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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가 실망스러운 부분

등록일 2018-07-03 20:55 게재일 2018-07-0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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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주한동대 교수
▲ 김학주한동대 교수

이번 러시아 월드컵 예선전을 보면서 세계 축구가 많이 평준화되었음을 느꼈다. 각 나라마다 축구를 위한 인프라를 개선했고, 세계 유명 축구 구단의 스카우팅 시스템이 개선되어 축구 후진국 선수도 개인 실력만 있으면 큰 시장에서 뛸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한국 선수들도 볼 컨트롤이 많이 개선됐다. 2002년 거스 히딩크는 이것 때문에 힘들어했다. 볼 컨트롤이란 ‘공을 원하는 곳에 원하는 속도로 보낼 수 있는 능력’으로 모든 구기의 기본이다. 그런데 한국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은 잔디 위에서 뛰어 본 경험이 부족하여 이러한 기본도 없었다. 그래서 히딩크는 상대 선수를 압박하는 전략을 세웠고, 이를 위해 선수들의 체력을 기르는데 집중했다. 그 전략은 적중했고 좋은 성과를 냈다. 물론 홈 구장의 이점과 약간의 편파판정 덕을 봤지만 말이다.

볼 컨트롤이 좋아지면 창의적인 플레이가 가능하다. 상대 수비가 없는 공간으로 뛰는 선수에게 알맞은 곳에 알맞은 속도로 공을 전달하여 수비를 벗겨낼 수 있다. 이것이 축구가 아름다운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 선수들에게서 이런 창의적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볼 컨트롤이 좋아졌는데도 말이다. 이 점이 실망스럽다.

수비에서도 상대를 너무 떨어뜨려 놓았다. 즉 상대 선수가 편안하게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스스로를 힘들게 했다. 수비수는 공을 주고 빠지는 공격수를 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공격수는 이미 속도가 붙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미드필드부터 압박을 했다면 쓸데없는 데 힘을 소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한국의 젊은이들은 ‘창의’에 약할까? 먼저 교육의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자. 창의를 위해서는 자신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생각을 쏟아낼 수 있지 않은가. 유교적 문화는 분명히 여기에 방해가 될 것이다. 아시아 국가들이 모두 축구를 못하는 이유를 여기서 부분적으로 찾을 수 있다. 물론 아시아인들의 다리가 짧은 것도 축구에서는 약점이다. 순간 가속에서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한국인들이 놀라운 진취성을 1970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보여줬다. 그 기간 한국 증시의 투자수익률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유교 문화로 인해 순종적이기만 했던 한국인들이 조국이 짓밟히는 것을 보고 눈이 뒤집혔다. 박정희는 분명 독재자다. 젊은 시절 그의 일관성 없는 행동들을 보면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았던 것 같다. 반면 성취동기는 대단했다. 그 시대를 돌아보면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박정희는 왜 우리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지 의문을 던졌다. 그리고 강압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성취동기를 발산했다. 이 과정은 비난을 받아야 한다. 뜻을 같이했던 재벌들도 요즘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기업가 정신, 그리고 용기는 젊은 후배들이 본 받아야 한다. 그들이 없었어도 한국이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비겁해 보인다.

이제는 중국도 미국처럼 지적재산권을 비롯한 고부가 산업을 원한다. 즉 하는 일이 비슷해지며 경쟁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세계 교역이 줄고 권역화된다. 자원이 없고 물건을 팔아야 하는 한국은 취약해지기 마련이다. 이 국면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은 더 진취적이어야 한다.

정부는 젊은이들을 위해 최저임금을 올린다. 세계경제가 저성장으로 가는 상황에서 이는 흔한 현상이다. 그러나 시장원리를 무시한 파격적인 최저임금 인상은 부작용을 낳는다.

최근 경제활동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실업률이 높아지는 현상은 이례적이다. 편의점 등 최저임금이 적용되는 분야에서 고용 위축이 두드러진다. 결국 최저임금 인상은 상대적으로 능력있는 젊은이들의 주머니를 부풀려줬지만 그렇지 못한 젊은이들과 노인들의 일자리를 앗아갔다. 원했던 결과인가? 그럼에도 이런 포퓰리즘을 옹호하는 나약한 젊은이들을 보면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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