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7~1535)는 어렸을 때 대주교이자 지금으로 따지면 총리 격에 해당하는 상서경인 모턴 대주교를 모시는 시동생활을 하였다. 모턴은 토머스 모어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이 아이는 언젠가 위대한 인물로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호언할 정도였다. 이 말이 씨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토머스 모어는 법률을 공부하고,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나중에는 모턴처럼 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는 상서경이 되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미움을 받아 1534년에 체포되었고 1535년에 단두대에 오르게 된다. 모어는 단두대에서 “내 목은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라는 농담을 건넸을 정도로 죽음 앞에서 초연했다고 전해진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라는 책을 썼다. ‘유토피아(Utopia)’란 어디에도 없는(U) 장소(topia)라는 뜻으로 모어가 직접 만든 말이라고 한다. 이 책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정치가인 토머스 모어가 이 책을 이상적인 국가상을 제시했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에 반해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이상적인 국가를 말하는 사람들을 모어가 비아냥거리고 조롱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책을 읽어보면 두 주장 모두가 옳은 것처럼 느껴진다. 어디, 그럼 작품 속으로 들어가볼까?
△ ‘유토피아’에서의 삶
이 작품은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가 토머스 모어에게 자신이 여행한 ‘유토피아’라는 나라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형식을 띠고 있다.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는 이탈리아의 항해가이자 탐험가이며, 아메리고 베스푸치와 함께 항해에 동행할 정도로 뛰어난 선원으로 여러 나라를 경험하였으며, 매우 비판적이고 냉철한 철학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면 히슬로다에우스의 이야기가 전하는 유토피아에 대해 들어보자.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들은 고요한 전원생활을 향유하며 농업 생산량이 풍부하여 굶주리는 사람이 없다. 또한 사유재산이나 화폐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공평하게 살아간다. 군주가 가장 아끼는 것은 돈이 아니라 그 나라의 국민이며, 사람들은 종교를 열심히 믿어야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근면하고 성실해야 천국에 간다고 믿는다. 이렇게 보자면, 유토피아는 정말, 사람들이 모두가 원하는 그런 곳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사유재산도 없을뿐더러 개인적 공간도 없다. 대문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하며 아무나 불쑥불쑥 들어와도 상관없다. 이곳에는 농땡이를 치거나 빈둥거릴 장소가 없다. 유흥가는커녕 술집조차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락을 하고 싶어도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한다. 또한 정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싶어도 비밀 집회를 열 장소가 없다.
또한 이들은 관념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개개인을 나타내는 말은 있어도 이 개개인을 총칭하는 ‘인간’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말도, 행복이라는 말이 없다. 그런 말이 없다는 것은 사랑이나 행복도 없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언어는 우리의 사유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평등이라는 말이 없었다면 우리는 계급평등, 계층평등, 남녀평등, 소수자의 사회적 참여 혹은 포함과 같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 언어가 없다는 것은 그와 관련된 행위가 없다는 것과 동일하다.
△ 서로 다른 목소리
이렇게 ‘유토피아’에는 이상적인 것과 기괴한 것들이 함께 섞여 있다. 도대체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일까, 아니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일까. 그의 입장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나는 모어 스스로도 헷갈려 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의 입으로 두 말을 하면서, 자신이 한 주장을 정반대로 뒤집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
“어떤 사람을 기형아 또는 불구자라고 해서 놀리는 것은 놀림을 당하는 쪽이 아니라 놀리는 쪽이 오히려 진짜 추악하고 보기 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는 자기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불구자를 비난하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지요.”
유토피아에서는 장애가 있는 사람을 놀리는 사람을 오히려 혐오한다. 왜냐하면 장애란 스스로 선택한 것도 아니고 의지의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토머스 모어는 이미 오래 전 장애인에 대해 이토록 진보적이며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유토피아’에서 배우자를 고르는 풍습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모어는 자신의 주장과 위배되는 주장을 펼친다. 이런 식이다.
“그들은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우리 눈에는 어리석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게 보이는 관습을 엄숙하게 진지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여자는 분별 있고 존경할 만한 부인의 의하여 알몸으로 구혼자에게 보여 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품이 훌륭한 남자 한 분이 구혼자를 알몸으로 여자에게 선보입니다. …중략… 모든 사람들이 오직 상대방의 성품에만 주목할 정도로 그렇게 현명하지는 않거든요. 그리고 현명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육체적 아름다움을 정신적 미덕에 부가된 천부의 기질로서 높이 평가하지요. 남자와 여자의 몸이 이제는 법적으로 갈라설 수 없게 되어 있을 때, 남자의 마음을 여자에게서 떠나게 하고도 남을 만한 중대한 신체적 결함이 언젠가는 틀림없이 옷 아래에서 노출되고 말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토머스 모어가 500년은 빠를 만큼 장애인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의 인용문에서 모어는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한다. 결혼하기 전 남녀는 알몸으로 만나 서로의 몸에 결함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다. 누군가 육체적 결함이 있다면 그 결혼은 성립하지 못한다. 이런 유토피아에서 장애인은 결혼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육체적 결함을 정신적 미덕으로 연결시키는 이곳에서 장애인을 놀리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 걸까?
토머스 모어는 장애인에 대해 한없이 상냥하고 자애로운 목소리를 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엉뚱한 소리를 내뱉는다. 현명하고 슬기로운 히슬로다에우스는 어쩌다 이렇게 모순적인 목소리를 갖게 된 것일까! 어쩌다 뱀의 혓바닥처럼 갈라진 혀를 가지게 된 것일까? 어쩌다 한 입으로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일까?
이러한 비일관성은 글이라는 속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항상 두 명이다. 하나는 작가, 다른 하나는 글이 지닌 형식(혹은 속성)이다. 다시 말해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의 작가이기도 하지만,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도 작가로 동참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논리를 따라가고 글은 글의 형식을 따라간다. 이 둘의 논리가 일치하지만, 때로는 달라질 때도 있다. 그래서 책 속에서는 상반된 주장이 펼쳐지곤 한다.
이것은 책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 여야가 보이는 댓글, 남북문제, 개헌 등의 현안에 대해서 보이는 태도가 좋은 사례다. 상황에 집중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 상황에서 물러나 상황 전체를 조망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치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설득을 시킬 수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것이다. 그러니 여론을 무시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