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을 만나러 갔다. 조선은 기록의 나라였다. 왕의 모든 일을 기록한 실록과 궁궐이나 종묘, 왕실 사당을 새로 짓거나 심지어 수리할 때도 세세한 내용을 모두 기록했다. 이렇게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끝난 후 그 전체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것을 ‘의궤(儀軌)’라 한다. 오대산에 국립조선왕조 실록박물관이 새 단장을 하고 기념 특별전에 실록과 의궤 등을 전시한다고 해서 휴가 기간에 방문했다.
“굽어보니 온 길 가까워 보이지만 / 모르는 사이 아득한 곳 들어왔네 / 봉우리 반은 온통 흰색에 잠기고 / 숲 끝은 아스라이 청색으로 꾸몄으며 / 법 구름은 밖에서 보호해 주고 / 신성 불은 설교 듣는 걸 지켜주네 / 바위 골짜기에 남은 땅 넉넉하니 / 무슨 인연으로 작은 정자 지을까.”
추사 김정희의 ‘완당선생전집’에 수록된 ‘포사등오대산’이다. 오대산사고는 왕실 기록을 보관하려고 1606년 세운 외사고(外史庫)다. 산어귀에서 30리나 들어가야 할 만큼 깊은 산중에 있다. 월정사에서 걸어서 한 시간 반은 가야 닿는 곳에 자리 잡았다. 춘추관 사고, 충주 사고, 전주 사고, 성주 사고에 보관했던 실록이 임진왜란으로 전주를 제외한 모든 사고의 실록이 소실되자 접근하기 어려운 오지에 조성해 실록을 봉안했다. 춘추관과 더불어 묘향산, 태백산, 강화도, 오대산 이렇게 다섯 곳을 지정했다. 조선 후기에 묘향산은 적성산으로, 강화도는 정족산으로 옮겼다.
김정희, 채제공은 오대산에서 실록들을 꺼내어 바람에 말리는 ‘포쇄’ 작업을 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였다. 이곳까지 온 김에 포쇄를 마치고 추사는 오죽헌을 채제공은 금강산을 들러서 갔다는 내용을 시로 적어 남겼다. 우리가 더운 여름마다 평창으로 피서와서 월정사 전나무숲길을 걷고 입구의 박물관을 들러서 가듯이.
오대산사고는 산속에 있어 주기적인 포쇄가 필요했다. 월정사를 방문할 때마다 늘 비가 왔다. 촉촉하게 물든 산을 하얀 구름이 기어오른다. 절경이다. 이렇게 항상 과다한 습기에 노출돼 있지만 장서 시설이라서 불을 때는 온돌을 설치할 수 없었다. 조선왕조는 사고 소장 서적들의 습기를 제거하고 안전한 보존을 위해 정기적으로 사관을 파견해 포쇄를 진행했다. 주기는 원래 2년에 1회가 원칙이었으나 자연재해와 사관 부족으로 지켜지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이들의 갖은 노력은 일제의 침략으로 무색해졌다. 일본에 남은 실록과 의궤는 정부와 국회, 민간의 끈질긴 노력으로 2006년과 2011년 국내로 돌아왔다.
글을 쓰다 보면 초고를 쓴 이후에도 수십 번 퇴고를 거쳐야 글 한 편 완성할 수 있다. 그러고 인쇄를 넘겨도 다시 보면 고칠 곳이 보여 아쉬움을 남긴다. 실록도 인쇄한 것이지만 수정한 곳이 많았다. 삭제, 수정, 첨가, 띄우기, 붙이기, 순서 바꾸기, 인쇄 오류 등 붉게 표시해서 공유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또 전쟁을 피해 실록을 짊어지고 산을 넘고 먼 거리를 이동한 기록도 이번 전시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마지막 방에는 오대산 사고의 사계절을 영상으로 담아 보여준다. 또 역사를 기록해 책으로 엮는 과정을 재현한 영상을 보고 1층으로 내려와 의궤와 실록의 한 부분으로 책갈피도 만들었다.
다시 만들어진 실록은 병자호란이나 6·25전쟁 같은 위기를 넘기고 무사히 지금까지 전해졌다. 실록은 1968년부터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워낙 양이 방대하다 보니 1993년에야 작업이 끝났다. 지금은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인터넷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실록을 읽을 수 있다. 기록의 나라답다.
/김순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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