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기억은 골목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길처럼 넓거나 쭉 뻗은 곳이 아니라 옆으로 새어 나온 구불구불한 골목이다. 친구들과 담벼락 아래 앉아 구슬치기와 딱지치기하며 놀았던 곳. 그 골목길을 뛰어가던 부모님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부모님의 결혼은 읍내를 떠들썩하게 했다. 잘생긴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가난했고 외모조차 평범했다. 누가 봐도 기우는 혼사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벌인 일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없었다. 처음에 교사 생활을 하다가 미래가 없다며 그만두었다. 곧 작은 도시에서 보험회사를 차렸지만, 그것도 고객과의 실랑이로 금방 접었다. 하는 것마다 성과가 없는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시장 모퉁이서 국수를 팔아 생활비를 마련했다. 그 처지를 딱하게 여긴 외할머니께서 아버지를 불러들였다.
아버지는 외가 동네에 방을 얻었다. 대문 곁에 조그만 부엌이 딸린 단칸방이었다. 부모님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종일 들에 나가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해도 살림은 좀처럼 일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에 대한 욕심이 없었고 남에게 아쉬운 부탁을 하지 못하는지라 먹고 사는 것에 늘 허덕였다.
또 처가붙이로 살면서 아버지의 마음은 자주 골목 밖으로 나돌았다. 마음이 밖에서 서성이다 보니 농사일은 항상 어머니 몫이었다. 술 때문에, 여자 때문에, 이곳저곳 늘어놓은 외상값 때문에 어머니의 속을 어지간히 태웠다. 저녁때가 되면 골목 저쪽에서부터 술에 젖은 질펀한 노랫가락이 아버지를 앞섰다. 밭에서 일한 어머니의 수고는 뒷전이고 시원한 김칫국부터 찾았다. 그러고는 구판장에 가보라고 재촉했다. 묻지 않아도 외상장부에 한 줄 더 그었다는 말이다.
어느 날, 어린 남동생이 마당에서 놀다가 물통에 고꾸라졌다. 물을 많이 먹어 눈동자가 뒤집히고 몸이 축 늘어졌다. 뒤란에 있던 부모님은 놀라 뛰어나왔다. 순식간에 동생을 업은 아버지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끼고 골목을 냅다 달렸다. 지금껏 가족을 위해서 그렇게 민첩했던 적은 없었다. 병원을 향해 달음박질하던 모습은 평소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골목을 달리다 캑캑거리는 소리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뛰는 것을 멈추었다. 등에 업혀 있던 동생의 배가 홀쭉해진 것을 보고서야 골목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동생이 토해낸 멀건 물이 아버지의 땀과 섞여 흘러내렸다. 새파랗게 질렸던 아버지는 동생의 얼굴에 핏기가 돌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시 가득한 탱자나무 골목은 가족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아버지의 문이었다.
골목은 추억 속에서도 일한다. 초등학교 때였다. 평소에 나는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었다. 배가 고프면 내가 먼저 상위의 밥을 먹어야 했고, 도시락 반찬도 언니와 동생의 것에 코를 킁킁거리며 확인하는 날이 적지 않았다. 하루는 마루에 앉아 밥을 먹는데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렸다.
순간 나는 얼굴이 벌게졌고 목에 걸린 가시를 빼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어도 보고 밥을 한 숟가락 가득 넣어 꿀꺽하고 삼켜도 보았지만 깊이 박힌 가시는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 등을 세게 쳐도 가시는 빠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가슴이 조여 왔다. 나는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다. 구르면서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채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업고 골목을 달렸다. 아버지는 내 신발을 들고 어머니를 뒤따랐다. 마을 입구까지 뛰어가는데 희한하게도 목에 있던 가시가 사라졌다. “엄마, 가시가 빠졌나 봐.” 부모님은 골목에 주저앉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탱자나무 골목에서 아직도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니 내 부모님의 소리다. 동생을 업고 뛰던 아버지, 나를 업고 뛰던 어머니의 숨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골목이 품은 추억은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지만, 빠르게 다가오기도 한다. 오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