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월드컵 시즌이다. 수억 명의 축구팬들이 열광하는. 축구는 밀림과 정복전쟁이 사라진 시대를 사는 현대인 내부에 잠복한 원시의 ‘뜨거운 피’를 확인시켜주는 매력적인 스포츠임에 분명해 보인다. 공을 쫓아 맨몸으로 잔디 위를 뛰는 건장한 사내들이 뿜어내는 야성미는 스포츠에 문외한인 기자가 보기에도 시원스럽긴 하다. 그래서일까. 주위엔 축구 관람이라면 밥 먹는 것도 미루는 선후배가 적지 않다.
특히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한 시절 낙양의 지가를 올린 시인 최영미의 축구사랑은 각별하다. 축구를 소재로 ‘공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제목의 책을 냈을 정도니까. 최 시인은 축구가 가진 매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축구는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 건진 최상의 것이다. 내게 축구는 둥근 공을 통해 세계의 어디로든 가고 누구와도 만날 수 있는 자유이며, 스크린을 넘어 광막한 우주를 사유하는 감각적이며 지적인 욕망이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겐 첫사랑에게 보내는 연서(戀書)와도 같은 최영미의 축구를 향한 애정 고백이 뜬금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이렇듯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건 근사한 일.
비단 최 시인만이 아니다. 시나 소설을 쓰는 이들은 정적이고 조용할 것이란 선입견이 있다. 그러나 천만에. 남성 작가는 물론 여성 문인들 중에도 축구팬이 적지 않다. 아니 아주 많다. 보는 것을 넘어 직접 나서 문인축구단 혹은, 소설가축구단을 만드는 경우도 흔하다.
하지만 기자는 때론 축구가 무섭다. 아니 축구를 향한 팬들의 과도한 에너지가 무섭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2002년 한·일 월드컵. 평소 서울 광화문 사무실에서 마포의 집까지는 지하철로 4구간, 버스를 타도 10분이면 오갔다. 그런데, 월드컵 기간 중에는 단 한 번도 편하게 퇴근하지 못했다. 지하철은 광화문역을 무정차 운행했고, 수백 만 명의 ‘붉은 악마’가 점령한 도로에는 버스는 물론 택시도 다니지 않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시며 축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경기 종료 후에도 광화문광장의 열기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한국 팀이 승리했건, 패배했건 박자에 맞춰 큰 소리로 경적을 울려대는 자동차 수십 대가 거리를 질주했고, 몇몇 청년들은 위험천만하게도 술에 취한 채 차량 지붕 위에 올라 괴성을 지르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축구를 향한 팬들의 에너지는 한국만 특이한 게 아니었다. 2016년 6월. 업무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 갔다. 그런데 하필 그때가 ‘2016 유로컵’이 열리던 기간. ‘유럽인들은 공공질서를 준수하고 타인에게 폐가 되는 행위는 자제하는 매너를 갖췄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예외가 존재했으니 바로 축구를 대할 때였다.
낮부터 노란색 유니폼을 맞춰 입은 스웨덴 축구팬들과 초록색 셔츠로 집단 무장한(?) 아일랜드 축구팬들을 호텔 앞과 바스티유 광장 카페에서 수도 없이 만났다. 문제는 밤에 일어났다. 만취한 아일랜드 팬들이 호텔 로비에서 자기 나라 팀을 응원하는 노래를 부르자, 이에 발끈한 스웨덴 팬들 역시 호텔 복도로 나와 ‘떼창’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새벽 3시. 미칠 지경이었다. 어떤 매력이 축구에 있어 인간을 ‘유사 광증(狂症)’으로까지 몰아가는 것인지. 축구에 별 관심이 없는 기자로선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열정과 에너지를 바치는 인간을 책망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다만 그 에너지와 정열에 타인을 향한 배려가 담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이상 “축구가 무섭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나저나 멀리 러시아에서 나라의 명예를 위해 뛰고 있을 한국 축구 대표팀. 그들의 선전을 진심으로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