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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 시와 소설

등록일 2018-11-30 21:07 게재일 2018-11-3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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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뤼겔 ‘아이들의 놀이’(1559~1560). 그림의 중앙에서 볼 수 있는 붉은 옷을 입은 아이를 보라. 이 아이는 지금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다른 아이들과 놀다가 금세 다른 놀이가 하고 싶어져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벗어남과 끼어듦에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물론 그런 제멋대로의 행동에 불만을 갖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를 뒤쫓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다 자신이 왜 쫓고 있는지조차도 잊은 채 술래잡기를 시작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놀이가 끝날 때쯤엔 건물 뒤편의 두 아이들처럼 싸움박질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될지도 모른다. 놀이는 엉망진창이다. 그런 점에서 놀이는 삶을 쏙 빼닮았다.
▲ 브뤼겔 ‘아이들의 놀이’(1559~1560). 그림의 중앙에서 볼 수 있는 붉은 옷을 입은 아이를 보라. 이 아이는 지금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다른 아이들과 놀다가 금세 다른 놀이가 하고 싶어져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벗어남과 끼어듦에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물론 그런 제멋대로의 행동에 불만을 갖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를 뒤쫓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다 자신이 왜 쫓고 있는지조차도 잊은 채 술래잡기를 시작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놀이가 끝날 때쯤엔 건물 뒤편의 두 아이들처럼 싸움박질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될지도 모른다. 놀이는 엉망진창이다. 그런 점에서 놀이는 삶을 쏙 빼닮았다.

△놀이

하위징아는 놀이의 규칙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놀이 파괴자는 놀이를 잘못하거나 놀이를 속이는 자보다 죄질이 더 무겁다. 왜냐하면 놀이를 속이는 자는 아직도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시늉하면서 겉으로는 마법의 원(놀이를 유지하는 규칙)을 여전히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놀이 파괴자는) 게임에서 벗어나 버림으로써 그는 자기와 다른 놀이꾼들이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놀이 세계의 상대성과 취약성을 폭로한다.”(“호모 루덴스”)

하위징아는 놀이를 속이는 자와 놀이를 파괴하는 자를 비교하면서, 놀이 파괴자의 죄질이 더 무겁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주장의 근거가 없다는 것. 다만 하위징아는 놀이는 규칙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놀이의 규칙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수정되어야 할) 전제 위에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을 뿐이다.

만약 하위징가 아이들의 놀이를 진지하게 보았다면, 혹은 브뤼겔(Pieter Bruegel)의 “아이들의 놀이”만이라도 집중해서 보았다면, 이런 말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늘 ‘마법의 원’을 부수는 ‘놀이 파괴자’이며, 또 다시 ‘마법의 원’을 만드는 창조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숨바꼭질, 고무줄, 딱지치기를 할 때 늘 놀이의 규칙을 정한다. 이를테면 딱지치기를 할 때, 발로 딱지 끝을 살짝 눌러서 틈 만들기 없기, 딱지 바꿔 놓기 없기, 넘어간 딱지 말고 다른 것으로 바꿔주기 없기, 따위의 규칙을 늘어놓는다. 놀이에 일정하며 불변하는 규칙이 있다면, 아이들은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이와 같이 놀이의 규칙을 다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규칙을 정하는 일은 기존의 놀이의 질서를 해체하고 파괴하고 변형함으로써 새로운 놀이를 만드는 일로 볼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기존의 놀이 따위는 없다는 것을 말하는 일일 것이다. 놀이는 그 말에서 드러나듯이 ‘놀’ 그 자체, 즉 ‘뛰놂’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아이들의 놀이가 마냥 순진무구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 아이들은 놀이를 하면서 누가 놀이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이고, 누가 놀이를 유지하도록 강제하는 자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규칙을 만들고, 규칙을 지키고, 규칙을 부수는 이 연습 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가게 된다. 현실을 연습하게 되고,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가치를 내면화하는 출발점이 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놀이는 늘 위험의 순간에 직면해 있다.

△시인

오래전 시집 한 권으로 한국시의 물줄기를 자신 쪽으로 틀어버린 바 있는 시인은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생활고에 치이다 보니 시에만 집중할 수 없었죠.”(황병승)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아직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시인의 말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도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언어가 한 번도 발 딛지 못한 최초의 영역에 언어를 펼쳐 새로운 길을 놓은 시를 썼고, 새로울 것이란 더 이상 없을 법도 한 이 지난한 인간의 역사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미지를 길어 올렸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시와 더불어 시간도 공간도 없는 영역, 어떤 찬란한, 침범 불가능한 곳을 점유한, 이 비루한 세상과 분리된 시라는 세상에 접어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될만큼 터무니없이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었다. ‘생활고’라는 말이 그와 연결되어 있으리라고는 정말이지 전혀 생각조차 못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측면에서 충격을 받았다. ‘아, 그런데도 삶은 끝나지 않는구나!’가 그 하나라면 ‘아, 그러고도 살아남아 삶의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 써야 하는구나!’가 나머지 하나였다.

