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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등록일 2022-03-22 18:11 게재일 2022-03-2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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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태수필가
조현태수필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이 두 가지를 모두 했던 사람이 있었다. 1822년 독일에서 출생한 하인리히 슐리만. 그가 7살 때 아버지가 선물로 사다 준 ‘어린이를 위한 세계사’를 읽고 트로이라는 도시가 실재하는 장소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 믿음은 그의 일생에 포기할 수 없는 꿈이 되었다. 41세가 되던 해 고고학자의 삶을 시작하였고 마침내 소아시아 트로이 유적 발굴에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유적 탐사의 과정에서 엄청난 보화들을 찾아냈다.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인물이지만 유명한 만큼 논란과 비난의 대상이기도 하다. ‘과학적 고고학의 아버지’, ‘새로운 학문의 선구자’로 찬란한 조명을 받는 반면, ‘더러운 도굴자’, ‘비과학적인 고고학의 초심자’, ‘문명 파괴자’ 같은 비난을 받기도 한다. 한 인물에 대해 이렇게까지 반대되는 평가가 공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슐리만은 무역과 은행업 등에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리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고고학을 공부하며 발굴 작업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1869년, 아름답고 헌신적이며 ‘일리어드’를 잘 아는 그리스 처녀와 결혼했다. 이듬해 4월, 슐리만과 아내는 조사활동을 시작하여 3년 동안 일꾼 100여명을 데리고 37m 높이 언덕에서 트럭 25만대 분이나 되는 흙을 파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오스만 튀르크 정부의 발굴허가를 받아 1871년 10월 첫 발굴을 했다.

이후 20년에 걸쳐 7차례 발굴 작업을 한다. 그 결과는 전 세계에 흥분과 충격을 안겨준다. 트로이에만 너무 열중한 탓에 다른 시대 건물들을 무너뜨리거나, 중요한 역사적 실마리가 될 벽돌을 깨뜨리며 깊이 파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엄청난 실수 때문에 오히려 여섯 번째 층에 묻힌 평생소원이던 트로이가 드러나게 된다. 프리아모스 궁전이라고 믿는 돌 건물 8.5m 아래에서 어마어마한 보석이 발견된다. 팔찌, 브로치, 목걸이, 접시, 단추, 등. 금으로 만든 것이 자그마치 8천700여점과 화려한 금관까지. 결국 평생 꿈꾸어 온 트로이의 보물을 손에 거머쥔다.

이 보물들은 후일 슐리만의 유언에 따라 베를린의 선사시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일에 진주한 소련군에게 탈취당해 지금은 러시아가 보관하고 있다.

슐리만의 발굴 작업 결과 히살리크 언덕은 도시의 폐허가 여러 겹으로 중첩된 고고학의 보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들이 수천 년간 번영과 멸망을 반복한 장소였다. 이 과정에서 슐리만은 도자기들과 고고학의 방법론인 층서학(stratigraphy)에 큰 관심을 가졌다. 층서학을 슐리만이 처음 고안해 낸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복합적이고 광범위한 스케일로 층서학을 적용하여 발굴하고 연구한 것은 슐리만이 처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재물에 욕심이 있어서 도굴에 비견할 만한 일을 했던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많은 역사적 자료를 파괴하고 훼손한 것은 사실이지만 트로이 유적을 찾아내고 인류문명의 생생한 역사를 증명한 공로는 마땅히 인정해야 할 일이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키워온 꿈의 발현이라는 생각에 지금 시대에도 필요한 가치는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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