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산골 마을에서 자랐다. 읍내에서 십 리를 더 가야만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앞쪽에 넓은 들이 있었지만, 아버지가 농사지을 평평한 땅은 없었다. 부모님은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골짜기를 개간했다. 밤낮없이 비탈밭에 돌을 걷어내고 쟁기질했다. 그러고는 한 달에 두어 번 시장에 나가 산골에서 먹을 수 없는 생선을 사 왔다. 찬 바람이 부는 이맘때 어머니는 청어과메기를 몇 두릅 사 왔다. 그러고는 뒷마당에 있는 뽕나무에 걸어놓았다.
초등학교 다닐 때, 양잠이 성행했다. 마을에 누에를 치는 사람이 하나둘 생기자 부모님도 덩달아 양잠업에 뛰어들었다. 산비탈 밭에 뽕나무를 심었다. 봄이면 아버지는 여린 뽕나무 가지를 지게 한가득 져 왔다. 마당 한 곳에 부려 놓으면 우리는 가지를 훑어 뽕잎을 땄다. 오월 끝자락의 뽕잎은 마당에서도 초록으로 물들었다.
봄의 산비탈은 간식 창고였다. 우리는 사이다병을 구해 산에 갔다. 한 손에는 뽕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겼다. 반들반들한 속살이 보이는 꼬챙이를 들고 사이다병에 오디를 따 넣었다. 그리고 사이다병에 넣은 오디를 꼬챙이로 열심히 찧었다. 팔이 얼얼할 정도로 찧으면 오디는 사이다병에서 뽀글뽀글 거품을 냈다. 그러면 사이다병 주둥이를 입에 대고 끄트머리를 탁탁 치면 국물이 졸졸 흘러내렸다. 지금 생각하면 순수 무결점 오디주스인 셈이다. 이미 손과 입은 시커먼 보랏빛으로 물들었고,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깔깔댔다.
누에를 칠 때는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방 하나를 언니와 같이 사용하는 것도 싫은데 누에와 같이 자는 것도 싫었다. 딸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막무가내로 누에 방을 만들어 버리는 부모님은 더 싫었다. 그러함에도 벽 한곳에 누에 방을 천정까지 닿게 했다.
밤마다 꿈길이 무서웠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면 그때부터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형광등을 켜면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불을 끄고 누우면 또 소리가 났다. 서너 번 형광등 스위치를 껐다 켰다를 반복하다 스르르 잠에 빠졌다. 또 빗소리에 놀라 화들짝 깨면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는 소리였다. 아침이면 내 머리맡에는 까맣고 동그란 누에똥이 수북했다. 누에똥만 있는 게 아니었다. 채반에 있던 누에가 자는 내 얼굴에 떨어졌다. 손가락만 한 누에가 꼬물꼬물 내 몸에서 돌아다닐 때는 몸이 뻣뻣했다.
그래도 새하얀 누에고치를 보면 마음이 맑아졌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고치는 순백의 색이라 여러 가지 상상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지우기도 했다. 잘록한 허리와 통통한 몸은 소설에서 읽었던 여자 주인공 같아 혼잣말로 여러 사람의 대사를 하며 놀았다. 한참을 갖고 놀다 어머니를 도왔다. 겉에 묻은 가느다란 실을 떼고 자루에 차곡차곡 넣었다. 시골에서 유일하게 현금을 만질 수 있는 때라 우리도 한몫 거들었다.
겨울이면 뽕나무가 들썩거린다. 추위가 시작되면 뽕나무에 걸어 두었던 과메기를 꺼내느라 수시로 나무를 기웃거렸다. 어머니는 자주 마루에 앉아 꾸덕꾸덕한 청어 과메기의 껍질을 벗겼다. 누런 쌀 포대기에 대가리 자르고 내장 걷어내고 뼈를 추리고 살점을 발라냈다. 두레 밥상에 앉은 우리는 밥그릇에 초장을 담아놓고 어머니의 손을 살폈다. 아버지 한 입, 어머니 한 입, 우리들 한입, 차례대로 먹었다.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오래 남았다. 청어의 비릿함보다 고소함이 더 강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루었던 뽕밭은 사라졌고 뒷마당 뽕나무에 걸쳐놓았던 과메기도 사라졌다. 내 유년의 따스한 윗목의 그리움 한 조각도 사라졌다. 그래도 상주시 은척면 두곡리에 삼백 년 된 뽕나무가 있다고 하니 참 다행이다. 어쩌면 거기 뽕나무가 들썩이고 있을지도. 봄이 오면 그곳으로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