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6년(헌종 12) 2월 12일, 이틀 전에 치른 회시(會試)의 합격자 발표날이었다. 돈화문 밖은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서찬규도 그들 사이에 있었지만 몸이 불편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족형, 덕우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쉬고 있을 때, 급히 전갈이 도착했는데 덕우가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다른 이름은 없었으므로 서찬규는 족형과 자신이 낙방했다고 생각하며 허탈한 마음으로 마루에 나왔다. 조금 뒤에 서찬규의 자형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그의 손을 붙잡고는 합격 소식을 뒤늦게 전해주었다. 순간 서찬규는 꿈을 꾸는 마냥 어리둥절한 채로 잠시 굳어버렸다. 그러다 곁에 있는 족형을 보았고,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말끝을 삼켰다.
이 내용은 서찬규(徐贊奎·182 5~1905)의 일기에 기록된 것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재구성한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서찬규의 일기는 필사본 형태로 17년간의 기록이 담겨 있다. 작성 기간은 21세 때인 1845(헌종 11)년부터 37세 때인 1861년(철종 12년)까지이다. 그는 대구 달성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경양(景襄), 호는 임재(臨齋)이다. 그래서 서찬규의 일기를 ‘임재일기’라 부른다. 1846년 2월 21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했고, 이후 문과(文科)에 부단히 응시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벼슬에 뜻을 접고 향촌에 은거하면서 수동재(守東齋)를 지어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노력했다. 1883년(고종 20)에 경상도관찰사의 추천을 받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서찬규의 과거 응시는 일기가 시작되는 1845년부터 확인된다. 당시 그의 나이 20세였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이 시험은 대구부(大邱府)에서 시행된 정시(庭試) 문과의 초시였다. 원래 정시 문과는 궁전의 뜰[殿庭]이나 혹은 문묘(文廟)에서 왕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하는 한 차례의 시험으로 최종 급제자를 선발했지만, 영조대 이후부터는 1차 시험 격인 초시(初試)를 도입해 서울에서 시행했고 헌종대 부터는 초시를 지방까지 확대 설치해 시행했다. 그래서 서찬규가 이 시험을 대구에서 치를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러나 서찬규는 그다지 실망하지 않았다. 아직 젊었고 이제 시작이었으며 비정기적으로 마련된 문과 1차 시험이었는데다가 시험장소도 자기가 사는 대구였기에 참가만으도로 도전과 경험의 측면에서 의미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서찬규는 낙방 후 불과 며칠 만에 새로운 장소를 찾아 과거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두 번째로 도전한 시험은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생원진사시였는데, 1846년(丙午年)에 회시(會試)를 치르는 식년시(式年試)였다. 그 1단계 시험인 초시를 전년도인 1845년 8월 19일과 21일에 마침 대구부에서 시행했다.
서찬규는 19일 있었던 진사시 초시와 21일 있었던 생원시 초시에 모두 응시했으나 생원시에만 합격했다. 합격 발표가 있었던 8월 25일, 서찬규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과방(科榜)이 발표되었다. 함께 공부했던 8명 중 6명이 모두 종장(終場)[생원시 초시]에 합격했다.
나와 족형 명재씨, 족인 덕우, 구정로씨, 구상천씨, 구사로씨가 함께 응시해 합격했다. 우리 고을에서는 모두 18명이 합격하였고, 그중 우리 집안에서만 5명이었다. 오후에는 덕우가 부모님께 합격 소식을 전하러 떠나는 길을 전송하였다. 저녁이 되자 방노(榜奴)가 와서 시지(試紙)를 가져다주었다. 방성(榜聲)이 거리와 마을에 울려 퍼지니, 양친께서도 크게 기뻐하셨다.”
족형과 덕우도 1단계 시험을 합격했으므로, 서찬규는 이들과 함께 이듬해 2월 10일 서울에서 시행되는 최종 시험 회시(會試)를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마침내 시험 날, 서찬규는 족형, 덕우와 함께 시험장에 들어가 정신없이 답안지를 작성했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먼저 시험장을 빠져나와 밖에서 시험장의 풍경을 바라볼 때 그는 갖은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1846년 2월 12일, 서찬규는 회시 합격 소식을 듣고도 기뻐할 수 없었다. 함께 공부했던 족형이 낙방했기 때문이다. 같은 길을 걸었지만 결과가 갈린 현실 앞에서 그는 말을 잃었다. 환희와 탄식이 교차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기쁨이 상대의 아픔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에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이 장면은 매년 연말연초마다 반복되는 현대의 입시 결과 발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합격자는 환호하고 낙방자는 아쉬움을 삼키지만 시험 결과는 끝이 아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 다시 길이 있듯이, 시험 결과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합격은 앞으로 다가올 도전의 출발점이며 낙방은 더 단단해질 기회를 제공한다. 시험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승부는 그 결과 이후의 시간에서 시작된다.
삶은 멈추지 않고 이어지며 환희와 탄식의 순간은 앞으로도 여러 번 찾아온다. 그러나 그 모든 경험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다음 걸음을 내딛는 힘이 된다. 매년 반복되는 입시와 결과의 풍경 속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로 나타나는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각자가 얻은 경험과 배움이다. 서찬규의 시대에도, 오늘날에도 길은 끝나지 않는다.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나아갈 길을 찾는 태도가 필요하다. 결과는 지나가지만 앞으로의 길은 우리의 선택과 의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 국학기반본부장
최은주 경북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국학기반본부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