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울어 시름하는구나.
아름다움을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니려는구나.
눈 깜짝할 사이에 만나 뵈옵기를 기우리리.
낭이여, 그리운 마음이 가는 길,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오.”
부산성의 창고지기로 차출된 득오가 화랑 죽지랑을 추모하여 읊은 모죽지랑가다. 한 때는 역사의 정점에 있었을 그들이다. 오봉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나무숲 사이 부산산성의 잔해는 겹겹이 쌓인 돌무더기로 남아있다. 옛날 군창지(軍倉址)며 우물과 연병장의 흔적으로 관문성(關門城)처럼 할석(割石)으로 쌓아도 세월의 풍화 속에 대부분 붕괴되고 일부분이 남아있다.
의상대사가 지은 주사암은 죽어나간 사람이 없다고 하여 불사처라 불리기도 한다. 옛날 어느 왕녀가 밤마다 나갔다 돌아오니 왕은 수상히 여겨 그녀의 손에 붉은 주사를 칠해 놓았다. 이튿날 주사암 언저리의 암벽에 붉은 주사를 발견하고 승려를 급박한다. 그러나 승려는 많은 군사를 일으켜 봉변을 면하고 왕은 부처님의 보호를 받는 큰 승려라 여겨 국사의 자리에 앉힌다. 전설은 이름을 주고 오봉산 정상에 큰 바위 두 개가 사천왕상처럼 입구를 지키는 절하나 우뚝하다.
직사각형 네모진 바위가 벼랑 끝에 버티고 있다. 기암절벽은 산의 또 다른 모습으로 낙랑장송과 떡갈나무 사이에 앉을 자리 좁은 산의 정상에 놀랍도록 펼쳐져 있다. 한때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사극 두어 편이 이 곳에서 촬영되었다며 이정표처럼 꽂혀있다. 말로만 듣던 바위에 서보니 세상이 눈 아래 보인다. 어깨를 서로 걸친 산들이 바위를 비호하며 바위를 향해 모두 올려다보는 느낌은 착각일지도 모른다.
명불허전의 마당바위에서 김유신은 보리로 술을 담았다. 천길단애의 위태한 곳에서 하필이면 수백 명의 화랑을 집결시키고 회의를 연 이유를 생각해본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수백 미터 아득한 벼랑이 아닌가. 보여주었으리라. 죽기로 마음먹은 자만이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마음먹지 않으면 적의 칼에 희생될 터 눈을 부릅뜨고 벼랑을 대하듯 적을 베라는 강건한 마음을 전달한 것은 아닐까. 보리술을 나눠 마시며 서로의 마음에 진정한 신뢰와 우의를 다졌을 일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마당바위 한 귀퉁이 촘촘히 돌들을 쌓아올린 공덕탑이 있다. 한 개 한개 쌓아올리며 그만큼의 소원도 함께 쌓았으리라. 정상으로 부는 바람에도 끄떡없이 소원은 빛을 발한다. 누군가 금줄을 쳐두었다. 천년 전 이곳에서 화랑의 도를 설한 자리 옆, 귀 밝은 돌이 그래 그래하며 침묵 속 동감을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풍월을 읊지는 않아도 속세의 시린 속마저 다 버리고 절벽과 마주한 사람들의 등을 따뜻한 눈빛으로 지켜보지 않았을까. 산바람이 능선을 에돌고 장송의 솔잎사이를 비집고 나와 마당바위 귀퉁이에 정좌한다. 마당바위에 서니 세월 속 탁류가 그냥 지나가지는 않은 것 같다. 백성과 왕 그리고 장군이 나라의 하나 됨을 간절히 원했던 신라를 읽어본다. 마당바위에서 세상에 대한 갈급함이 만든 하나의 목적, 당시 시대를 지탱하는 화랑의 힘이었다. 우리에게 이 시대를 유지할 힘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높은 산봉우리가 다섯 개라 오봉산이다. 다섯 봉우리에는 넓은 주름치마 같은 능선과 계곡사이로 여근곡(女根谷)이니 부산성(富山城)이니 주사산(朱砂山)과 유학사 등이 담겨 넉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당바위에 올라 세상사를 내려다보고 민초들의 삶을 어루만질 수 있는 긍휼은 마당처럼 넓고 넓음에서 온 것이리라. 산세가 수려한 이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노라니 조급증도 내려놓고 욕망도 내려놓은 채 젊은 유신이 따라주는 보리술 한 잔이 그리울 뿐이다.
마당바위에 서 보라. 삶이 절벽이라 돌아설 자리가 없는 이 곳에서 다시 한 번 더 시작을 각오하게 되리라. 정상의 바람이 푸른 기운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