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霜降)이다. 뜻 그대로 서리가 내리는 절기다.
음력으로는 9월 15일, 양력으로 10월 23일이다. 낮에는 가을의 쾌청한 하늘이 더할 나위없지만 밤에는 기온이 매우 낮아진다. 수증기가 엉겨서 서리가 내리고, 더 추워지면 첫 얼음이 얼기도 한다. 단풍이 절정이 이르는 시기다. 농사력으로는 상강 무렵에 추수가 마무리된다. 바야흐로 겨울맞이를 시작할 때다.
딸에게 ‘잎에는 왜 단풍이 들까요?’(다섯수레)를 읽어주었다. 절기상 상강 무렵에 읽어주면 안성맞춤이다. 초록색이던 잎이 왜 빨갛게 노랗게 물들어 가는 지 선명한 나뭇잎 그림을 통해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나무는 8월부터 겨울 준비를 시작한다고 한다. 햇빛의 양이 줄어들면 나뭇잎이 만들어 내던 엽록소의 양도 줄어든다. 엽록소에 덮여 있던 노랑, 주홍 색소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나뭇잎에 남아있던 당분이 빨강이나 갈색, 자주색으로 바뀌면서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단풍이 드는 것처럼 보인다. 알다시피, 일교차가 클수록 더 아름다운 단풍이 만들어 진다.
사람의 눈에 단풍은 아름다운 자연 현상이지만, 나무의 입장에서, 나뭇잎의 입장에서 단풍이란 혹독한 이별이고 긴긴 기다림이고 서로가 오직, 외로운 길에 들어섰다는 증표일 뿐이다. 초록으로 무성하던 여름을 지나 서리 내리는 가을이 오면 나뭇잎은 아름답게 물들었다가 낙엽이 되었다가 부스러기가 되고 산산조각이 난다. 산산조각 난 몸이 나무의 뿌리로 모여들어 겨우내 이불과 거름이 되는 자연의 숭고한 이치를 떠올릴 때마다 나같은 범부는 그저 침묵할 뿐이다.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정호승 시인의 ‘산산조각’이라는 시다.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에서 스스로를 돌아본다. 좀 깨져도 다쳐도 넘어져도 부서져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심지어 산산조각나도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단풍이 낙엽이 이불이 되고 거름이 되어 이듬해 초록빛 새 잎을 세상에 내놓는 것처럼.
법정 스님은 평소 자신의 서가에 꽂힌 구도의 서책 중에 ‘법구경’과 ‘수타니파타’를 즐겨 보셨다고 한다. 특히 ‘법구경’을 꺼내 볼 때마다 거울에 자신을 비쳐 보듯 새로운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법구경’은 불교 초기에 여러 가지 형태로 전해 내려온 시를 모아 엮은 일종의 불교 잠언 시집이다. 독립된 시로 되어 있지만, 때로는 두 편 또는 여러 편의 시가 한데 묶여 있다. 법구경의 원래 이름은 ‘담마파다’, 곧 ‘진리의 말씀’이다. 아무데나 펼쳐진 대로 한 편 한 편 마음의 바다에 비춰보면서 차분히 읽어간다면, ‘법구경’은 맑은 거울이 되어 그 속에서 현재의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라고 법정 스님을 말씀하셨다.
‘법구경’을 읽다가 마음이 머무는 곳, 현재의 나 자신을 비춰주는 곳을 몇 군데 옮겨본다. “그는 나를 욕하고 상처 입혔다. 나를 이기고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러한 생각을 품지 않으면 마침내 미움이 가라앉으리라.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원한을 버릴 때에만 사라지나니 이것은 변치 않을 영원한 진리다.”
“여기 두 길이 있으니 하나는 이익을 추구하는 길이요 하나는 대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부처의 제자인 수행자들은 이 이치를 깨달아 남의 존경을 기뻐하지 말라. 오직 외로운 길 가기에 전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