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초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두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있다.
다빈치는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 등 주로 그림을 그렸고, 미켈란젤로는 ‘피에타’와 ‘다비드’ 같은 조각을 남겼다. 20여 년의 터울을 두고 활동한 이들은 작품의 이름만 들어도 다 알 수 있는 수많은 걸작들을 역사에 남긴 상호 존중과 품격의 모드를 갖춘 선의의 라이벌이었다. 하지만 배경이 조금 다른 라이벌이 있었으니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로 처음엔 둘 다 조각가였으며 명성은 다소 생소하지만 경쟁과정과 승패의 대립구도는 앞선 라이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격렬했다.
1401년 유럽인구 3분의 1을 집어삼킨 페스트의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을 때 예술의 도시 피렌체는 도시분위기 일신의 차원으로 조반니 세레 당을 치장하는 사업공모를 내걸었다.
내로라하는 당대의 미술가들이 공모에 참여했고 결승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22살의 견습 화가 기베르티와 한 살 위인 금 세공사 브루넬레스키 두명 이었고 이들에겐 바로 34kg의 청동판 위에 일년 동안 4엽 장식으로 구약 성서에 나오는 ‘이삭의 희생’을 표현하라는 오더가 내려졌다.
이 숙명적인 세기의 대결에서 유실 왁스기법의 작품을 제출한 기베르티가 최후의 승자로 낙점됐고 승자가 된 기베르티는 1403년 피렌체시와 동쪽 문에 28개의 부조를 만드는 계약을 체결하고 21년 후에 완성했다. 그렇다면 패자가 된 브루넬레스키의 행보는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세계의 저명한 건축가들은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건축물 중의 하나로 ‘피렌체 대성당’을 선택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5세기 초에 건립된 작은 교회를 대도시로 성장한 피렌체 시에 걸맞게 웅장한 규모로 개축하기 시작한 해는 1천296년이었고 1천436년에야 완공됐다.
140년 동안 쟁쟁한 건축가들이 건설 현장을 수없이 다녀갔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건축가는 단 한 명 브루넬레스키 뿐이다.
종전의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55m 높이의 팔각형 건물 위에 직경 45m가 넘는 거대한 돔 지붕을 얹는 대과업이 그의 집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혼자서 기중기를 개발하여 3만7천여 톤에 달하는 건축자재를 들어올리고 400만개의 붉은 벽돌을 쌓아 올려 스스로 지탱하는 기적과도 같은 돔을 완성했다.
그는 죽은 뒤 성인이 아니면 허락하지 않았던 대성당의 지하납골당에 묻혔다. 거친 경쟁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길 때보다 질 때를 더 많이 경험한다. 그러나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 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다.
기베르티에게 패한 다음 그대로 주저앉았다면 피렌체 대성당은 여전히 비가 들이치는 뻥 뚫린 구멍을 간직한 초라한 건축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라이벌 대결에서 패배하여 좌절한 마음을 달래며 로마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고 마침내 피렌체로 다시 돌아와 세계 건축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불멸의 명작을 남긴 한 인간의 열정과 가슴 뭉클한 인생역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결코 적지 않음을 그 흔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