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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이야기

등록일 2020-12-17 18:53 게재일 2020-12-1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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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 <br>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밤밤 겨울밤은 추워도/ 우우 우리들은 즐거워/ 화롯가에 둘러앉아서/ 호호 밤을 구워 먹으며/ 먼먼 옛날얘기 듣지요.// 밤밤 겨울밤은 깊어도/ 우우 우리들은 안 졸려/ 손 쳐들고 그림자놀이/ 멍멍 바둑이도 나오고/ 깡충 옥토끼도 뛰지요.” 어렸을 적에 불렀던 노래다. 독일 민요에 우리말 가사를 붙인 동요인데, “부엉 부엉새가 우는 밤/ 부엉 춥다고서 우는데/ 우리들은 할머니 곁에/ 모두 옹기종기 앉아서/ 옛날이야기를 듣지요.”라는 노랫말도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겨울밤의 정경이다.

동지(冬至) 무렵이면 밤이 낮보다 네 시간이나 더 길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물론 전깃불조차 없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동짓달 기나긴 밤’이었다. 그 겨울밤 어둑한 호롱불 밑에서 할머니는 바느질을 하거나 이를 잡고, 아이들은 숙제를 하거나 손장난 발장난을 하며 놀았다. 위의 동요에 할머니와 아이들만 등장하는 것은 아이들과 할머니가 한 방을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왜 그런지 할아버지가 없는 집이 많았다.

창호지문 하나로는 겨울밤 바깥의 한기를 다 막기에 역부족이면 방안에다 화로를 들였다. 군불을 때거나 저녁을 짓고 남은 잉걸불을 재와 함께 무쇠나 놋쇠로 된 화로에 담아 방안에 들여놓으면 그 열기가 오래 갔다. 화로를 가운데 놓고 식구들이 둘러 앉아 손을 쬐면서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던 정경이 눈에 선하다. 화로의 용도는 난방뿐이 아니라 밤이나 고구마를 구워먹을 수도 있고 할머니 담뱃불을 붙이는 불씨가 되기도 했다. 이를 잡을 때도 옷을 화롯불에 쬐면 솔기에 숨어있던 이들이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기어 나왔다.

밤늦도록 놀다보면 배가 출출해지기 마련이다. 화롯불에 구워먹을 밤이나 고구마가 있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밭머리에 묻어둔 무를 꺼내와 깎아 먹는 것도 겨울밤의 요긴한 간식거리였다. 감나무가 있는 집에는 홍시나 곶감을 만들어 두고 겨우내 먹기도 했다. 그도 저도 없으면 처마 밑의 고드름이라도 따다 먹었다. 동네 총각들이 사랑방에 모여 놀다가 닭서리를 하는 것도 겨울밤이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없던 그 시절에는 할머니의 옛날 얘기가 드라마나 영화 이상의 몫을 했다. 효녀 심청, 흥부 놀부, 콩쥐 팥쥐, 장화홍련, 우렁각시,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선녀와 나무꾼, 소금 맷돌…. 여러 번 들어서 잘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심심할 때마다 그 얘기를 또 해달라고 할머니를 졸랐다. 긴긴 겨울밤 할머니의 ‘이바구’는 권선징악(勸善懲惡)과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교훈과 함께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하는 소재이기도 했다. ‘옛날 어느 고을에’로 시작해서 ‘잘 묵고 잘 살았더란다’로 끝나는 해피엔딩의 재미와 감동은 안정된 정서의 바탕이 되고 굳건한 삶의 근간이 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그 겨울밤이 문득 그리워지는 겨울밤이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 박용래 ‘겨울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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