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일찍이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에서 ‘학이불염 회인불권(學而不厭 誨人不倦)’, 즉 ‘배우는 데 염증을 느끼지 말고, 가르치는 데 권태를 부리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맹자 또한 이의 중요성을 깨달아 ‘학불염 교불권(學不厭 敎不倦)’으로 요약하기도 했다. 이처럼 학(學)과 교(敎)는 동양의 유명한 두 성인이 이야기할 정도로 중요한 개념이었다. 이 중, 학(學)은 참으로 그 뜻이 오묘하다. ‘학(學)’은 어린이가 책상에서 두 손으로 무언가를 학습하는 모양을 상형화한 글자이다. 그래서인지 얼핏 교육 현장, 그것도 배우는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듯싶다. 하지만 배움이란 비단 학교에서 책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실현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학(學)’은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배우는 것일까? 바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이다. 율곡은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서문에서, ‘사람이 세상에 나서 배우지 않으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사람다운 삶은,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권력을 휘두르며 사는 삶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그러한 삶이 사람다운 삶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옛 성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갈고 닦고 배우려는 자세가 일상화 된 삶, 그것이 바로 사람다운 삶이라고 생각하였다. 배우는 삶은 달리 말해, ‘앎’을 추구하는 삶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안다는 것(知)은 곧 힘을 축적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학인(學人)은 힘이 있는 능인(能人)이요, 능인(能人)은 사회에 꼭 필요한 용인(用人)이 되지만, 배우지 않는 사람은 무능인(無能人)이요, 무능인은 사회가 필요치 않는 無用之 “物”이 되기 쉽다.
그런데 배우는 것도 ‘잘’ 배워야 할 일이다. 어디서 배우긴 배웠으되, 간사함(간지·奸智), 교활함(교지·狡智), 사특함(사지·邪知)만 배운 탓에,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잡아떼면 그만인 윤리 의식 없는 정치인들, 상도(商道)를 상실한 경제인들, 당연한 듯 성상납을 요구하는 문화계 인사들, 취업알선이나 논문 통과 등을 미끼로 행패를 부리는 교육계 인사들 등은 우리 사회의 낯부끄러운 얼굴들이자 모두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이들이다. 재산을 나눠주지 않는다고 부모를 죽이는 패륜아들이나 게임에 빠져 자식을 굶겨도 죄책감 없는 부모 등도 모두 제대로 배우지 못한 無用之 “物”들이다.
사람은 제대로 배워야 한다. 제대로 배워야만 총명한 지(明智), 이치를 꿰뚫어보는 슬기로운 지(叡智), 영민하고 탁월한 지(英智)가 가득한 제대로 된 지(知)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로의 발돋움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자기 수양(나를 제대로 알기(知己), 나를 갈고 닦기(修己), 나를 완성하기(成己))를 부단히 하였다. 이를 잘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제대로 된 배움을 행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추후 사도(師道)를 갖춘 진정한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 그래서 학(學)은 교(敎)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자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이들이라면, 교(敎)를 생각하기에 앞서 과연 나의 학(學)이 어떠한가를 먼저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내 연구실의 한 벽면에, ‘학이불염(學而不厭)’을 걸어 놓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