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잘하세요
아주 훌륭한 대표님이 계신다. 그분은 4월 30일 기자회견을 가지시었다. “이번 정상회담 선언문의 1조 1항은 ‘민족 자주의 원칙을 확인한다’는 내용”이라며 “‘우리 민족끼리’로 표현되는 ‘민족 자주의 원칙’은 북한의 대표적인 통일전선 전략이자 한국 내 주사파들의 이념적 토대”라고 말씀하셨다. 한 기자가 “민족 자주 원칙은 1972년 7·4 남북공동 성명에도 들어가 있는 내용인데, 박정희 대통령 때도 주사파가 있었다고 보십니까?”라고 물었다. 우리 대표님은 아주 쿨하게 “다시 공부하고 질문하세요.”라고 말씀하셨다.
기자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지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와 같은 말투로 “너나 잘 하세요.”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어찌되었건 기자회견은 더 진행된다. 이번엔 또 다른 기자가 “트럼프, 아베 역시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환영 목소리를 냈습니다.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비판의 목소리만 내기에는 한국당에 정치적 부담감이 크지 않나요?” 대표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남북 대화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북핵 폐기 없는 어떠한 회담도 우리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이번 회담 내용에 북핵 폐기 조항이 있습니까?”라고 되물으셨다.
아, 그때 내가 있었더라면…… “예, 있습니다.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라는 구절이 있고, 비핵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이 계속 등장합니다. 아, 대표님! 심봉사는 심청이가 있어 눈이라도 뜨게 할 수 있었는데, 대표님은 귀가 막혔으니 무슨 수로 귀를 뜨이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통곡했을 텐데…·.
△전조작기와 인지부조화
이 기자회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대표님께서 유아기의 전조작기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과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앓고 있다는 것이다. 피아제는 두 살에서 일곱 살 사이의 아이들이 보이는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시기를 ‘전조작기’라고 명명했다.
이와 관련된 심리실험은 매우 흥미롭다. 엄마와 아이가 같이 방에서 놀고 있다. 엄마는 잠깐 화장실에 가기 위해 공을 바구니에 담아 놓고 방을 나간다. 그러자 아이가 바구니에서 공을 꺼내 상자에 집어넣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엄마가 방에 들어와 공을 찾는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유치원생들에게 지켜보게 한 뒤 물었다. “엄마는 공을 어디서 찾으려고 할까요?” 너무 쉬운 질문이다. 엄마는 바구니를 찾을 거다. 자신의 아이가 공을 꺼내서 상자에 넣었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엄마가 바구니가 아니라 상자를 열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알면 타인도 알고 내가 모르면 타인도 모를 것이라고 아이들은 생각한다. 아니, 왜? 아이들은 세상의 중심에 자신이 있고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피아제는 인간의 인지발달을 네 단계로 나누고 있다. 먼저 ①반사적 행동 위주인 ‘감각운동기’ ②직관적이고 자기중심적 사고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는 ‘전조작기’ ③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외향적 변화와는 별개로 근본적 보존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구체적 조작기’ 그리고 ④논리적 가설과 추론이 가능한 ‘형식적 조작기’가 그것이다.
그런데 피아제는 전조작기가 2~7살 사이에 일어나는 인지적 특징이라 말했다. 나는 우리 대표님의 이런 태도를 통해 피아제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전조작기란 특정한 국면에 찾아오는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따라오는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 대표님이 독해나 청해 능력이 떨어져서 ‘핵 폐기’라는 말을 읽지 못했다고는 볼 수 없다. 대표님은 알면서도 듣고 싶지 않았고 알면서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대표님은 자아가 너무 강해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대표님은 합리적으로 행동하시기 보다는 행동을 합리화하신다.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분명한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행동을 합리화한다는 것은 행동한 뒤에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말한다. 사회심리학자 라온 페스팅거에 따르면 사람들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난 후에도 어떤 식으로든 그 행동이 옳았다고 믿으려 애쓰며, 명백하게 잘못된 행동이었음에도 끝까지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사람들이 보이는 이러한 태도, 즉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보다는 나는 틀리지 않았어, 라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태도를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 불렀다.
△쉬운데도 어렵다고 느껴지는 말
이런 인지부조화를 대표님이 겪고 있는 이유는 아마 지금 현실이 대표님의 가치관을 흔들고, 대표님의 지지기반을 흔들고, 대표님의 존재마저 뒤흔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표님은 저 쉬운 말들로 이루어진 선언문조차 들리지 않았고 읽히지 않았으리라.
그런 점에서 ‘진짜 어려워서 들리지 않는 것’보다 ‘쉬운 말인데도 어렵게 느낄 때’ 문제가 심각해진다고 생각한다. ‘진짜 어려운 말’은 배워서 알면 되지만, ‘쉬운 말인데도 어렵게 느껴지는 말’은 그 사람의 사고방식을 바꿔야만 들리게 된다.
이를테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눈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탄핵을 긍정하는 사람은, 국민이 준 권리를 최순실이라는 민간인과 나눠썼다는 것, 국민이 부여한 권리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무시했고, 그러므로 탄핵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탄핵을 부정하는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에게 이용을 당한 피해자일 뿐이라고, 국정농단을 한 최순실을 비판해야지 왜 박근혜를 비판하냐고, 박근혜 대통령을 죽이려는 ‘좌뺏들의 책략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렇게 탄핵을 진심으로 긍정하는 사람과 진심으로 부정하는 사람이 말싸움을 시작한다면 그들은 서로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말만 할 것이다. 자신의 사고방식에만 갇혀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때 이 둘은 결국 같은 사람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쉬운 말인데도 어렵게 느껴지는 말’이란 전혀 어렵지 않지만, 자신의 생각이 고집처럼 자기를 휘감고 있어 다른 사람의 말은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바꾸지 않으려는 사람들,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인지부조화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인지부조화는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믿음에 따라 다른 사람을 재단하고 비판하는 사람을, 우리는 전문용어로 ‘꼰대’라고 부른다.
나는 ‘진짜 어려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보다 ‘쉬운 말인데도 어렵게 느끼는 사람’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후자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자기에게 익숙하고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말만을 듣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만 이해하며 평생 독방에 갇혀 홀로 삶을 영위해야만 한다.
‘쉬운데도 어렵게 느껴지는 말’을 듣는 일은, 감옥에 갇힌 줄도 모른 채 수감되어 있는 자신의 사유를 해방시키는 일과 같다. ‘쉬운데도 어렵게 느껴지는 말’을 읽지 않는 것은 내 말만, 내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와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그들의 삶까지 부정하는 일과 같다. 그러니 우리는 어렵게 느껴지는 말, 나와 생각이 다른 말까지 들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왜 우리에게 두 개의 귀가 있는지를, 그 때 비로소 세계가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민주주적인 사회라는 사실을 진실로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