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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과 패션으로 그린 원초적 욕망 ‘아름다움’

등록일 2022-01-17 20:33 게재일 2022-01-18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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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우가 만났다 <br/>최복호 패션 디자이너

옷은 인간의 역사와 같이 변화해 왔다. 의식주(衣食住)라는 생존의 기본 조건에서 소속된 세계의 신분 질서를 넘어 개성과 자기표현의 수단으로까지 진화했다.

옷이 표현하는 패션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에 충실하면서 마침내 삶의 질과 가치를 높여주는 문화가 되고 있다.

섬유도시 대구에 패션 산업의 기초를 다지고 대구 브랜드를 세계에 내놓은 최복호 1세대 패션 디자이너. 그는 문화의 힘이 경제의 힘을 능가하는 시대에 살면서도 집에 이발소 그림 하나 걸려 있지 않은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꾸짖는다. 그에게 아름답고 멋있게 사는 것은 결코 사치가 아니다.

 

예술가는 자신의 사고·철학을 바탕으로

개인의 세계를 각 분야에 표현하는 사람

패션디자이너와 화가 하나의 소실점 귀결

“환경오염·지하철 참사 진혼제 패션쇼 등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디자이너죠”

대구 후배들의 성장 밑거름 되고자 노력

지역 섬유와 전국 디자이너 가교적 역할

올해 우리 골목부터 컬러·색을 입힐 계획

시니어 놀이터 ‘할배 할매의 거리’ 만들 것

노인문제 해결하는 한 방법이 될 수도…

 

- 작업실이 예술품 수장고 같다. 도심 한복판에 넓은 공간과 높은 천장은 야외도 아닌 촬영 세트장 같은 느낌이다.

△나나랜드라고, My land, My life, 문화공장 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 골목이 대구의 침장골목이다.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제분공장이었다. 내 작업실 겸 매장 겸 공연장 겸 놀이터인 셈이다. 이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도 나누고 때로는 시니어들의 패션쇼나 연주회, 공연도 한다. 더 크게 아주 멋진 놀이 공간을 펼치고 싶었는데 코로나19가 덮치는 바람에 주춤해 버렸다. 정말 아쉽게 됐다.

 

- 패션 디자이너에서 화가로 변신했다. 초대전이 성황을 이뤘더라.

△큰 틀에서 보면 예술가는 자신이 가진 사고와 철학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계를 각 분야에서 정해진 규칙과 룰에 따라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표현 방식과 규칙에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하나의 소실점으로 귀결되는 것 아니겠나.

패션 디자이너로 48년간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것은 입체에 그림을 그린 작업이었다. 그림은 지금까지의 활동을 평면으로 펼쳐 놓는 것이다. 근본적인 예술 활동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패션 디자이너로서 작업하고 있다.

아침 일찍 청도 각북의 작업장 ‘펀앤락’으로 가서 업무를 보고 오후에는 이곳에 와서 그림을 그린다. 화가들이 한 가지 작업, 형식이나 대상이 일정하다면 나는 작업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정물도 했다가 인물도 했다가 추상도 하는 그런 식이다.

비빔밥, 서로 다른 것들이 섞여 맛을 내는 것. 그 속에는 간이 들어간다. 발효시킨다. 패션이란 다른 것을 섞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 가치가 바로 아름다움이다. 패션이 미술이다. 지난해 대백 초대전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 패션 디자이너 최복호는 어떻게 탄생했나.

△대학 재학 중 입대했다가 제대한 뒤 복학 대신 국제복장학원을 선택했다. 교회 목사가 되겠다며 철학과에 입학했고 그때 동기 중 목회자도 꽤 있다. 어릴 적 교회에서 목사님이 미술 장식물 과제를 잘 해내는 모습을 보고 디자이너가 되면 좋겠다는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명성을 떨치던 앙드레 김을 비롯해 디자이너의 80%가 국제복장학원 출신이다. 패션 디자이너가 아티스트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였다.

 

- 디자이너에서 화가로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 최복호는 어떤 영역의 작가일까.

