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에 행운목 한 토막을 샀다. 길가에 늘어놓고 파는 것을 지나다가 별 생각 없이 산 거였다. 세 개의 순이 돋아 있는, 팔뚝 굵기로 한 뼘 가량인 행운목 토막을 수반에 세워 두고 가끔씩 물을 갈아 주었다. 어둡고 비좁은 내 방에 생기를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건 흐뭇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몇 달을 못 가서 두 개의 순이 시들어 버렸다. 하나 남은 순도 곧 시들 것 같아서 에멜무지로 떼어서 작은 화분에다 옮겨 심었더니 뜻밖에도 잘 자랐다.
내가 보탠 것은 이따금 물을 준 것 밖에 없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크고 푸른 잎을 무성하게 단 의젓한 식물로 자라 내방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햇볕이 들지 않아 상당히 열악한 환경일 텐데도 저토록 왕성하게 자란다는 것은 필시 좋은 징조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란 말이 있지만, 저 행운목이 전하는 메시지는 ‘삶이 행운(幸運)이라는 걸 기억하라’는 게 아닐까 싶다. 가진 것도 이룬 것도 별로 없는 삶일지언정 살아있다는 건 분명 행운이라는 걸 부단히 환기하는 것 같다.
운명(運命)이라는 걸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재수가 없는 놈은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있듯이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을 때는 팔자소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물론 없지가 않아서 운수대통이라는 말도 있다. 인생에 정해진 운명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인 것인지, 제 하기 나름으로 팔자나 운명은 얼마든지 달라지는 것인지, 동서고금에 여러 갈래의 주장과 신념들이 분분하다.
기독교에서는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고, 불가에서는 일체의 현상을 ‘연기법’에 의한 것으로 본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이 다 헤아릴 수는 없으니 무조건 믿고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기독교적 세계관이고,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 인과율에서 자유로운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불교적 세계관이다. 둘 다 세상사에 우연(偶然)이란 없다는 것과, 그렇다고 정해진 운명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는 다르지가 않다. 하지만 흔히들 ‘운이 좋다’거나 ‘재수가 없다’는 말을 다반사로 쓰고 있듯이 운수(運數)에 대한 생각이 아예 없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노력여하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바뀔 수도 있는 게 운명이란 생각도 대다수인 것 같고.
개인에게 운세가 있듯이 나라에도 흥망성쇠의 국운(國運)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국운이 집권자의 자질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는 걸 요즘처럼 절감한 적이 없었다. 문재인 정권 4년 동안 나라 도처에 불길한 조짐이 드러나고 있다. 정치, 경제, 안보, 외교, 교육, 언론 어느 하나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수천 년을 이어온 나라도 하루아침에 패망할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피땀으로 쌓아온 대한민국을 더이상 저들의 손에 맡겨서는 안 되겠다는 경각심이 드는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민주주의국가라면 모든 책임도 결국 국민에게 있다. 국민의 의식수준이 국운의 향방을 가른다는 걸 모두가 명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