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버린 배’<br/><br/>줄리언 생크턴 지음<br/>글항아리 펴냄·인문
“2년여에 불과하지만, 돌아올 때 그들은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얼음의 압박을 목격한 이들은 공포에 사로잡혔고, 몇몇 선원은 돌아와 온갖 증세에 시달렸다. 피로, 끊이지 않는 두통, 신경성 문제, 불면증, 심장 이상 증세, 숨 가쁨, 현기증….”
‘미쳐버린 배’(글항아리)는 최초의 남극 과학 탐사를 배경으로 한 논픽션이다. 저자인 미국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줄리언 생크턴은 1897년 남극 탐험을 떠난 벨지카호 선원들이 조난에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조명해 많은 울림을 준다. 벨지카호 사람들의 대담함, 불굴의 용기, 상황 대처 능력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또 그것을 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극지 스릴러 걸작이다.
저자는 1897년 8월 16일에 출항했다가 1899년 11월 5일 벨기에로 돌아온 원정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조명하고자 시도한다. 항해일지와 선원들의 일기, 책, 미공개 기록 등을 토대로 5년간 벨지카호의 여정을 좇았고, 현지 조사를 위해 남극에 직접 가보기도 했다.
1897년 벨지카호의 남극 원정에는 19명의 선원이 함께했다. 이 배를 이끈 인물은 31살의 사령관 아드리앵 드 제를라슈였다. 유서 깊은 벨기에 귀족 가문 출신인 제를라슈는 어려서부터 선박 모형을 갖고 놀며 오로지 바다 위에서의 삶을 꿈꾸었다. 그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군에 입대했고, 이후 네덜란드 원양 선박 등에서 일했으며, 마침내 마음속으로 품었던 원정대를 직접 꾸리기로 결심했다. 제를라슈는 과학적 임무를 탐험의 첫째 목표로 삼았지만, 세계지도 하단에 있는 텅 빈 공백을 채우겠다는 낭만적인 꿈도 품었다. 그리하여 3년 넘게 이 탐험을 계획했고, 함께할 사람들을 구했으며, 기금을 모았다. 하지만 그의 주위에 낙관주의자들은 별로 없었다. 제를라슈는 이에 굴하지 않고 확고한 결단력으로 마침내 투자자들과 정부 지원까지 끌어냈다.
그는 단순히 모험정신을 넘어서 이 탐사로 벨기에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겠다는 짙은 애국심, 가문의 이름을 빛내겠다는 명예욕까지 품었다. 애초에 드 제를라슈가 세운 목표는 위도 75도 부근에 있는 남자극점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남자극점의 정확한 위치를 정하면 향후 항해사들이 나침반 판독을 더 정확히 할 수 있을 테고, 따라서 벨지카호의 결정적인 업적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었다.
19명의 선원은 오합지졸까진 아니더라도 정예 요원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구성원으로는 제를라슈의 오랜 벗 단코, 아직 대학 졸업을 못 한 23세의 폴란드 출신 지질학자 아르츠토프스키, 27세의 동물학자 라코비차 등이 있었고, 1년 내내 고르고 고른 선원들도 자격 미달이 꽤 있었다.
책은 이들의 탐험 정신, 명예욕, 과도한 승부욕, 괴혈병에 걸려 창백하게 무너져가는 모습, 단조로운 통조림 음식에 미쳐가는 정신 상태 등 인간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몰입감 있는 서사를 전개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범속한 인간들과는 달랐다. 끊임없이 신체 단련을 하고, 남극 빙하에 갇혀서도 살아남을 만큼 임기응변의 능력을 발휘하며 식물, 동물, 지질학 데이터를 수집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40년은 걸려야 작업이 마무리될 정도로 이들 과학자가 새롭게 발견해 가지고 온 표본의 양은 방대했다.
배는 1897년 8월 16일에 출항했다가 2년도 더 지난 1899년 11월 5일 아침에야 돌아온다. 그사이에 선원 한 명은 바다에 빠져 죽고, 다른 한 명은 질병으로 죽는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배에서 가장 경험 많고 신뢰할 수 있었던 갑판장 톨레프는 정신이상 증세를 안고 돌아오며, 그는 이후 평생 수용소 같은 농장에 갇혀 지내는 말로를 맞이한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 두 사람, 그중 한 명인 쿡은 감옥에 갇히고, 다른 한 명인 아문센은 영웅이 된다. 이 모든 이야기를 저자는 추적과 조사, 치밀한 서사 능력으로 그려 나가고 있다.
최초의 목표였던 남극점 도달에는 실패했지만, 이들의 위대한 도전은 많은 과학적 성과를 남겼다. 펭귄과 심해어, 동·식물 표본 등이 새로 이들에 의해 발견됐고, 기상 및 해양학 관측 기록들은 학문의 새 지평을 열었다. 이들의 탐험은 남극의 중립화에 큰 역할도 했다. 그들의 도전 정신과 연대는 오늘날 미국 항공우주국 대원들의 귀감이 되는 것을 넘어서 도전을 두려워하는 현대인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윤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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