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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등록일 2018-08-29 20:42 게재일 2018-08-29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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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수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 김만수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부자 3대를 못 간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일하게 300년 부를 누린 가문이 있으니 그 집안이 바로 ‘경주 최부잣집’이다.

경주 최부잣집은 1600년대 초반에서 1900년 중반까지 무려 300년 동안 12대에 걸쳐 부를 누렸지만 나라가 망하자 마지막 최부자 최준(1884∼1970)은 재산을 정리하여 상해임시정부에 나라를 되찾는데 쓰라며 독립군자금으로 보냈다. 광복 후에는 인재양성을 위해 남은 전 재산을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청구대’와 ‘대구대학’ 설립에 쏟아 부은 후 스스로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지금은 집도 후손들의 소유가 아닌 영남대에서 관리하고 있다. 비록 만석 재산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우리에게 값지고 소중한 가치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경주 최부자 가문이 300년 넘게 부를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 비밀은 최부잣집 가문이 지켜 온‘여섯가지 가훈(六訓)’에 있다.

첫째, “절대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

품위 유지를 위해 제일 낮은 벼슬인 진사 벼슬은 반드시 해야 하지만 절대 그 이상의 벼슬은 탐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높은 벼슬에 오르면 정쟁에 휘말려 집안이 화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재산은 1년에 절대로 1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왜냐하면 지나친 욕심은 반드시 화를 부르기 때문이다. 1만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과 소작농들에게 나누어줬으며, 최부자는 12대에 걸쳐 이 가훈을 철저히 지켰다.

셋째,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하룻밤 잠자리까지 마련해 준 후 보냈다. 예나 지금이나 정보를 장악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최부자는 나그네들에게 작은 베풂으로 가만히 앉아서 1천리 밖의 소식을 접한 것이다.

넷째, “흉년에는 남의 논, 밭을 사지 말라.”

흉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남들이 싼 값에 내 놓은 논밭을 사면 손쉽게 재산을 늘릴 수는 있지만, 그들을 원통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원과 한이 서린 재산은 싼 값에 취득한 것만큼 원성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할 때만이 기치가 있는 것이다.

다섯째, “가문의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동안 낡은 무명옷을 입혀라.”

며느리는 말 그대로 새 식구이자 안주인이다. 바꾸어 말하면 며느리가 잘못하면 그 집안이 망하는 건 시간문제다.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 3년간의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진정한 최부자의 안주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지혜가 숨어 있다.

여섯째,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지금도 최부잣집 안채 마루에는 쌀뒤주가 놓여 있는데 그 뒤주는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위한 것으로 1년 365일 항상 대문 밖에 내놓았다. 누구든 필요한 만큼 퍼가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양식을 구하려 온 자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배려가 숨어 있었다.

이 같은 철저한 배려와 나눔은 구한말 굶주린 백성들이 도적떼로 변해 스스로를 의적이라고 부르며 조선8도의 부잣집을 약탈하는 등 부자들이 수난을 겪을 때 오히려 최부잣집은 그들이 호위하며 지켜주었다고 한다.

최부자 가문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의 결단은 또 하나의 인생 사표(師表)이다.

못다 푼 신학문의 열망으로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세웠고, 백산상회를 세워 일제시대에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그는 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재물은 분뇨(똥)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지만,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을 평생 잊지 않고 실천에 옮겼다. 모두가 가슴에 새기고, 실천해야 할 진리의 말씀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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