먼저의 당혹스러움이 죽음을 향한 것이라면 나중의 것은 이 시인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이 당혹감 혹은 원망은 그를 비롯한 인간의 삶 전체로 뻗어나갔다. 그러니까 이 시인의 별 말 아닌 말 덕분에 나는 추잡스러운 삶을 생각했고 또 광폭한 죽음의 민낯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죽음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 없다. 죽음은 삶의 대척점에서 삶과 완전히 무관하며 그 삶에 포섭된 하잘 것없는 인간의 기대, 바람, 기원 따위와도 관계없이, 어떤 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서, 자신이 원할 때 자신의 법에 따라, 심지어 자살을 선택할 때조차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그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며, 아무 때고 삶 편으로 스민다는 것, 삶에서 죽음 편으로 결코 들어설 수 없이 오직 죽음 쪽에서 삶 쪽으로만 스민다는 것.

△시와 소설

시는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속에서 배태되는 감정과 감각을 기록한다. 소설 역시 사건이 아니라 사건들의 흐름과 속도를 기록한다. 사건은 기록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건의 본질이란 사실 저런 무수한 표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건의 내부나 사건의 핵심이 따로 어디에 존재할 리 없다. 무수한 표면들의 작용 속에서 본질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반짝인다. 본질은 그 반짝임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시든 소설이든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다만 시는 사건이 만들어내는 감정과 감각을 기록한다. 사건이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과 감정이 기록된다. 사건은 감정과 감각 뒤에 숨겨진다. 이렇게 생겨난 감정과 감각이 언어로 치환되는 과정에서 일그러짐이 생긴다. 감정과 감각이 온전히 언어로 옮겨지지 않기 때문에 그 감정들은 일그러져 주름진다. 시는 그런 주름이다.

소설은 사건의 흐름에 대한 기록이다. 사건은 멈추지 않고 시간 속으로 흘러내린다. 그 흐름의 줄기는 무수하다. 평평한 땅 위에 물을 부으면 물은 결국 흘러간다. 물론 큰 줄기가 있지만 큰 줄기는 작은 줄기를 만들고 작은 줄기가 만나 큰 줄기를 이룬다. 정통서사가 물줄기의 연속된 흐름을 중시한다면, 소설은 물이 흘러내리면서 만들어낸 무수한 물줄기들을 기록한다. 그래서 소설은 자연히 지배적 서사나 거대 서사가 배제된다.

이런 비유를 더 밀고 나가자면, 정통서사가 물이 흘러내린 뒤에 남은 물줄기의 자국을 그린다면 소설은 특히 현대소설은 흐르는 물줄기를 타고 함께 흐른다. 그래서 사건의 큰 줄기인지 작은 줄기인지 알 길이 없다. 흐름에 올라앉아 있으므로 흐름의 보편적 시간이 아니라 흐름의 개별적 시간밖에 알지 못한다. 또한 흐름과 더불어 흐르므로 그 흐름의 끝을 알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소설은 현재형으로 기록된다.

▲ 공강일<bR>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그런 소설이 있다. 완벽히 주인공에 몰입되어 그 주인공 앞에 기적이 일어나기를 그래서 조악한 헐리우드식 해피엔딩이라도 좋으니 그가 행복해지기를 행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소설이 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소설이 끝난다면 소설가를 욕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런 소설을 읽는 순간은 소설을 쓰는 소설가만큼이나 조심스럽다. 소설가 역시 주인공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 그 역시도 일종의 외줄 위에서 외줄 끝까지 걸어갈 것인지, 아니면 외줄걷기를 포기할 것인지 고민하면서 소설을 썼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독자는? 외줄의 끝에서 주인공에겐 어떤 변화도 없이 불행이라면 불행인 삶이 계속 되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읽어나간다. 그러니 독자도 읽기라는 외줄 위에서 그 외줄에서 내려와도 그만이지만 외줄의 끝까지 걸어가 보는 것이다. 소설가가 글쓰기를 통해 소설을 완성해 나간다면 독자는 쓰인 글들을 삼킴으로써 소설을 완성해 간다. 그런 소설이란 쓰는 자도 읽는 자도 지난하긴 마찬가지며, 그런 소설은 쓰는 자도 읽는 자도 어떤 희열의 정념에 휩싸일 것은 당연하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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