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메시스: 배움의 작동 방식
지금으로부터 1만2천여 년 전 인류가 수렵채집의 문명에서 농경 사회로 옮겨가는 인류문명의 시작기인 구석기시대의 원시인을 상상해 보자. 머리는 산발을 하고, 한 손에는 돌도끼나 창을 들고 있다. 그러면 그들의 스타일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바람머리를 휘날렸을 리는 만무하다.
수렵생활을 했던 원시인은 나뭇잎이나 가죽으로 몸을 가리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구석기시대의 유물 중에는 뼈로 만든 바늘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구석기시대에도 옷을 만들고 깁는 의류생활을 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가죽을 연결하여 더 크고 두툼한 옷을 만들고, 해지거나 낡은 부분에 가죽을 덧대어 꿰매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죽을 꿰매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도 쇠가 아닌 뼈로 된 바늘이라면 열 개 중 아홉 개는 부러진다.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던 구석기인들은 가죽보다 만들기도 쉽고, 수선도 쉬운 재료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던 중 누군가 거미가 거미줄 치는 것을 보고 실을 엮으면 옷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유레카! ‘거미줄과 같은 것을 촘촘히 엮으면 옷을 만들 수 있겠구나!’하고 무릎을 쳤을 것이다. 무릎이라는 말조차 없었겠지만, 무릎을 쳤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옷은 혁신적 변혁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거미가 거미줄을 뽑고 거미줄을 치듯이 인간은 거미를 따라 실을 뽑고 천을 짰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무작정 거미를 따라했을 것이다. 거미가 왜 거미줄을 뽑는지, 거미줄을 어떤 방식으로 뽑을 수 있는지, 거미줄의 성분이 무엇인지 그런 것 따위는 모른 채 무작정 따라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점차 거미를 알고, 거미줄의 특성을 파악하게 되었을 것이다.
배움은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도 좋다. 인간의 배움은 단순히 자연을 따라하는 것을 통해 시작된다고 말이다.
자연은 인간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렇긴 하지만 자연 속에는 참고할만한 구체적인 매뉴얼이 없다. 자연은 설계도도 없고 지도도 없는, 미로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을 걷어내는 일이다. 원리도 모른 채 자연을 흉내내는 것은 어둠속을 끊임없이 헤매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러한 시련 앞에 좌절하지 않는다. 부단한 시행과 간단없는 반복과 끝없는 착오! 인간은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한다. 이러한 불멸의 노력을 통해 동물과 다른 유일무이한 이름을 얻는다. 그 이름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무작정 따라하고 본다. 아기가 언어의 원리나 체계를 이해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엄마의 입모양을 흉내내듯이, 인간은 자연을 따라한다.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연에 깃든 오묘하고 숭고한 원리를 배우고 이해하게 된다. 이 원리는 지금도 빅데이터 기반 인공지능의 알고리즘 개발에 그대로 응용된다. 결핍을 절실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실현하려는 의지도 커진다. 이제 노력하면 된다. 이러한 결핍을 채우는 과정이 곧 기술발전의 과정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그 결핍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결핍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바로 내 앞에, 아니 바로 나에게 있다.
△프로메테우스와 지포 라이터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란 뜻의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는 이유로 제우스에게 낮에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엄한 형벌을 받는다. 이 형벌이 끔찍한 이유는 재생력이 강한 간은 밤에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기 때문인데, 프로메테우스는 그 고통을 영원히 감당해야만 한다.
