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넘은 밤, 할머니의 SNS 장례식이 있었다. 할머니가 해외에서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캐나다 현지 시간에 맞춘 일정이었다. 한국에 있는 우리부부는 평소 같으면 잠든 시간이었지만 검은색 옷으로 예를 갖추어 앉았다. 식탁 위 십오 인치 노트북을 바라보고 나란히 앉은 남편과 나는 긴장했다. 전날부터 인터넷 환경을 점검하고 음향 테스트도 했다. 단정한 손수건 두 개도 준비했다.
인터넷 와이파이 망으로 현지 장례식장이 연결되었다. 고인의 생애와 작별 인사가 노트북 화면으로 전파되었다. 누워 깊은 잠이 든 할머니가 보였다. 분명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였다. 구십팔 세가 되도록 장수하셨던 할머니는 태블릿 피시를 사용할 정도로 새로운 것을 수용하길 좋아하는 노인이었다. 명절에는 음성 채팅 서비스를 이용하여 고국에 사는 자손들을 축복해 주셨다.
“할머니가 늘 기도한단다. 우리 손녀내외 감사하고 즐겁게 살아라.”
할머니는 당신의 수명이 다할 것을 직감했다. 냉동고에 유언서와 현금을 밀봉해 놓고 잠드셨다. 나는 봄이 오면 할머니를 찾아뵙겠다고 다짐 했었다. 후회해도 소용없다. 몇 달 후 전염병이 퍼져 국가와 국가뿐 아니라 미주 지역 내에서도 출입이 통제될 줄 몰랐다.
일 초의 순간, 한 번의 손가락 터치로 COVID-19의 장벽을 넘었다. 소설 페스트가 발표될 이십 세기 초 무렵에는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육대주가 링크되어 시공간을 공유하는 날이 예측되었더라면 카뮈의 소설 플롯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이십 년 후 화성에서 내가 조카 결혼식을 어떤 방식으로 축하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인류의 문화가 이십억 년 동안 변화했지만 소시민으로서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상상할 수 있다. 이십 년 후 얼리어답터 고모할머니가 된 내가 화성에서 조카의 결혼을 축하하는 순간을.
/김정희(포항시 남구 SK3차아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