△패션사를 쓰는 사람이라면 나를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디자이너’라고 분류하지 않겠나 싶다. 90년대 환경 오염문제를 고발했던 패 션 퍼포먼스, 대구 지하철 참사를 진혼제 형식으로 발표했던 2003년의 패션쇼 등을 보면 내가 그 동한 어떤 문제에 천착해 왔던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내 데뷔작품의 메인 테마가 ‘고발의상’이었다. 화가로서는 아무래도 그러한 사회적 문제보다는 ‘자연’이라는 내면의 본연에 충실하게 된다. 어린 시절 내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서성이던 산등성이, 들판의 아련함 등이 노년이 된 내게 아직까지 ‘그리움’과 ‘가슴 먹먹함’이라는 감정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 데뷔작이 ‘의처증 환자의 작품 D’라는, 도발적이고 당시로서는 생경했을 듯하다.

△1973년 조선호텔에서 작품전을 열었는데 당시 ‘선데이 서울’이 내 작품을 화보로 실었을 만큼 센셔이셔널을 일으켰다.

중부전선 3사단에서 군종 사병으로 근무하면서 수많은 사망 사건을 뒤치다꺼리 했다. 당시 병사들의 자살 사건 주요 배경에는 거의 사랑과 배신이 있었다. 군대 용어로 ‘고무신 바꿔 신은 것’이 원인이었다. 그걸 화두로 중세 정조대를 현대로 불러내 완성한 작품이다.

 

- 작업실 그림이나 디자인한 의상 등 작품들이 테마의 엄숙함이나 진지함보다는 밝고 경쾌하다. 작품들은 구성도 분방하고 그 색들은 화려하다.

△인생은 즐거워야 한다.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아름다워야 한다. 그것이 예술이고 인생이 지향하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지금 시대는 문화의 가치가 경제적 가치를 능가하는 시대다. 이제는 삶의 질과 가치를 높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문화다. 패션 디자이너에게 그 문화의 가치는 바로 브랜드의 가치이고 그것이 디자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모두가 지쳐 있는 이때 아름다움은 지쳐있는 삶에 원기를 불어 일상을 회복시켜주는 치유의 능력을 발휘한다.

- 디자인과 그림 그리기, 패션쇼 등 창작활동만도 분방하다.

△나는 혼자 노는 데 익숙해 졌다. 혼자서 외로움을 타지 않아야 한다. 초등학교를 6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사람이 그리워서였다. 외로움을 떨치려 SNS를 일찍 시작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으로 소통하고 있는데 팔로우가 2만명 가량 된다. 잘 놀아야 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즐겁게 노는 것이 삶의 한 목표가 되어야 하고 그것이 최복호의 작품이 지향하는 목표다.

 

- 패션 디자이너로서 최복호의 활동 전성기는 언제였나.

△뉴욕 파리 런던 도쿄 베이징 등 정말 많은 도시에서 내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여러 나라 다양한 사람들과 인사하며 그들과 소통했다. 중동 쿠웨이트 매장에서 내 옷을 사입는 이슬람 여성을 보면서 내가 패션 디자이너가 된 것에 감사했다.

전성기를 논하기엔 아직 내게 남은 시간이 많고 또 내가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는 10년 후에나 다시 만나서 얘기해보면 좋겠다.

 

- 디자이너의 일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나 작업은 어떤 것인가.

△내 아이와 함께 패션쇼를 했던 작업이 기억에 남는다. 국내 대학을 나와 영국 세인트 마틴을 졸업하고 일하던 소속사를 나와 지난 2016년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한 아이와 함께 패션쇼를 열었던 일이다.

 

- 섬유도시 대구와 패션 디자이너의 세계에서 남긴 업적이라면.

△대한민국의 1세대 디자이너로서 전 세계에 한국 패션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기여함으로써 내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패션계의 대모 최경자 선생이 한국 디자이너들의 역사를 집필하면서 나를 “대구에 내려가 활동하는 뛰어난 감성의 디자이너 최복호, 이대 앞에서 시작한 그가 대구로 간 것은 너무도 아쉽지만 확고한 그의 철학을 믿기에 대구로 간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썼더라.