인간은 왜 자연을 흉내내고 그것을 따라하려고 애쓰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새처럼 날 수 없고, 거미처럼 실을 뽑을 수 없고,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헤엄칠 수 없다. 이 결핍, 이 결여가 인간을 욕망하게 하고 꿈꾸게 한다. 인간이 가지지 못한 것을 자연은 가지고 있고, 인간은 자연이 지닌 것을 갖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열에 아홉은 실패하고 만다.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에게 받은 끔찍한 형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신은 자신의 원천기술을 인간에게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간은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태초부터 신의 말을 어기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원시인간은 자연 발화가 아니면 불을 구할 수 없었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신에게 불을 훔쳐왔고 그 벌로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다. 이 신화는 인간이 불을 얻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들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인간은 불을 직접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위해 수만 년 동안 부싯돌을 사용해왔다. ‘불씨’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희망’의 은유로 사용된다. “불씨가 있다”는 말은 희망이 있다는 뜻이지만 “불씨가 꺼졌다”는 말은 희망이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것은 부싯돌이나 그 외의 다른 것을 사용하여 ‘불씨’를 얻는 일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휴대용 불은 1826년 영국의 화학자 존 워커(John Walker·1781~1859)가 성냥을 처음 발명하면서부터다. 성냥이 출현하기까지 수십 만 년이 걸렸지만, 더 나은 제품이 더 빠른 속도로 등장하게 된다. 줄리어스 마이스터는 1907년 임포라이터 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는 1차 대전 당시 참호에 뒹구는 탄피를 이용하여 라이터를 만들었고, 1918년에는 이를 개량해서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방풍라이터를 만들어 전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1933년에는 브래드퍼드(Blaisdell)가 임포 방풍라이터를 개량한 지포(zippo) 라이터를 만들어 새로운 유행을 만들었다. 이것은 흡연자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았고, 우리나라에서는 혼수품의 목록에 끼어들 정도였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몇 백 년 전에 이런 소망을 말했다면 아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로는 전혀 불가능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찮다고 생각하는 불의 휴대는 사실 하찮은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과학과 기술의 집적물이다. 단지 이뤄지고 나니까 그것이 별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메우치와 전화기
전화기는 그러한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발명되었다. 전화기의 발명자를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1847~1922)로 알고 있지만, 사실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은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이민자 안토니오 메우치(Antonio Meucci·1808~1889)다. 메우치의 아내는 몸이 마비되어 침실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는 집에 딸린 연구실에서 일했지만, 아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려면 매번 침실에 가봐야 했고, 아내는 필요한 것이 있어도 남편이 올 때까지 침대에서 기다려야 했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려고 침실과 자신의 작업실을 연결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것이 바로 전화기다.
이 전화기로 1860년에 공개시연회를 열었다. 그런 후 보다 정교하게 고쳐 특허신청을 하려 했다. 하지만 메우치에게는 신청에 필요한 250달러가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1871년, 1년짜리 임시 특허를 신청했다.
제품 상용화를 위한 재정적 후원자를 찾지 못했으며, 3년 뒤에는 임시 특허조차 갱신하지 못했다. 이때 메우치와 연구실을 함께 사용하던 벨은 1876년 새로이 특허를 내고 웨스턴 유니언 전신회사와 계약했다. 벨은 큰돈을 벌며 유명인사가 되었고 메우치는 가난 속에 허덕였다.
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 재판의 승리를 눈앞에 둔 메우치가 1889년 숨지면서 소송 역시 중단됐다. 미국 하원은 그가 죽은 후 113년 만인 2002년, 최초 전화기 발명가로 메우치를 공식인정했다. 역사는 기어이 진실을 꺼내놓는다. 메우치의 이야기는 슬프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모두 전화기를 사용한다. 메우치가 느꼈던 불편함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불편함이었다. 그러하다면 메우치는 그러한 전 인류적 결핍에 맞섰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불편함과 결핍은 나와 함께 있다. 나의 불편함이 곧 인류의 불편함이며, 나의 결핍이 인류의 결핍이다. 이 결핍을 메울 수 있다면 인류는 또 그만큼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인간의 결핍을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꿈을 마침내 실현시킨다. 문제는 자연은 언제나 인간에 앞서 있고, 우리는 자연에 뒤처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자연을 앞지를 수 없다.
인간이 자연을 통해 만든 어떤 모방품도 자연의 정교함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침울해 할 필요는 없다. 자연이 인간보다 늘 앞서 있기 때문에 우리의 욕망은 고갈되지 않는다. 우리는 끝없이 욕망하고, 끝없이 꿈꿀 수 있다. 그러한 꿈이 우리의 사유를 추동하며, 그 속에서 우리는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자연이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인간의 발전이 영속하리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