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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사랑할 때 이별 할 수 있다

등록일 2018-10-12 20:29 게재일 2018-10-1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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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녀’에 대해<br />
▲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감춰야만 하는 게 아닐까?”(‘사랑의 단상’, 71면) 왜냐하면 ‘나’의 사랑의 크기를 그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므로. 우리는 사랑을 드러낼 수 없으므로 끝내 사랑할 수조차 없다. 이별은 내재되어 있으나 언제나 지연될 뿐 이뤄질 수는 없다. 왜 사랑한 적이 없으므로.
▲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감춰야만 하는 게 아닐까?”(‘사랑의 단상’, 71면) 왜냐하면 ‘나’의 사랑의 크기를 그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므로. 우리는 사랑을 드러낼 수 없으므로 끝내 사랑할 수조차 없다. 이별은 내재되어 있으나 언제나 지연될 뿐 이뤄질 수는 없다. 왜 사랑한 적이 없으므로.

1. 나는 숱한 ‘나’들로 이루어져 있다. 전 부인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오늘은 술이 취해서 아무나와 사랑을 하고 싶은 것도 ‘나’다. 운영체계인 사만다가 8천316명과 동시에 대화하고 841명과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은, 분열되어 있는 ‘나’의 극단적 표상이 아니겠는가.

2. 아무리 ‘나’가 많더라도 나는 어떤 상황에서 특정한 패턴을 보이게 된다. 사만다가 테오도르를 책처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공지능 컴퓨터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3. 상대가 ‘나’를 읽을 때보다 내가 ‘나’의 패턴을 읽게 될 때 문제는 심각해진다.

“가끔씩은 그런 생각이 들어. 난 앞으로 내가 느낄 감정을 벌써 다 경험해버린 게 아닐까,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앞으로 쭉 새로운 느낌은 하나도 없게 되는 건 아닐까, 내가 정말로 느꼈던 그 감정에서 좀 축소된 어떤 감정들만 남는….”

남은 삶이 그저 그럴 것이라고 느껴질 때 남은 삶이 두려워진다. 이것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만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 하나를 알려준다. 권태, 무기력, 나태, 우울과 같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 허무감 역시 살아 있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느낌’이라고 말이다, 그것 역시 경험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감정이라고 말이다. 이런 감정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나’의 갱신, ‘나’의 변화다. 테오도르가 여지껏 사용해 오던 무미건조한 인공지능 운영체계를 버리고 OS1으로 바꾸었던 것은 ‘나’의 갱신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4. 물질에 이름이 없다면 대상과 대상을 무슨 수로 구분할 수 있겠는가. 그 구분 없는 물질들,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들, 그것을 식별하기 위해 이름이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테오도르가 OS1에게 이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5. 하지만 이름과 대상이 선후관계로 이뤄지는 것만은 아니다. OS1이 먼저 있고 그 후에 ‘사만다’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아니다. 이름과 대상은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아니 더 급진적으로 말하자면 이름 속에서 비로소 대상이 탄생한다. 하느님이 빛이 있은 뒤에 빛을 ‘빛’이라 칭한 것이 아니라 빛을 ‘빛’이라 칭하자 빛이 생겼다(“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있었고”<창세기>1:3 ). OS1이 스스로의 이름을 ‘사만다’라고 칭했을 때 그 이름에 걸맞은 인격체로 비로소 태어난다.

6. 모든 것들은 언어를 통해서 물질적 형상을 얻게 된다, 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만다와 테오도르가 대화로 키스를 하고 ‘사랑을 나눌’때 사만다는 “내 피부가 느껴져”라고 말한다.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손끝’으로 만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끝’으로 만진다. 사만다라는 이름이 사만다라는 인격체를 만들 듯 언어가 그녀에게 물질적 피부를 부여한다.

7. 그래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가 이미 물질이다.

8. 테오도르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만다는 다름 아닌 운영체계라고 에이미에게 고백했을 때, 에이미는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미친 짓이야.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미친 짓이야.”(Falling in love is a crazy thing to do, It‘s like a socially acceptable form of insanity.) 한 평론가는 이와 유사한 말을 했다. 이렇게 말이다. “이 세상에 불가능한 사랑은 있을지라도 해서는 안 될 사랑 따윈 없다고 말하는, 저 미친 사랑의 노래.”(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84면)

9. 테오도르가 처음부터 ‘사만다’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인 테오도르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의 전 부인인 캐서린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만다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않았고, 다할 수 없었다. 왜? 테오도르는 상대와 싸움을 피하면서 상대가 자신에게 맞춰주길 바랐다. 그러하다면 이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오히려 자기애라 부르는 것이 옳지 않을까.

10. 왜 테오도르는 상대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말하지 않았던 것일까? 테오도르는 캐서린과 “함께 성장”해 왔다고 말했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사랑이 자기애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테오도르는 ‘캐서린’과 함께 성장한 것이 아니라 ‘캐서린인 테오도르’와 함께 성장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캐서린은 곧 테오도르다. 그런 이유로 캐서린에게 자신의 감정을 쏟아낼 수 없다. 캐서린에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테오도르 자신의 내밀한 욕망이며, 내밀한 상흔이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테오도르는, 캐서린이 받게 될 상처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입게 될 상처를 염려해서 말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11. 그런 점에서 소개팅을 했던 여자가 테오도르에게 “최악”이라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모든 연인들은 서로에게 ‘최악’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곧 미래의 ‘나’이기 때문이다.

11. 이 영화가 ‘자기애’를 말하는 영화였다면 제목은 ‘her’가 아닌 ‘She’였을 것이다. 테오도르는 ‘자기애’를 극복하고 진정한 ‘사랑’에 이르게 된다. 어떻게? (또 반복하는 꼴이 되겠지만) 우리는 이미 언어가 물질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모든 것을 말함으로써, 오직 말함으로써, 사만다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상에게 ‘나’의 부분을 남겨두는 일이다. 하지만 말함으로써 상대에게 남은 ‘나’를 모두 소진할 때 사만다는 비로소 온전한 사만다가 된다.

▲ 공강일<BR>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12. 사만다에게 모든 것을 말하기 이전까지 테오도르가 사랑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가 “나는 당신을 사랑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복문이었다. 왜냐하면 이 말은 “(나) 테오도르는 (나를) 사랑하고, 사만다는 (사만다를) 사랑한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13. 테오도르가 사만다에게 자신의 모든 것들을 말함으로써 테오도르는 ‘테오도르’가 되고, 사만다는 ‘사만다’가 된다. 서로는 서로로 분리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이 가능해진다. 한 시인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홀로 선 둘이 만나는 것이다.”(서정윤, ‘홀로서기’)

14. 이제 테오도르는 자신이 아닌 ‘사만다’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 영화의 제목이 ‘She’가 아니라 ‘her’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비로소 그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He loves ‘her’).

15.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사랑이 진실로 사랑이라면 이별이 왜 불가능하겠는가. 사만다가 된 ‘사만다’는 비로소 테오도르인 ‘테오도르’를 떠날 수 있다. 진실로 그러하다면, “나는, 어떤 누구도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지 않았어”라는 테오도르 말을 믿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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