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개발국 곳곳 갈취 일삼는 다국적 기업 행태 비판적 조명 소송으로 이익 극대화·개발 원조 경제특구도 이윤추구 도구
“이윤 창출이 목표인 기업이 오랜 이념 갈등 끝에 발전해 온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의 거대 기업들은 실제로 권력을 쥐고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새로운 제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들은 국제사법제도를 적극 활용해 각국 정부를 상대로 수십억 달러 규모의 소송을 제기한다. 또 저개발국 원조라는 비즈니스로 이미지와 신용을 제고하며 이윤을 극대화하고, 경제특구를 조성해 최고의 혜택을 누릴 뿐만 아니라 민간 보안 조직을 만들어 국가의 역할을 대신한다.
신간 ‘소리 없는 쿠데타: 글로벌 기업 제국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가’(소소의책)는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저개발국 곳곳을 갈취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의 행태를 비판적으로 조명한 르포르타주다.
영국 언론인으로서 런던 탐사보도센터(CIJ)의 회원 클레어 프로보스트와 매트 켄나드는 2년간 전 세계 25개국을 조사해 기업들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어떻게 뒤흔드는지 분석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폐기와 광산 지분 보유 규정을 도입하자, 다국적 광산 기업들이 ICSID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국 최소한의 지분만 넘기는 조건으로 소를 취하했다.
ICSID는 2021년 말까지 900여 건의 소송을 처리했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돼 있다.
제1부 ‘기업 사법’은 국가와 기업 간의 법적 갈등을 다루며, 기업들이 국가와의 법적 분쟁에서 이익을 관철시키는 방식과 그 과정에서 국제법과 조약의 역할을 살펴본다. 또한, 세계은행이 설립한 국제 중재 기관이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모습과 투자자 보호를 위한 비밀 보험 제도가 초래한 결과를 분석한다.
제2부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와 선진국 대기업들의 금융 활동을 다루며, 이 활동들이 현지 주민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는지, 아니면 대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으며, 이러한 금융 활동이 상위 1% 부자들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탐구한다.
제3부 ‘기업 유토피아’는 경제특구와 같은 기업 중심의 도시 개발 프로젝트를 다룬다. 아일랜드의 사례를 통해 노동자의 권리가 제한된 ‘나쁜 일자리’의 현실을 보여주고, 아시아의 노동 착취 도시들을 통해 기업들이 노동력을 착취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제4부는 기업들이 자사의 보호를 위해 준군사 조직을 운영하거나 군사적 역할까지 수행하는 현상을 다룬다. 이는 민간 경비업체가 경찰력을 대체하거나, 심지어 핵 보안 사업까지 대기업이 맡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 또는 신중세주의로 해석될 수 있다.
저자들은 기업들이 국제사법제도를 활용해 각국 정부를 압박하고, 원조 사업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며, 경제특구와 민간 보안 조직을 통해 국가 역할을 대신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며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해석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례는 기업의 국제사법제도 활용이 민주주의적 입법 취지를 훼손하는 예시로 볼 수 있다.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는 2021년 말까지 900여 건의 소송을 처리했으며, 이는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한국도 론스타 소송 등 해외 투자자들의 타깃이 됐다. 기업들은 이러한 제도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추구하며, 개발도상국의 정책과 법 제정을 방해하고 있다.
저자들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의사 결정을 좌우하는 주체는 기업이라고 단언하며, 기업 권력의 현실을 직시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20세기 이후 민주주의의 승리 대신 기업 권력이 커지며 새로운 인프라가 세워졌다면서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밖에도 민간 군사 조직을 동원해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는 동시에 국가의 역할을 대신하려 한다고 저자들은 비판한다. 전 세계에서 실제로 권력을 쥐고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기업체들의 비상식적인 비상을 ‘소리 없는 쿠데타’라고 규정한다.
“20세기 들어 유럽의 제국들이 무너지면서 뒤이어 일어난 것은 민주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소리 없는 쿠데타였다. 전 세계에서 기업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서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인프라가 세워진 것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