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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위기와 ‘나쁜 정치’, 그리고 ‘사회’의 힘

등록일 2020-03-04 20:08 게재일 2020-03-0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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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이론가와 풀어보는<br/>                       ‘한국사회’ 라는 실타래 ③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지난달 27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지역거점병원인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을 찾아 의료진으로부터 애로사항을 듣고 있다. /경북매일 DB

우리들 한 명 한 명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자기 자신이다. 우리의 사고는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이며 우리의 행위는 자신의 감정과 이해관계에 지배된다. 그런 연유로 사람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와 이익에는 열렬하고 예민하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줄 결과에는 무심하기 마련이다. 이런 양상은 자신이 속하거나 분류되는 집단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한데, 흔히 사람들은 자신을 특정집단의 일원으로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일에 격분하지만 타인을 특정집단의 일원으로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에는 스스럼이 없다. 이렇듯 자기와 타인에 대해 인간이 가진 어쩔 수 없는 이중적인 태도는 대단히 강력하고 자연스러운 ‘인간적인’ 감정이며 그런 의미에서 ‘합리적’이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의 최대의 진원지인 신천지교회의 반응 또한 정확히 그런 ‘합리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사태의 발발에 대해 진정으로 책임을 지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조직의 보전과 면책을 위해 신도들에 대한 불완전한 정보만을 당국에 마지못해 제공해왔다. 그러면서도 자신들 또한 피해자고 협조를 잘 하고 있으니 자신들을 차별하고 박해하는 ‘마녀사냥’을 중단해 달라는 적반하장같은 논평을 아직도 내고 있다.

이제 확진자가 3천명을 넘어서고 의료지원이 태부족한 우리 대구 경북민의 불안감과 위기의식은 극에 달해 있지만 이 국가적 위기에 대한 정부와 여당의 대응과 언행은 완벽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통합되어 새롭게 탄생했다는 보수세력의 현 사태에 대한 대응은 실망을 넘어 그 구태의연함과 ‘선동성’이 가증맞기까지 하다. 이들의 공세는 먼저 현 정부가 대구 경북에 대한 배제의 감정을 조장한다는 데 집중되었다. 사실 ‘대구코로나’라는 표현은 보수세력을 대변하는 일명 ‘조중동’ 삼대 일간지와 종편방송이 더 앞장서서 벌인 일이고, 그 성향이 진보이든 보수이든 선정성과 공포의 상업성에 편승하려는 몰지각한 언론과 누리꾼들에게 한정된 일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정부발표에서 유독 ‘대구 코로나’, ‘대구 봉쇄’라는 말들에 밑줄을 그어 가면서 대구 경북지역이 박해받고 있다는 감정을 부추기고자 하는 이들은 타지역으로부터의 차별과 경원시를 우려하는 대구 경북지역 시민들의 예민해진 마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 여념이 없다. 정부와 여당이 현 사태를 정쟁에 이용하고 ‘나쁜 정치’를 하고 있다고 성토하지만 정작 나쁜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은 이들인 것 같다.

