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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소리

등록일 2021-05-02 19:08 게재일 2021-05-0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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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재<br>포항예총 회장
류영재포항예총 회장

이른 봄꽃이 필 무렵부터 시작하여 산천에 녹음이 짙어진 지금까지 주말마다 대구에 다녀오는 일을 되풀이 하고 있다. 피치 못할 일로 가는 먼 길이지만 고속도로 주변은 넘쳐나는 연초록의 물결로 ‘신록예찬’이 절로 떠오르는 황홀한 풍경이라 이를 매주 감상하는 것은 행운이다. 돌아오는 길, 무심히 차창 밖을 보다 깜짝 놀랐다. 온통 누렇게 색이 변한 대나무 숲을 만났기 때문이다. 겨울철에도 변함없이 푸름을 자랑함으로써 군자의 절개를 상징하여 사군자의 하나로 불리는 대나무가 이 초록의 계절에 어찌 저리 되었는가.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백년에 한 번 핀다는 ‘대 꽃’이 핀 것일까?

대나무는 평생에 한 번 꽃을 피운다. 대나무는 여느 식물들과 달리 꽃가루 번식이 아니라 뿌리로 번식한다. 더 이상 뿌리로 번식할 수 없을 때 꽃을 피우는데, 그러니까 죽기 전에 마지막 의식으로 꽃을 피우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은 죽지만 대나무의 죽음이 특별히 장엄한 까닭은 죽음을 무릅쓰고 꽃을 피워 종족보존의 본분을 다하려는 데 공감하기 때문이다.

‘죽음공부’를 하는 지인이 있다. 죽음이란 것이 살아 있는 동안은 어떻게든 피해 다니다가 어느 날 막다르고 후미진 곳에서 강도에게 급습 당하듯 맞닥뜨려야 하는 험악한 얼굴이 아니라 가능한 한 ‘살아서’ 죽음의 순간을 실감하고 싶어서라 한다. 그의 지인 중에는 죽음이 완전 소멸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한다. 죽음 후에 아무것도 없다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죽는 걸로 끝이라면 구태여 착하게,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사람답게 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고작 몇 십 년 사는 거, 나 위주로 살면 그 뿐이다. 그렇지 않고 잘 죽을 준비를 위해 필요한 것이 죽음공부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란 묘비명을 남기며 모든 이로부터 추앙받던 정진석 추기경의 선종 소식은 인간의 생명이 유한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였다. 각막기증으로 마지막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남김없이 주고 떠난 고 정진석 추기경의 장례 미사가 치러진 명동성당에는 궂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신자들이 모여 추기경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별다른 조각 장식이 없는 삼나무로 짠 관 위에는 성경책 한 권만 놓여 있는 소박하여 더욱 엄숙한 장례 미사에서 염수정 추기경의 추모사,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인지 알려주셨다.”처럼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

고층아파트 불빛을 등지고 한 구비만 돌아들면 산골마을로 변하는 우리 마을의 초입에는 길 좌우로 키 큰 왕대나무들이 즐비한 구간이 있다. 마치 대나무 열병식이나 대나무 터널을 연상케 하는 이곳을 통과하며 이웃에 사는 선배는 여기가 마치 인간계와 자연계의 경계인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굳이 그 말이 아니더라도 필자 역시 그곳을 지날 때면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전생과 현생, 혹은 현생과 내생의 경계를 넘나드는 느낌을 느끼곤 한다.

군더더기 없이 살기 위해 속을 비운 대나무, 하늘 향해 곧게 자란 성깔 있는 존재, 대쪽 같은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죽비소리 ‘타닥!’, 굽은 등줄기를 내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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