대구의 디자이너로서 내 역할은 ‘지하철 참사 진혼제 패션쇼’ 등 대구 사람이 겪었던 아픔을 내 방식으로 전 국민에게 알리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지역 브랜드 최초로 TV홈쇼핑에서 로얄티를 받았다. 이제 대구에서 서울을 거치지 않고도 세계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었다.

또한 대구의 후배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고자 애썼고, 대구의 섬유가 전국의 디자이너와 이어질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다하려 노력했다.

- 누가 최복호 패션을 입는가. 누구를 위해 패션 디자인을 했나.

△양장점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롯데 현대 신세계등 전국 25개 백화점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주 고객은 시니어 층이다. 그렇다고 그들만이 고객은 아니다. 나훈아의 공연에 연세 많은 관객과 그의 딸, 손녀들이 함께 찾는 것과 같다.

나도 여러 가지 브랜드를 통해 다양한 고객과 마주하고 있다. 해외에는 쿠웨이트, 프랑스, 미국 등 7개국에서 고객을 만나고 있다.

걸그룹 소녀시대 ‘태연’과 ‘써니’가 내 의상을 입고 광고를 찍었고 미국 영화배우 우피 골드버그가 내 옷을 입고 미국 토크쇼에 출연했다. 요즘 많이 하는 돈을 주고 하는 광고 형식의 계약이 아니었고 그들의 스타일리스트가 직접 부탁을 했고 협찬 형식으로 진행했던 일들이다.

 

- 패션은 시간을 앞서 간다고 했다. 얼마나 앞서 생각하고 작업하고 있나.

△시간을 앞서 간다기보다 그 흐름을 잘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용필이 2013년 발표한 바운스를 들어보면 젊은 세대가 들어도 전혀 올드하지 않다고 했다. 나는 그 시대에 맞게 그 흐름에 맞게 늘 작업 방식을 변화해 왔다.

더구나 지금은 정보의 처리 속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디자이너는 물론 소비자가 더 똑똑한 세상이다. 유행을 캐치하거나 따라 잡거나 앞서가는 것을 논하는 시대가 아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객관화시키고 자신의 아이콘을 만드는 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 디자이너 최복호에게 아름다움의 원천은, 디자인의 아이디어는 어디서부터 나오나.

△유행은 사람의 몸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파리도 뉴욕도 아니다. 몸이 요구하는 원초적 본능, 그건 육체를 드러내는 거다. 청바지 허리춤이 내려오고 쫄바지 스키니즈가 등장하지 않았나. 지금은 커텐도 망사로 진화하고 있다.

 

- 패션 디자이너로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나.

△컬러풀 대구에 컬러가 없다. 그래서 올해는 우리 골목부터 컬러, 색을 입힐 계획이다. 그리고 시니어들이 놀 수 있는 노인 전용 골목을 만들고 싶다. 교통 접근성이 좋은 곳에 있는 죽어가는 시장을 리모델링해서 ‘할배 할매의 거리’를 만드는 거다. 거기서 갈 곳 없는 노인 세대들을 안아주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문제가 되고 있는 노인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자신부터 나이가 드니 시니어들의 공간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멋있게 늙으면 치매 걸릴 여유도 없을 거다.

 

최복호 (崔福浩·73)

선산출생. 성광고, 계명대 철학과 중퇴. 국제복장학원 졸업. 경일대 및 대학원 섬유패션학과 졸업.

대구패션협회 초대회장, 대구미래대·경일대 겸임교수, 패션아카데미 회장, 한국 모델리즘 산학교수협회 공동대표, 한국패션협회 부회장, 대구패션조합 이사장을 역임.

현 ㈜씨앤보코 대표이사 및 대표 디자이너, 한국패션협회 이사.

한국섬유대상, 2014년 한국 패션의 글로벌화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1973년 패션 디자이너로 데뷔해 48년간 디자이너로 활동. 섬유도시 대구에 패션 산업의 초석을 놓은 패션 디자이너 1세대로 지금은 노년의 삶을 즐겁고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디자이너로서의 역량을 발휘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경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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