그에 비해 몇몇 누리꾼들의 논평, 즉 미래통합당 관계자들이 코로나19를 ‘우한폐렴’이라 부르면서 ‘대구코로나’라는 명칭을 문제삼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비판은 좌파적 사고에 특유한 약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어찌 우한과 대구가 동일하겠는가? 우한과 중국은 외국이지만 대구의 시민은 동일한 정치공동체, 사회 속의 동포요 동료 시민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보수 측은 사태 초기에 중국인에 대한 전면적인 입국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공세를 집중하였다. 그 요체는 꽤나 단순하고 낯설지도 않은 것으로, ‘중국 눈치를 보고 자국민보다는 중국민을 더 생각한다’는 것이다(이 문장에서 중국 대신 ‘북한’을 넣어보면 꽤나 익숙한 논변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는 우리네 마음속 가장 강력하고 자연스러운 감정, 즉 우리끼리 뭉쳐서 이익을 도모하고 손해보는 일은 없어야 하며, 무엇보다 ‘남에게 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오기, 그리고 강대국의 눈치를 안 본다는 원초적인 ‘자존심’을 자극하는데 집중하는 지극히 단순한 선전선동이다. 미래통합당의 황교안 대표는 정부가 마스크 300만 개를 중국에 보내줬다는 가짜뉴스를 버젓이 공표하면서 이를 계속 이슈화했고, 이는 박능후 보건장관을 몰아붙여서 그의 실언아닌 실언을 이끌어내어 ‘중국 탓인데 우리 탓을 한다’는 낙인을 찍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처럼 고도의 정책적 판단에 있어서 무엇이 옳은지 자신 있게 말할 지식은 필자에게 없다. 하지만 우리는 외국과의 교류가 국민경제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로의 길을 내내 택해왔고 특히나 중국, 일본, 미국은 좋으나 싫으나 우리가 깊이 의존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어도 일본과 미국이 한국인 전면입국금지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은 것은 그러한 상호의존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필자 또한 서울이나 제주에서 마스크도 안한 채 식당에서 식사하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중국인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아마도 중국인과 중국발 입국자를 초기에 전면 봉쇄했으면 마음도 흔쾌하고 강대국에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미래통합당이 여당이었다 한들 중국인의 전면입국 금지와 같은 조치를 전격적으로 취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솔직히 들지 않는다.

결과론적이기는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국가적 위기 규모로 발전한 것은 주지하다시피 대구신천지교회의 네트웍을 통해 대규모 감염이 일어난 이후이다. 접촉이 제한된 외국인이 아니라 일상적 접촉이 이루어지는 자국민의 관리가 더 결정적이라는 박능후 장관의 발언은 유쾌하지는 않더라도 틀린 말은 아니며 일정 측면에서의 대구경북지역의 봉쇄는 방역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그럼에도 미래통합당은 한편에서는 당대변인이 정부가 신천지교회를 매개로 한 대규모 감염 사태의 경로를 아직 규명하지 못했음을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집단에 문제를 귀인시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논평을 당대표가 내고 있고, 종교와 집회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집회강행을 불사하는 전광훈 목사 등의 막무가내 행보도 애써 비판하려 하지는 않는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10년간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필자는 자신을 아시아인으로 차별하는 것에 극도로 예민하면서도 흑인 등 다른 소수인종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과 경멸, 그리고 주류 백인사회에 대한 숭배와 ‘짝사랑’은 대단했던 현지 한국인의 모습이 미국인들과 대비되어 매우 환멸스러웠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에 대한 그런 부정적인 인상은 이번 사태의 전개과정을 보면서 단번에 바뀌었다. 코로나 전염위험이 아직 강 건너 불구경이던 시기에 TV를 보던 필자는 중국 각지에서 우한으로부터 오는 동포 시민들을 막고 봉쇄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을 보고 꽤나 놀랬다. 역시나 우리나라에서 감염자가 늘자 중국정부와 중국시민들은 염치고 격의고 상관하지 않고 한국인 격리와 봉쇄로 내달리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 우한교민의 격리 수용지로 결정된 아산의 주민들은 우리 교민들을 따듯하게 환대하였고, 지금 전국의 많은 이들은 대구 경북지역에서 묵묵히 일하는 의료진과 공무원들, 그리고 의연히 양심을 지키며 생산에 전념하고 있는 마스크제조업체들에 선물과 격려 편지를 보내고 있다. 이들의 모습은 우리의 ‘사회’가 가진 역량이 이 정도라는 것에 안도감과 함께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서두에서 말했듯 자신과 자기 집단의 이익과 안녕을 염려하고 도모하면서 타인을 단순화하고 차별, 배제하는 것은 사회 속 인간의, 그들이 만든 집단의 지극히 자연스럽고 강력한 성향이다. 하지만 ‘사회’를 작동시키는 한 사회의 역량은, 증오와 따돌림, 집단적 거부, 무질서와 이기주의의 횡행으로 치닫기 쉬운 그러한 성향을 제도와 도덕의식을 통해 제어하는 정도를 통해 드러난다. 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우리 사회를 마비상태로 몰고가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는 뜻밖에도 어떤 것이 ‘나쁜 사회’이고, ‘나쁜 정치’를 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다른 때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구자혁 경북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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