둠이 내리면 1000만 개의 조명이 불을 밝히고 화려한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러브러브 빛 축제, 세계 명화 100선 빛 축제, 빛의 숲, 라이팅쇼, 고흐별빛정원, 산타마을 크리마스 빛 축제 등 국내 최대 규모의 일루미네이션이 장관을 이룬다.
△ 만화의 대가 이현세 매화벽화거리
울진군 매화면에 있는 이현세 만화거리는 벽화로 만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길을 따라 붉은 매화가 몽글몽글 피어있는 울진의 거리에서 만화를 볼 수 있다는 게 독특하다. 매화면사무소 입구에서 복지회관까지 담장을 따라 250m에 50여 컷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이현세의 대표작인 ‘공포의 외인구단’이 영화의 필름처럼 긴 벽을 따라 펼쳐져 있다. 일본과 대결해 승리하는 이야기 ‘남벌’도 그려져 있다. 울진 대게가 유명한 항구의 풍경도 만화로 볼 수 있다. 만화를 읽으며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난다. 마을 전체가 벽화로 그려진 이현세 만화거리를 둘러보고 ‘남벌’이라는 열차카페에서 쉬어가도 좋다.
/최병일기자 skycbi@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