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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이 된 ‘좀비 정찬성’

등록일 2023-09-12 16:46 게재일 2023-09-1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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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을 만들고 은퇴한 정찬성의 UFC 경기 장면.

지난 8월 26일 밤, 대한민국의 뭇 남성들은 두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느라 정신없었다. 나도 마찬가지.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 줄줄 새는 눈물에 ‘정신적 수도세 폭탄’을 염려해야 할 정도였다. 여성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울었다. “누가 옆에서 양파를 까고 있는 거지?”라는 서양식 유머가 SNS에 돌았다. UFC 은퇴 경기를 치른 정찬성 때문이다.

본명보다 ‘코리안 좀비’라는 링네임이 더 유명하다. 이 별명이 그의 화끈한 경기 스타일을 말해준다. 아무리 맞아도 쓰러지지 않고 끊임없이 상대를 향해 전진하는 ‘좀비 스타일’은 팬들을 열광시켰다. 좀비가 세계 무대에 진출한 2010년, 그해 격투기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굿즈 상품이 ‘코리안 좀비’ 티셔츠다.

경북 포항 출신의 무명 선수가 세계 무대에 진출해 강자들과 뜨거운 난타전을 벌이며 커리어를 쌓는 동안 격투기는 마이너한 서브 컬처에서 주류 스포츠 산업으로 그 위상이 달라졌다. 레너드 가르시아, 마크 호미닉, 더스틴 포이리에 등을 꺾고 당대 최강의 챔피언 조제 알도와 타이틀전을 벌인 게 2013년이다. 경기 중 어깨가 탈구되는 큰 부상을 입는 바람에 아쉽게 패배했지만,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빠진 어깨를 직접 끼워 맞추려는 투혼을 보였다. 이후 부상 치료와 군 복무 등으로 3년여 공백이 있었지만, 다시 돌아와 이길 때나 질 때나 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명경기를 펼쳤다. 그의 경기는 격투기 그 자체였다.

어느덧 서른 후반이 된 정찬성이 절대 강자인 맥스 할로웨이와 붙었다. 할로웨이의 압도적 우세가 예상됐다. 좀비는 모든 걸 다 걸고 후회 없이 싸우겠다고 했고, 정말 그렇게 싸웠다. 최고의 타격가인 할로웨이를 1라운드에 몰아붙였다. 2라운드에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펀치에 관자놀이를 맞고 쓰러졌고, 목조르기 기술인 ‘아나콘다 초크’에 걸렸다. 기절한 듯 보였다. 그런데 빠져나오는 게 불가능한 그 상황에서 믿을 수 없는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좀비는 좀비였다.

인생의 마지막 라운드라는 걸 직감했을까? 3라운드 공이 울리자마자 전성기 때의 ‘좀비’로 돌아가 할로웨이에게 돌진했다. 싱가포르 경기장이 터질 듯 끓어올랐다. 20초 동안의 엄청난 난타전. 단 0.1초 차이로 할로웨이의 강력한 카운터가 정찬성의 안면에 먼저 꽂히면서 경기가 끝났다. 마침내, 좀비가 쓰러졌다. 쓰러지는 순간까지 허공에 대고 두 방의 주먹을 더 휘둘렀다. 모든 것을 불태운 산화였다. 할로웨이는 정찬성을 일으켜 세운 뒤 마이크를 잡고 “좀비는 진정한 레전드다. 좀비를 위해 더 크게 소리지르라”고 외치며 존경을 표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만 할게요. 4, 5등 하려고 운동하는 게 아니거든요. 후회 없이 준비했는데… 챔피언이 될 수 없으니 그만 해야죠.” 좀비의 17년 격투 인생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언제나 화끈한 난타전을 펼친 탓에 이제는 상대의 주먹을 견딜 내구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불구덩이로 뛰어든 것이다. 은퇴 발표 후 옥타곤을 나서는 순간, 그의 테마곡인 ‘더 크랜베리스’의 ‘Zombie’가 울려 퍼졌다. 패배한 선수의 음악을 트는 건 이례적인데, 은퇴하는 레전드를 위한 UFC의 경의였다. 처절한 싸움에 삶을 다 바친 남자의 마지막 무대. 때로 어느 스포츠의 한 장면은 그 종목보다 위대하다. 모든 관중들이 ‘좀비’를 부르는 함성 속에 싸움을 내려놓은 그가 아내와 포옹하는 순간이 그랬다.

“돈을 벌거나 안전한 승리에만 관심 있는 선수들과 달리 그는 이 스포츠의 실제 모델이다”, “좀비는 챔피언 벨트를 얻지 못했지만 더 위대한 불멸을 얻었다” 정찬성의 은퇴 영상에 달린 해외 팬들의 댓글이다.

좀비의 마지막 상대가 될 수 있어 영광이었다는 맥스 할로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방패를 든 채로 쓰러지는 것보다는 언제나 칼을 든 채로 쓰러지는 것을 택한다”고.

사람들은 묻는다. 모든 걸 불태우면 뭐가 남느냐고. 정찬성이 답한다. 감명과 영감, 그리고 작은 불씨들이 남는다고. 그게 다른 이들의 생으로 옮겨 붙어 빛과 열기가 된다고. 나는 앞으로 용기와 꺾이지 않는 마음이 필요할 때면, 죽을 걸 알면서 온몸으로 온 생애로 죽음을 향해 돌진한, 그렇게 영원히 살게 된 정찬성의 장렬하고 아름다운 산화를 떠올릴 것이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코리안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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