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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천천히

등록일 2019-02-17 19:30 게재일 2019-02-1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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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재 <br>​​​​​​​포항예총 회장
류영재포항예총 회장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A라인이 2023년 개통을 목표로 올 봄에 착공될 예정이라 한다. GTX는 지하 40m 깊이에 터널을 뚫어 시속 180㎞로 달리는 광역지하철이다. A라인은 경기도 최북단 파주에서 서울 도심을 지나 화성시에 이르기까지 80여㎞를 운행하는 구간이다. 파주에서 서울역까지 20분 정도 소요될 것이라니 이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키는 사업이다. 수도권 주변 지역 주민의 숙원이었지만 반발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반발의 이유는 안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당초 한강을 중심으로 계획했던 노선을 더 짧게 하려고 주택지와 열병합발전소의 지하를 통과하는 것으로 변경했다는데, 안전이 우려된다는 논리다.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가치다. 터널을 뚫자면 발파의 진동으로 지반침하 우려가 있고, 도심에는 상·하수도관, 가스관, 전기·통신망 등의 라이프 라인이 거미줄처럼 엮여있음은 물론이고 기존의 지하철도 복잡하게 얽혀있으니 터널공사가 얼마나 위험한가. 더더구나 A노선은 열병합발전소와 아파트 지하를 통과한다니 ‘싱크홀’이나 건물 균열 등을 우려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자연재해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잘 알고 있으며, 여기에 인재까지 더해진다면…. 훗날의 역사가들은 이 시대를 어떻게 반추할지 두려운 일이다. 우리 지역의 지진도 자연현상인지 지열발전소가 원인인지 정확히 규명되진 않았지만, 그것이 자연현상이거나 문명의 폐해이거나 간에 위험을 인지했으면 안전을 위하여 최선의 예방책을 마련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좀 천천히 가면 안되나?

필자가 인문계고등학교에 재직하던 시절, 고3 교실의 벽에 걸려있던 ‘재수 없는 해’라는 급훈이 기억난다. 어느 학급은 ‘2호선을 타자’였다. 재수생 없이 단번에, 지하철 2호선 구간에 밀집해 있는 명문대학에 합격하자는 간절함은 이해하겠으나 단체가 추구해야할 가치로서의 품위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급훈들을 보며 재수를 경험해본 필자는 그 시간이 내게 준 성숙의 과정을 곱씹어 보았다. 재수면 어떤가? 명문대 졸업이 담보하는 기회라는 것이 이 사회를 얼마나 치열하고 각박하게 만드는가를 너무도 잘 알면서 그것을 종용하는 기성세대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좀 천천히 가면 안될까? 좀 못하면 안될까? 이미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고 내가 어른인 세상은 동네마다 유치원은 줄고 요양원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생명을 늘리고, 인간들은 대책도 없이 오래 살게 되었다. 그도 복이라면 복이겠지만 그렇게 오래 사는데 왜 그리 급하게 일할까? 그 복잡한 서울 시내를 통과하여 수도권 어느 지역을 가는데 20분밖에 안 걸린다고 업적을 자랑하는 이들은 다음에는 또 무엇을 만들려고 그럴까? 인간의 삶은 환경과의 타협과 조율 과정이다. 평균수명이 80을 넘은 이 시대에 무엇이 급하여 남의 집 방바닥 밑으로 굴을 뚫어 괴물 같은 기차를 쏜살같이 지나가게 할까? 그 시간의 단축이 주는 경제적인 이익은 고스란히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니 도대체 누구를 위한 발전일까? 오직 목적만을 위한 ‘필요악’ 같은 말은 이제 시대착오적 용어로 사전에서 사라지길 바란다. 이젠 좀 천천히 앞도 뒤도 살펴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다. 최근 도쿄 여행 중 신칸센(新幹線)을 기다리며 동행한 선배님이 들려준 등소평의 일화가 문득 떠오른다. 일본을 방문한 등소평에게 신칸센의 속도를 자랑하기 위해서 시승을 권하고, 그 소감을 묻자 ‘그리 넓지도 않은 나라에서 뭐 그렇게 빨리 갈 필요가 있는가?’라고 되물었다니 그 함의(含意)가 다르므로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황금돼지해 기해년에는 좀 천천히 주변도 살피며 스스로의 내면을 살찌우는 지혜를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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